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9 읽고 쓰기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205쪽부터 264쪽까지 읽었다. 오늘 가장 마음에 남았던 두 문장을 아래 가져와 보았다.
이처럼, 눈앞에 뻔히 존재하는 위험에 대한 가상의 공포감이 실제 위험 자체보다 천배는 더 무시무시한 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걱정하는 불운한 재난보다 불안감이라는 부담 자체가 훨씬 더 괴롭다는 것을 잘 안다. (219쪽)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그보다 더 나은 처지들과 비교하며 늘 투덜거리고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그보다 더 열악한 처지들과 비교하며 감사를 표한다면, 어떤 인생의 처지에 놓여 있든 불평을 덜 하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229쪽)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 책 정보를 찾아보았다. 171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원제는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가까운 무인도 해변에서 28년 동안 홀로 살다가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가 그려낸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The Life and Strange Surpriz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 Mariner: Who lived Eight and Twenty Years, all alone in an un-inhabited Island on the Coast of America, near the Mouth of the Great River of Oroonoque; Having been cast on Shore by Shipwreck, wherein all the Men perished but himself. With An Account how he was at last as strangely deliver'd by Pyrates)라고 한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번역본이 총 454쪽인데 454쪽의 책 한 권을 인터넷에서 흔히 말하듯 '한 줄 요약'해 제목에 담아낸 것이다. (제목이 스포일러 그 자체인데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고 하니, 줄거리를 미리 알고 읽을 수 있어서 좋아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작가 대니얼 디포에 관해서도 찾아보았는데, 어느 정도 로빈슨 크루소를 떠올리게 하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 어쩌면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은 그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인물을 실감 나게 소설로 구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마음에 와 닿았던 첫 번째 문장은 내가 꽤나 자주 하는 상상과 연관이 있어서 더 유심히 들여다본 것 같다. 상상에는 끝이 없어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가다 보면 종종 '그런데 이 다리가 갑자기 끊어져서 물에 빠지면 어떡하지?'라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며 '그런데 비행기가 갑자기 추락해서 내 머리 위로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만약 탈출하지 못하면 나는 어떻게 될지 등 실제로는 그러한 재난이 일어날 확률이 극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으로 혼자 온갖 위험과 대처 방법에 대한 상황으로 무한대의 생각의 가지를 친다. 그래서 오히려 그 상상에 대한 공포감이 더 무서울 때도 있다. 사실 나는 엄청난 겁쟁이 쫄보라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오랜 비행을 하는 것도, 심지어는 비행기를 타는 것 자체가 좀 무섭다.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본 게 고등학교 1학년 때니, 참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 문장이 정말 와 닿았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가끔은 그런 생각들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괴롭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걱정을 사서 하는 타입이라서 아마 앞으로도 이 버릇을 고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번째 문장은 어제 읽었던 <<바람이 부는 시간>>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읽어서 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나는 지금 이렇게나 힘들고 슬픈데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에 우울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만큼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아니 나보다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제와 오늘 비슷하면서 조금은 다른 두 문장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슬픔과 불행을 나의 그것과 비교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나는 나보다 나은 처지, 나보다 열악한 처지라는 것을 내 방식으로 분류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가끔 다큐멘터리에서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나올 때 엄마는 '그래도 신체가 건강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해'라고 말씀하셔서 '맞아, 그래도 나는 건강해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불행한지 행복한지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는데 멋대로 '저 사람은 몸이 불편해서 힘들고 불행할 거야'라고 속단한 것이 아닐까 하고 반성하게 된다. 앞으로는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것을 지양하고, 특히 타인의 불행과 슬픔을 나의 다행과 감사로 표현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은 절대 비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지니고 있을 슬픔과 고통은 각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상처일 것인데, 그것을 비교해서 누구는 상처가 크고, 누구는 작고, 이런 것을 비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비교의 기준은 타인이 아닌 나로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어제보다 조금 더 아팠다면 내일은 조금 덜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내야겠다. 혹시나 내가 무지해서 나도 모르는 새 비교를 하게 되어 상처를 받았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은 참 어렵다. 평생의 숙제 같은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