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6 읽고 쓰기 (프란츠 카프카, 성)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완독했다. <<로빈슨 크루소>>를 제외하고 장편 소설을 읽은 지 꽤 오래되어서 긴 호흡의 글을 읽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후반부를 굉장히 몰입해서 읽었다.
따라서 바르나바스가 아직 못 넘어 본 목책들 뒤에는 그 애가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무처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사무처들이 있을 거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죠. (...) 그러면 의심은 자꾸 커져 가고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되지요. (288쪽)
그리고 클람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면서도 거의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은 그들의 상상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에요. (...)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 혼란을 만들어 내지요. (298쪽)
힘을 북돋워 주려면 그의 말이 옳다고, 그러니 지금까지 하던 방식대로만 계속해 나가라고 말해 주면 되는데, 그런 방식으로 그는 결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을 거야. 두 눈이 붕대로 감겨 있는 사람더러 붕대를 통해 앞을 보라고 아무리 힘을 북돋워 주어도 그는 결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붕대를 풀어 주어야 비로소 볼 수가 있지. 바르나바스가 필요로 하는 건 도움이지 힘을 북돋워 주는 격려가 아니야. (303쪽)
어떤 관계에나 약점은 있기 마련이니, 우리의 관계라고 다를 바는 없지. 우리는 각자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만났고, 서로를 알게 된 이후로 우리 각자의 인생이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선 거야. 우리는 아직 불안정한 느낌이지. 너무나 새로운 생활이니까. (410쪽)
카프카의 이 소설이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것을 이 책을 다 읽은 후 역자 해설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원래 책을 읽을 때 책의 내용이나 저자 소개 같은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예전에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집을 읽을 때는 몰랐던 작가 정보를 이번에 더 알게 되었다.
소설이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를 크게 느낄 수 없는 결말이었다. 후반부를 읽다 보니 어느 정도 비슷한 결말을 예상했었다. 결국 K는 성의 근처조차 가보지 못했고, 심지어는 클람조차 만나지 못했다. K가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여관을 떠나 학교로 갔듯, 또 학교를 떠나 제3의 장소에서 성으로 갈 또 다른 계획을 도모할 것으로 보인다.
역자의 해설을 읽다 보니 K가 왜 그토록 자신의 존재를 성과 마을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그곳에 정착하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갔다. 카프카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투쟁하는 과정이 결국 K가 성과 마을과 대립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과 맞물린다.
오늘 책을 읽으며 적어 둔 인상적인 구절들이 참 많았지만, 그중 네 개를 가져왔다. '의심'과 '불신'이라는 감정이 한 번 생겨나면 그다음에는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덩치를 키워 결국 그 감정에 자신이 잡아먹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정말로 '사람들은 스스로 혼란을 만들어' 낸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배우며 의심의 결말이 결국 파멸이 됨을 잘 볼 수 있었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로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그의 입장을 들어보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소설에서는 그런 의심을 해소할 만한 기회가 생기지 않았지만, 살면서 기억해둘 만한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또 K가 바르나바스의 누이인 올가에게 했던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두 눈이 붕대로 감겨 있는 사람에게 앞을 보게 하려면 격려가 아닌 붕대를 풀어주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생각해보면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말을 해주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 사람에게 어느 선까지 내가 도움을 줘도 될 것인지 구분하는 것도 어렵고, 혹시나 그 사람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어 거절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생각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도 많아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격려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니, 이 둘을 적절히 잘 생각하며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K가 '각자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다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후 각자의 인생이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라고 말한 부분은 평소에도 많이 생각하고 있던 말이라 공감이 갔는데 '어떤 관계에나 약점은 있기 마련'이라고 말한 대목은 조금 새로웠다. 어떤 관계에나 약점은 있다니, 그 약점이라는 게 마음의 크기에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50:50으로 동등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 더 큰 마음의 크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진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래서 더 사랑하는 쪽이 덜 사랑하는 쪽에 항상 약점을 잡히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인 관계에서는 그 마음의 크기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덜 사랑하는 쪽이 그 약점을 빌미로 더 사랑하는 쪽을 휘두르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약점'이라는 말로 사랑이 폄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완으로 남은 채 카프카가 원래 구상했던 결말이 어땠을 지에 대해 엄청난 호기심이 남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이 소설이 아직까지도 읽히고, 이야기되고, 또 공부되는 것을 보면 이 미완의 완결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