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책방 (230826~230831)
| 첫 문장: 여자의 허벅다리 안쪽에는 칼로 그은 긴 흉터들이 얽혔다. (p.9)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p.301)
(23/08/31) ‘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자 인간은 다시 고통을 갈망하기 시작했다’는 문구에 엄청난 끌림을 느꼈다. NSTRA-14라는 부작용과 중독성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를 개발하며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제약회사, 그러나 고통이 없는 삶은 자신의 영혼을 자각하지 못하는 삶이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구원에 이르며 초월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교단,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
교단의 보호에 보답하기 위해 교단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은 태의 형 한과, 교단의 지시로 제약회사 본사를 폭발시켜 경의 부모를 죽인 태. 부모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고통받다 자살을 시도해 아이러니하게도 폭발사고로부터 목숨을 건진 경과, 그런 경을 보살피다 결혼까지 하게 된 현. 그리고 이들의 주위를 맴돌며 삶을 지켜보는 엽.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인물들의 고통과 통증, 흉터와 상흔, 그리고 고통의 의미와 고통 이후의 삶을 다룬다.
|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 (p.128)
살아가면서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고통을 느끼는 정도와 대응하는 방식, 그리고 고통을 넘어 회복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완벽히 동일하게 나의 고통의 감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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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증이 찾아오면 경은 자신의 몸과 싸우지 않았다. 동그랗게 웅크리고 누워서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럴 때면 현은 옆에 함께 누워서 창백해진 경의 어깨를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p.169)
| 경은 현을 사랑했다. 그리고 현과 함께, 자신도 현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남은 삶을 함께 살기를 원했다. 고통스럽지 않은 기억으로 삶을 채우고 흉터가 아닌 증거들로 앞에 남은 생을 함께 축복하고 기념하기를 원했다.(p.3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사랑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그리고 그 고통을 대신 겪어줄 수는 없어도, 우리는 현처럼 곁에 머무르는 방식으로도 고통을 공유할 수 있다. 부모에게 고통을 받고 잘못된 믿음을 주입받아 혼자서는 제약회사 밖의 ‘진짜 현실’을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경은, 회사와 사랑하는 현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던 과거의 삶을 계속 곱씹다 보면 그 속에 매몰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남은 생을 현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결국 홀로 서는 경험을 하며 고통을 극복해 보았기에 경은 사랑하는 현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경이라는 이름의 한자(嬛, 홀로 경)는 ‘홀로, 고독한, 단단한, 치밀한’이라는 뜻과 함께 ‘날렵한, 산뜻할, 우아한’이라는 뜻의 ‘현’이라는 음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를 보고 경은 홀로 있을 때도 현과 함께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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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이 완전한 결별을 고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을 태는 비로소 깨달았다. 오래전 태가 저지른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가 남긴 두 사람의 삶 사이에 있던 연결점이 사라졌다는 것, 최소한 경은 이제 그 연결점에 얽매이지 않고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태가 남긴 잔해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향해 이미 나아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끝이었다. (p.320-321)
스스로에게 가해서 생기든 외부로부터 생기든 간에 고통 이후에는 흉터라는 흔적이 남는다. 흉터는 고통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고통에서 회복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경이 마지막으로 태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는 장면은 어쩌면 자신의 흉터를 완전히 봉합하고 회복하는 마지막 단계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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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을 생체 실험에 이용하는 경의 부모나, 엽이 교단을 만든 목적과 다르게 이를 악용하여 타인의 고통 위에 서서 그것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을 보며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아픔, 괴로움마저도 자신을 위한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섬뜩하고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엽의 살인이 달갑지 않으면서도, ‘엽-교주-의사-외계 존재’라는 이 세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것이 악을 처단하는 것이 오히려 더 극적인 처형이라고 느꼈다.
누구나 고통을 겪지만,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며, 크고 작은 흉터를 품고 있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나의 고통이 이해받거나 대신 겪어줄 수 없는 것일지라도 사랑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들의 곁에 머무르며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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