위즈덤하우스 (230805~230811)
(23/08/11)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그리고 미각까지 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이용해 소설을 읽어내려 간 기분이 들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은 후에 잠시 그 여운을 음미했다.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와닿는 감각의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한 인터뷰에서 구병모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 구병모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다. 이에 대해 구 작가는 “인간 자체가 바로 현실에 생존해 있는 불완전함 그 자체”라며 “주변을 관찰하며 찾아낸 인간성의 그늘진 이끼,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불안정성과 상처를 소설 속 인물들에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말처럼,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상처로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아파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아픈 상처를 입힌다. 빛 아래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어둠에 자신을 숨기는데 더 익숙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죽음 직전의 순간 아가미를 얻었고, 그 후에는 등에 비늘을 얻게 된 아이. 물 밖에서보다 물속에서 더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아이, 곤.
곤을 집으로 데려오자고 노인을 설득했고, 아이의 이름도 붙여주었으면서 정작 알 수 없는 질투와 분노, 두려움을 느끼고 곤을 미워하지만 그럼에도 애정을 주는 아이, 강하.
우연히 강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알 수 없는 인어를 닮은 생명체에 관한 글을 올렸다가 그를 안다는 사람을 찾아 고마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길을 나선 해류.
강하가 『장자』를 읽고 ‘북쪽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곤(緄)’이라는 이름처럼, 곤은 어쩌면 ‘강과 하천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뜻의 강하와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는 바닷물의 흐름‘이라는 뜻의 해류라는 이름을 만나 하천, 호수, 강을 지나 바다로 흘러 나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땅이 질어서 질퍽하게 된 곳’인 ‘이녕’에서는 제대로 숨을 쉬고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나와는 다르다는 특별함을 이해할 수 없어 물고기 새끼라며 미워하면서도 곤을 사랑했던 강하는, 곤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숨 쉬고 살 수 있도록 그동안 온갖 겁을 주고 협박하면서까지 나가지 못하게 했던 세상 밖으로 갑작스럽게 속박을 풀고 내쫓듯 내보낸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곤은 대문을 열고 뒤돌아보았다. (p.185)
그리고 강하가 곤의 이름을 지어줄 때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된 붕(鹏)’을 보며 예감했던 것처럼 작은 새가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곤은 이내촌을 떠나간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p.194)
곤은 확신을 가지고 바다를 헤매는 걸까, 아니면 확신 없음으로 바다를 헤매는 걸까. 어떤 마음이든, 앞으로도 곤은 그가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물속에서 그에게는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며 살아가지 않을까.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