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30 읽고 쓰기 (정은귀, 바람이 부는 시간)
정은귀 선생님의 <<바람이 부는 시간>> 3부의 글 세 편 - ‘나는 못된 도둑, 마음이 굽는 일용할 양식', ‘당신은 몇 점', '맥락 없음의 신비' -으로 4월의 읽고 쓰기를 마무리한다.
사랑을 나누고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질문하는 일. 매일을 제대로 살아내지 않으면 살아있는 삶이 곧 죽음이듯, 죽음을 딛고 마지막인 듯 다시 살아야 할 몫이 남아 있다. 마지막을 사는 일은 곧 새로운 결심으로 첫 걸음을 떼는 일이기도 하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않고 고단하지만 낙담하지 않고 그 걸음을 이어가는 일. (175쪽, '당신은 몇 점')
그러니 제발, 맥락을 묻지 마세요. 맥락이 없이도 발생하는 일, 맥락이 없이도 행동하는 힘이 있답니다. (...) '무언가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떤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랍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을 만나 그 일이 나도 모르게 내 앞의 숙제가 되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우연으로 왔다니까요.' (181쪽, '맥락 없음의 신비')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종종 우연에 관해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태어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너무나도 오래전 아기 때의 나도, 나의 첫 번째 기억 속의 나도, 그리고 어제까지의 나도, 내가 알았든 알지 못했든,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어떤 선택들을 해 왔고, 그 선택들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나가 오늘의 나다. 그 선택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우연의 순간들이 있었고, 그 우연의 힘을 믿을 때도, 믿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꽤 많은 선택들이 맥락 없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괜찮았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저자가 '맥락이 없이도 발생하는 일, 맥락이 없이도 행동하는 힘이 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맥락이 없었던' 경우가 많은 것 같다. S라는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년을 같은 반이었는데, 이전까지는 말 한 번 해본 적 없던 사이였다가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때 처음 대화를 나누고 친해졌다. 너무 졸려 야자 시간에 교실 밖 복도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S도 같은 이유로 교실 밖으로 나왔고, 우연히 옆 자리에 있던 나에게 모르는 것을 질문했었다. (과목도 기억나는데, 한국지리였다.) 그렇게 이전까지는 서로 말도 걸 생각을 하지 않았던 사이였던 우리는 시험이라는 공통분모로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J라는 친구와는 대학교 1학년 때 한 번 같은 수업을 들었지만 팀플이나 학회 등 아무런 접점이 없어 서로의 존재만 알 뿐 딱히 말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선배들의 말만 듣고 피했던 교수님의 수업을 2학년 때 어쩌다 잡게 되어 수강하게 되었는데, 그 수업에서 우연히 J와 다시 만났다.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는 친해져 있었고, 함께 시험공부를 하며 필기도 공유하고 모르는 것도 물어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 후에 함께 공모전 준비도 하고, 호캉스도 즐기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H라는 친구는 1학년 1학기 때 한 번 같은 수업을 듣고 난 후 어쩌다가 약속을 잡아 밥을 먹고, 카페에서 꽤 깊이 있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친구가 휴학을 한 후 외국에 1년 동안 나가 있어서 자연스레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이 닿아 지금도 서로를 응원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실 오늘 안 건데 우리는 첫 만남부터 서로가 서로를 꽤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ㅋㅋ)
이렇게 우연이 만든 순간들이 모여 내 곁의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감사하게 된다. 저자는 또 다른 글에서 ‘마지막을 사는 일은 곧 새로운 결심으로 첫 걸음을 떼는 일’이자 ‘패배감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않고 고단하지만 낙담하지 않고 그 걸음을 이어가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좋은 친구들에게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법을 많이 배우고, 그들을 본받아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연이, 그 맥락 없음이 만든 나의 순간순간이, 나의 인연들이 또 오늘을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는 내일이 어떤 날이 될지 알 수 없기에 오늘 이 순간, 최선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한다. 때론 절망도 고뇌도 후회도 하겠지만 오늘의 한 걸음을 이어가는데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해 줄 것임을 알기에 매일을 제대로 사는 일이,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조금은 덜 외로운 길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