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내게 말해주세요

2019.04.29 읽고 쓰기 (정은귀, 바람이 부는 시간)

by bookyoulovearchive


정은귀 선생님의 <<바람이 부는 시간>> 3부 - 묻다 희망하다의 첫 두 글, '새 출발을 위한 '고별사''와 '성에꽃, 유리창에 그리는 얼굴'을 읽었다. 오늘 읽은 두 글은 이번 달 열심히 읽었던 책 중 한 권인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떠올리게 했다.


"난 알아요"를 다섯 번 반복하는 것은 그만큼 의미를 강화하는 방식이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아픈 고백이기도 하다. (155쪽)
떠난 이의 낯섦을 자각하는 일. 내가 당신의 절망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음을 아프게 고백하는 일. 내 말과 글, 내 시의 무용(無用)함을 자각하는 일. 그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156쪽)
내 공감의 한계를 아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시작된다. 알지 못한다는 점을 자각해야만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내 시선이 조금이라도 더 낮아질 것이니까. 그 낮아진 시선으로 절망에 빠진 타인과 눈높이를 맞추어 마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157쪽)
우리 사는 일이 어제와 같이 가혹한 시간을 다시 또 견뎌야 하는 일이겠지만, 그 견딤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함께 걷는 길에서 나누어갖는 이야기다. (157쪽, 이상 '새 출발을 위한 '고별사'')
시는 이렇듯 시간의 긴 결을 거슬러 여러 인연이 함께 만들어 온 두꺼운 충적층을 생각하게 한다. (...) 성에꽃 피어난 시간, 그 하루의 시작에서 누군가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그래도 외롭지 않다. (163쪽, '성에꽃, 유리창에 그리는 얼굴')



얼마 전 읽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안타깝게도 나는 경험이 일천한 탓에 ‘나’라는 주제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라는 구절을 읽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사실 내가 나를 잘 모를 때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타인에 대해서 다 알겠는가. 나는 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기 전까지 타인에 대해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설사 타인이 나에게 자신의 세상을 열어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이 내가 타인을 완벽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타인이 내가 될 수 없듯, 나도 타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타인에 대해 잘 알고, 다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상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당사자일 때, 그리고 목격자일 때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너를 이해해, 너의 마음을 잘 알아'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오만한 행동이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비슷한 경험을 해도 개인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의 크기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래서 '내 공감의 한계를 아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시작된다'는 저자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나의 힘듦과 절망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타인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이 당연히 나를 잘 알고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공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라는 시에서 이야기했듯, 우리는 나의, 그리고 너의 절망을 이야기해야 고통을 나누며 연대할 수 있고, 이 힘든 세상을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다. 결국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나의, 너의 절망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타인이 나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게 그와 눈을 맞춰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를 마치며 내가 차곡차곡 쌓아 온 인연의 충적층을 생각해본다. 나의 마음을 기꺼이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의 얼굴,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나는 외로운 사람은 아닌가 보다. 그러니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를 그대여, 내게, 혹은 당신이 떠올리는 누군가에게 말해주세요. 당신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걸으며 때로는 그대의 행복을, 나의 환희를, 때로는 그대의 절망과 고통을, 나의 아픔과 상처를 이야기해요. 그리고 함께 힘을 내봐요. 가혹해 보이기만 하는 세상을 함께 견뎌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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