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지만 혼자가 아니야

2019.04.08 읽고 쓰기 (정은귀, 바람이 부는 시간)

by bookyoulovearchive


오늘은 정은귀 선생님의 <<바람이 부는 시간>> 52쪽부터 69쪽까지 네 편의 글을 읽었다. 오늘 필사한 구절의 일부를 가져와 본다.


낮달이 꽃향기를 맡느라 하늘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 곽재구, '적빈 4' 중 (52쪽, '가족이라는 순례의 길')
그런 다음 시인은 절망을 말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내 절망도 말해주겠다면서. 이는 상처 입어 아프고 힘든 자가 너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그러하니 너와 나는 같이 절룩이며 걷는 아픈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동안 세상은 늘 그렇듯 그대로 돌아간다. (63쪽, '이름 없는 당신께 바치는 찬미가')
시인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결국 네가 그리는 방식으로 그렇게 드러난다고 이야기를 한다. (...) 네가 누구일지라도, 지금 얼마나 외롭고 힘들더라도 너만의 보폭으로 세상을 건너가라고, 너만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그리고 초대하라고. 사물의 무리 안에 네 자리는 늘 있는 것이라고. (64쪽, '이름 없는 당신께 바치는 찬미가')
자신을 찬찬히 응시하고 자신만의 삶의 속도를 긍정하면서 그 안에서 믿음을 찾을 때 제 보드라운 본성,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어렵게라도 찾을 수 있다. (64쪽, '이름 없는 당신께 바치는 찬미가')




고등학교 때 국어 공부를 할 때도 그랬지만,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시'는 항상 어렵게만 느껴졌다. 시는 대개 짧아서 그냥 읽어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함축된 단어들을 품은 시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나름대로 해석해보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도 선뜻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 수수께끼 같은 시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분량은 많아도 배경 설명이나 인물들의 대사, 서술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물 등으로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나 극작품이 좋았다. 그래서 일 학년 때 두 학기 동안 시 입문 수업을 들은 후 시 수업은 내 전공 선택지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3학년 2학기와 4학년 1학기 때 들었던 시 수업은 시에 관한 많은 오해와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무작정 '시를 좋아해 보고 싶어서' 들었던 수업은(물론 그전부터 많은 친구들이 강력하게 추천해주기도 했지만), 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를 있는 그대로의 시를 읽고,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한 번도 구매해본 적이 없었던 시집을 사고,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고, 그 생각을 즐기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었다.


4학년 1학기에 수업을 들으며 만난 메리 올리버라는 시인은 나에게 참 많은 힘과 위로를 건네주었다. '기러기'라는 제목의 시는 'You do not have to be good.'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항상 착한 딸, 착한 언니, 착한 친구,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던 나에게 '착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한 조각 위로를 건네주는 듯한 이 시를 읽고 마음이 포근해졌다.


너의 절망을 내게 말해주면, 그리고 나의 절망을 네게 들려주면, 나도, 너도 우리는 혼자만 힘들고 슬픈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절망과 우울을 함께 보듬다 보면, 우리는 상처를 어쩌지 못해 혼자서 끙끙 앓는 것보다 나의 힘듦, 슬픔, 우울, 아픔, 절망을 타인과 나누는 일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다 보면 내가 직접 겪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타인의 슬픔과 절망을 공부해 타인을 조금이나마 더 알고 존중하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절망을 나누는 이 순간에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간다.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나의 아픔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듯한 세상이 몹시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일단 내가, 그리고 네가 절망을 들을, 말할 누군가와 함께라는 사실이 그래도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많은 힘든 순간들을 거쳐 오며 생각보다 나 혼자 문제를 붙잡고 늘어질 때보다 나의 고민과 우울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힘을 얻은 기억이 더 많다. 이렇게 또 '빚'을 졌기에, 이 빚을 부지런히 갚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이 세상은 네 상상대로 세상을 보여주지' (Whoever you are, no matter how lonely, / the world offers itself to your imagination')라고 말하는 화자. 결국 내가 만들어 가는 대로 나의 세상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나만의 걸음으로 삶을 한 걸음씩 걸어가다 보면, 내 삶을 품은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넓은 세상 안 내 자리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 자리가 있는 것처럼 타인의 자리도 있기에 넓은 세상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만들어 갈 나의 삶에서 책임은 오롯이 내 몫이기에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낄 지라도 나를 품은 더 넓은 세상엔 나와 같은 이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하기에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것만 기억해도 삶을 걸어가는 마음이 조금 더 든든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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