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okyoulovearchive Dec 29. 2023

민구, 세모 네모 청설모

현대문학핀시리즈 시인선 049 (231208~231229)



*별점: 4.0

*한줄평: ‘꿈이 나를 아무리 깊은 바다로 떠밀더라도 나를 붙잡아줄 것 같은’ 시들

*키워드: 이야기 | 사람 | 행복 | 슬픔 | 꿈 | 동물 | 기억 | 진실 | 미래 | 사랑 | 이름

*추천: 언어유희가 재미있는 시집을 좋아하는 사람


네가 평평하지 않고 공평하다면
세모일 수도 있고
네모일 수도 있고
청설모일 수도 있지

/ 「평평지구」 (p.52-53)


———······———······———


* 시집을 읽다 보면 언어유희가 재미있고, 또 재미난 상상도 많이 등장하지만, 진지하고 슬퍼지는 순간들도 있다. 화자는 ‘자신의 그릇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종이 접시처럼 볼품없어서 마음 아파하며 크림 컬러의 플레이팅 접시나 바로크 엔틱 찻잔이었더라면 꿈을 크게 가질 수 있었을까’ 자조하기도(「그릇」) 하고,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는 게 좋아 멀리 한강공원까지 나가 나를 유기하지만 잘라서 버린 팔다리와 머리가 어김없이 자신에게 붙어 있어 잔소리에 시달려 한숨도 못 자기도’(「걷기 예찬」) 한다.


* 그렇지만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축시 부탁을 받고’ 시를 쓰다 ‘재난문자 같은 시에 축시 마감을 한 주만 미룰 수 없을까’란 엉뚱한 상상을 하며 ‘면사포를 써야 상냥한 말이 떠오를 것 같다’(「축시 쓰기」)고 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워서’ ‘몸은 두고 다리만 집으로 와서 집정리도 하고, 가볍게 춤을 추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혼자」)도 하는 화자. 꿈을 자주 꿔서 ‘살아 있는 자들의 무덤, 심지어는 나 자신의 무덤을 보기도 하지만 잠에서 깨면 태연하게 모닝커피를 마시고’(「굿모닝」), ‘몇 날 며칠을 바다에 빠지는 꿈을 꾸지만 쌍무지개 휘어지도록 단단하게 자신을 붙잡아주는 이가 있는’(「햇빛」) 화자. 화자는 웃을 줄 알고, 웃음을 만들 줄도 아는 단단한 사람 같다.


* 얼마 전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열린 민구 시인의 낭독회를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봤는데, 시가 유쾌하고 웃긴 것만큼 민구 시인도 참 유쾌하고 웃긴 분 같았다. 이번 시집의 제목 『세모 네모 청설모』와 시집 표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엄청 솔직 담백하게 말씀하시는 게 묘하게 재미있고 유쾌해서 즐겁게 들었다.


* 이름과 별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인의 에세이 「별명」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맹구부터 민민구, 밍크까지. ‘민민구’ 에피소드에서는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별명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가져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름으로만 불린다는 건 그에 걸맞은 관계를 설정한다는 의미’라는 시인의 말이 확 다가왔다. 어릴 땐 별명이 있다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별명을 가졌던 때를 그리워한다니. 참 웃기다.


* ‘사랑한다면 벼멸구라도 상관없다’고 하며 누구와도 ‘친구가 될 준비가 됐다’는 민구 시인. ‘별명 없이 이제 이름으로 불리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p.110)는 시인에게 족제빗과 동물 밍크와 민구를 합친 ‘밍구’라는 귀여운 별명을 지어주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일에 치중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가 멋지고 귀엽다고 말하면 실례일까? 그러나 그건 정말 진심으로 멋지고 귀여운 일이라 생각한다. ‘밍구’의 다음 시집도 벌써 기대된다. [23/12/29]


(*현대문학 핀사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


|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 「걷기 예찬」 (p.18)


| 내 그릇을 본 건 처음이었어


  청소하다가 우연히 꺼내본 그릇

  너무 작아서 웃음이 나왔다

  내 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원형이나 사각형은 아니었고

  강박 때문에 금이 갔으며

  녹슬어서 보여주기 민망했다

  

  크림 컬러의 플레이팅 접시나

  바로크 엔틱 찻잔이었더라면

  꿈을 크게 가질 수 있었을까

/ 「그릇」 (p.40)


| 만약 네가 백 년 동안 살아 있다면

  수조를 준비해야겠지

  

  그땐 이 방이 수조 속에 들어가서

  모형 풍차처럼 조그만 기포를 만들며

  내가 너의 마리모가 되겠지

  

  그게 마음에 들었다

/ 「마리모」 (p.66)


| 별명이 없다. 이별 인사 없이 떠나버렸다. 이젠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으로 불리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름으로만 불린다는 건 그에 걸맞은 관계를 설정한다는 의미이다. 즉, 일하자는 거다. 돈을 벌어야 시를 쓰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에 치중하면서 살고 싶다. 별명을 불러도 좋은 친구가 그립다. 나를 뭐라고 불러도 좋은 사람들. 나는 친구가 될 준비가 됐다.

/ 에세이: 「별명」 (p.110)


———······———······———


*좋았던 시


 「한 사람」

 「멍」

 「걷기 예찬」

 「축시 쓰기」

 「아무도 모른다」

 「그릇」

 「굿모닝」

 「평평지구」

 「혼자」

 「우리 사이」

 「마리모」

 「의미 없는 삶」

 「포춘 쿠키」

 「새해」

 「비수기」

 「간조」

 「햇빛」


———······———······———


#도서제공 #현대문학 #핀사단 #필사

#민구 #세모네모청설모 #pin049


매거진의 이전글 민구 시인과 함께 하는 핀사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