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을 버려야 할 때

2019.04.17 읽고 쓰기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by bookyoulovearchive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부의 글 세 편 - '비무장의 예언자들 - 2018년의 '남북'과 '남녀'', '깊이 있는 사람', 그리고 '시기상조의 나라' - 을 읽었다. 오늘 글도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들이 많아 가져와본다.


한 여성이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공동체의 무시와 조롱 속에서 발언권을 빼앗기고 마는 이 설정은 근래 '#미투' 운동이 폭로한 권력적 성 착취와 그 은혜의 메커니즘을 놀랍도록 원형적으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카산드라가 있는 것인가. 2018년의 '남녀'는 '남북'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 (198-199쪽, '비무장의 예언자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 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202쪽, '깊이 있는 사람')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4쪽, '깊이 있는 사람')




3부는 '사회'를 다루고 있는 글들을 담은 만큼 무겁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던져준다. 오늘 글을 읽으며 최근 있었던 많은 사건들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4월 초 있었던 강원 지역 화재 사건과 당장 오늘 새벽 일어났던 진주 아파트 살인 사건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강원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특히 하루 만에 잡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고성-속초의 불길은 거침없는 기세로 타올랐으나 밤새 전국에서 동원된 수많은 소방관 분들의 노고로 금방 잡혔고, 그렇게 속초 시내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었던 산불은 추가 진화 작업을 통해 완전 진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가적 재난에도 어떤 이들은 무엇이 중한 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리고 산불로 인해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겪은 분들께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 사람들은 단지 그 고통이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이라는 이유로 이 상황에 공감을 하기는커녕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체'하며 그 고통을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객관적으로 접근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는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어도, 적어도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 새벽 발생한 진주 아파트 사건을 보며 이것이 과연 정신 질환이 있다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짓일까 의심이 들었다. 살인자는 노인과 시각장애를 지닌 사람, 어린아이,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려던 보호자까지 급소만을 공격해 살해했다. 그리고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살인자는 범행을 저지르며 자신보다 건장한 남성을 목격하기도 하였으나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의 분노를 왜 대체 자신보다 약한 타인에게 표출하는 것일까? 하루 종일 이 생각 때문에 화가 나고 우울했다.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진심으로 타인의 고통에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훗날 고통과 슬픔을 겪을 때 그것을 이해해 줄 이가 누가 있을까. 여러모로 슬프고, 또 아픈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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