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240219~240219)
* 별점: 4.0
* 한줄평: 부유하는 말들 사이에 홀로 서 있던 이들이 만나
* 키워드: 틱 | 병 | 말 | 마스크 | 버튼 | 흉터 | 악마 | 폭력 | 괴롭힘 | 혐오 | 마음
* 추천: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그런데 회복될 수 없는 조건을, 사라지지 않는 흉터 같은 것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있는 인생도 있다.
/ 작가 인터뷰: 그를 대신해 뭔가 말하고 싶었다 | 정용준 (p.81)
| 첫 문장: 오후 2시 40분 한산한 역사. 지하철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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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Take Out) 시리즈 열여덟 번째 책인 정용준 글, 무나씨 일러스트로 구성된 단편소설 『이코』를 읽었어요. 틱 장애로 인해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말을 제어할 수 없어 세상과 사람에게 상처받고 말문을 닫아 버린 주우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다른 존재’에게 치즈라는 이름을 붙여 줬던 미이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는데요.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재갈을 물어서까지 말하기를 거부하는 주우가 오래전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과 상처를 알아주고 공감해 줬던, 그래서 지금도 ‘치즈’가 하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짜 주우가 말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미이를 통해 다시 말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읽어본 정용준 작가님 소설 중에선 『유령』만큼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정용준 작가님 책을 읽다 보면 말의 무게나 대화와 소통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분명히 누군가를 아프게 할 것을 알면서도 상처를 입히기 위해 내뱉는 나쁜 말에 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주우와 미이가 더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괴로워하지 않기를.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요. ‘안 좋아하는 것은 더 슬프니까’요. [24/02/20]
ꕤ ‘이코’라는 제목의 의미가 짐작 가시나요?
ꕤ 주우, 미이의 이름을 거꾸로 하면 이미, 우주인데 작가님이 인물의 이름을 어떻게 지으신 건지 궁금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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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가 불쌍하지 않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난 진짜 괜찮아. 그랬는데 그들의 환대에 마음의 문이 열린 뒤 다시 닫혔을 땐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기어이 난 불쌍해진 거야. 그래서 마스크를 쓰기로 결심했어. 괜찮았어. 정말이야. 거추장스러운 것들 다 버리고 나니 고요하고 좋아. 세상 일을 어떻게 다 따지고 들겠어? 그런데 미이야. 너에겐 미안하다. 너에게 이런 모습 보이기 싫었어. 하지만 미이야, 날 이해해 줘. 적어도 너만은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 (p.46, 48)
| 네가 키운다는 치즈. 그게 뭘까? 그 고양이도 이름이 있었을까? 미이야. 나는 그런 것도 하나 모른 채 널 잃어버렸어.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넌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지. 나는 네 고양이가 뭔지 지금도 모르겠어. 다만 알겠는 건 내게 치즈가 그러했듯 네 고양이도 널 힘들게 할 거란 거야. (p.52-53)
| 그동안 약하고 불쌍한 것들에 끌려왔어. 연민이랄까. 그 끔찍하고 무력한 성정이 내 안에 있는 게 싫어. 지긋지긋해. 정말.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걸 개라고 불렀어.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도 사랑하게 만들지. 나는 원치 않았는데도 개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 난 결국 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말았지. 힘드니까. 비참하니까. 그것을 사랑이라 그냥 믿어 버리는 거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엄청 편하단다.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그림자 밑으로 쑤셔 박을 수 있거든. 주우야. 난 그렇게 살아왔어. (p.67-68)
| 난 네가 괴로운 걸 원치 않아.
난 괴롭지 않은 것보다 그냥 너를 좋아하고 싶어.
그래라. 네 맘대로 해라.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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