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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로컬리 Jun 30. 2023

동시대성을 생각하는 디자이너

[부로컬리] 크리에이터 인터뷰 vol.15 에이치오피스

공간을 설계하는 일에는 일종의 편집 능력이 요구된다. 제한된 지면(地面) 안에 필요한 요소를 삽입하려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를 선별 능력이 필요하다. 취재(取材) 역량도 중요하다. 클라이언트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해당 내용을 바탕으로 공간을 뒷받침할 재료들을 채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이치오피스(Hoffice)는 곁가지를 쳐내고 두 가지 핵심 본질에 집중한다. 하나는 동시대성. 지나간 과거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필요한, 실존에 주목한다. 또 하나는 최소한의 개입. 각종 미사여구로 점철된 비문 대신, 주어와 동사, 그리고 목적어에 충실한 공간을 만든다. 강조해야 할 부분이 분명한 경우에는, 딱 필요한 만큼의 수식어를 붙여 공간의 맛을 돋운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공간을 완성할 수 있는 힘. 이는 채집(採集)에 있다. 에이치오피스는 분야와 영역, 편견을 거둬들인 채 방대한 정보들을 쉬지 않고 그러모은다. 이를 토대로 종국에는 밋밋하던 바닥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최소한의 개입을 추구하고 동시대를 생각하는 사람, 에이치오피스의 한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녹음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제가 어제 나름대로 인터뷰 준비를 좀 해봤어요. 예전에 준비 없이 영상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머리가 새하얘지더라고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웃음)


편집된 영상은 보셨나요?

빨리 넘기기 버튼 눌러가면서 봤어요. (웃음)


어떠셨어요?

편집을 기가 막히게 잘해주셨는데요. 아쉬운 지점도 있었어요. 제 생각을 명료하게 전하지 못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인터뷰 앞서 미리 답변 내용들을 준비해 봤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생각이 막힐 때 텍스트를 참고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이건 영상이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진부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필요한 질문으로 시작해 볼게요.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에이치오피스(@hoffice.kr)의 디렉터 한호라고 해요. 에이치오피스는 2021년, 제가 설립해 운영해 온 스튜디오예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현시대의 양상들을 연구하고, 거기에 맞는 도시와 공간, 사물들을 탐구하고 해석해 ‘최소한의 개입’을 추구하는 팀이죠.



스튜디오를 설립한 계기가 궁금해요.

원래 실내 디자인 학부를 다녔어요. 그러다 휴학을 하고 아버지 회사에서 시공 관련 실무를 했는데요. 그때 깨달았어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현장과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요. 이후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하지 않고 방향성에 대해 계속 고민했는데요. 그러다 생각지 못한 기회가 찾아왔어요. 아트 퍼니처 작업을 하던 친구가 본인의 작업물을 촬영해 달라고 요청한 거예요.


사진 촬영이요?

네. 평소 취미로 찍던 사진을 활용할 기회가 생기게 된 거죠. 다양한 작가나 디자이너들을 만나며 그들의 작업물을 카메라에 담게 됐는데요. 이게 계기가 돼서 실내 디자인에 포함되지 않는 경계의 작업물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아, 어쩌면 나도 공간이나 건축에 관련된 작업에 국한하지 않고, 영역을 더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고요.


사진을 취미로 찍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원래부터 사진 찍는 걸 좋아했어요. 혼자 찍은 걸 개인 SNS 채널에 올리는 딱 그 정도였죠. 그러다 주변에서 의뢰를 받고, 촬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좀 더 깊어졌어요.




공간만 작업하시는 건 아닌 거네요.

틀을 규정한 작업보다는 다양한 범주의 것들을 다루는 걸 선호해요. 실제로 가구도 만들고, 가구가 아닌 용도 없는 것도 제작하고, 전시도 계획 중이에요. 그 외에도 오브젝트도 계속 만들고, 이미지 생산도 하고, 사진 작업도 꾸준히 했어요.


그렇군요.

근데 사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진가로서의 사명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고요. 다른 매체를 흡수하는 용도로 활용을 했던 것 같아요. 사진을 매개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피사체를 마주친 것. 이걸 통해 저만의 디자인적 사고라고 해야 할까요? 이것들을 정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인터뷰도 비슷해요. 저 또한 다양한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얻게 되는 인사이트가 있거든요.

그렇군요.












최소한의 개입


조금 전, 에이지 오피스에 대해 소개해 주실 때 ‘최소한의 개입’이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보통 작업을 서술하거나 표현할 때 '제스처(gesture)'라는 말을 자주 써요. 가령 ‘어떤 공간에 이런 제스처를 취해서 뭔가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예시를 들어 설명해 드릴게요.



네.

에이치오피스에서 작업한 공간 중 노매뉴얼 스토어(@nomanual.designs)라는 브랜드가 있어요. 서울 상수동, 홍대 근처에 있는 쇼룸인데요. 동네가 조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어요. 노면에 접한 상업시설들은 왁자지껄한 반면, 이면 도로로 진입하면 주거지가 있어 잔잔해지거든요. 노매뉴얼 스토어가 들어선 건물은 조금 요란한 느낌이 들었고요.


재밌는 표현이네요.

이런 주변 맥락들이 ‘과잉된 기호’들의 집합 같았어요. 몰입보다는 산란하게 만들 것 같은 상황이 다분했죠. 분위기를 정돈해 줄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이를 위해 커피를 내릴 때 사용하는 여과지 같은 요소를 가미했어요. 이것이 최소한의 개입이에요.


공간의 여과지, 최소한의 개입은 어떤 형태로 구현하셨나요?

보통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제품이나 공간의 분위기가 보이는 게 대부분인데, 노매뉴얼 스토어는 반대로 했어요. 상품이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고 검은 실루엣으로만 나타나요. 반투명한 소재들을 사용해 공간을 일정부문 감췄죠. 채광만 조금 스며들 수 있을 정도의 여지만 남겨놓은 채 말이죠. 이게 최소한의 개입 중 하나고요. 내부에는 괄호 모양의 벽을 정중앙에 위치시켰어요.




사진: 한호

괄호 형태의 벽이요?

네. 보통 공간 설계에서 벽은 구획이나 보호의 용도로 쓰이는 게 대부분이에요. 해석의 여지가 없죠. 그런데 형태에 변주를 주면 얘기가 달라져요.


좀 더 설명해 주세요.

예를 들어, 어딘가 진입했을 때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그건 사람으로 하여금 동선을 유도하는 형태일 수 있죠. 혹은 환대의 장치일 수도 있고요. 만약 벽 틈새로 사물이 보인다면 이는 너머의 장소를 암시하는 역할로도 해석이 가능해져요. 같은 벽을 세워도 어떤 방향에서 어느 각도로 보이게 연출하느냐에 따라서도 여지가 넓어지고요. 직선으로 된 벽은 볼 수 있는 각도가 한정적이지만, 각도가 휘어지면 어느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생김새가 판이하게 달라지거든요.


결국 노 매뉴얼 스토어의 벽은 해석의 여지를 넓히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겠네요.

네. 좀 더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고자 벽의 형태를 일부러 휘었어요. 입장하는 순간 마주하는 벽은 동선을 암시하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벽 사이로 제품의 실루엣이 보일 때는 일종의 환대의 제스처가 되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호기심과 환영의 감각을 따라 이동하면 벽 너머 하나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죠.


벽에 사용된 재료도 독특해 보여요.

마찬가지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재료를 사용하고 싶었는데요. 반사성 있는 소재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판단했어요. 이를 위해 고른 게 폴리시드 블랙 스테인리스스틸이에요. 여기에 반경값을 높여 곡선으로 제작해 왜곡 효과를 가미했죠. 외부는 볼록한데 내부는 오목해서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해요. 한쪽에는 넓적한 이미지가 보이지만, 반대쪽에는 좁혀진 이미지가 보이거든요. 보는 위치에 따라 이미지가 끝없이 변해요.



사진: 한호

단순해 보이는 곡선 형태의 벽. 사실은 꽤 복합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네요.

벽이 사실상 노매뉴얼 스토어의 80%를 차지하는 디자인 제스처예요. 이게 전부죠. 나머지 요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깔끔하고 단순하게 연출했어요.


하나를 강조하고 나머지에 힘을 빼는 느낌이군요.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말이 많은 걸 선호하지 않는 편이에요. 미사여구가 많은 걸 좋아하지 않죠. 명료한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걸 좋아해요. 공간도 그렇게 연출하고 싶었어요.


사진: 한호











참조적인 재전유


매번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고 계시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기만의 색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한데요. 자기 복제에 대한 고민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색이라는 건 스타일이라고도 하죠. 사실 에이치오피스는 우리만의 색을 가질만한 아카이브를 보유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까진 자기 복제에 대한 경계를 한 적은 없어요. 단, 매 프로젝트마다 다원적인 맥락을 해석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대입하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어요.



다원적인 맥락? 예를 들면요?

백색 페인트나 스테인리스 스틸 같은 티피컬(typical)한 재료들은 매 프로젝트마다 연달아 사용할 수밖에 없기도 한데요. 이런 경우, 전 작업물의 콘셉트 혹은 작업 과정을 좀 더 디벨롭하려고 노력해요. ‘참조적인 재전유’를 통해 재해석한 결과물을 내놓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참조적인 재전유’요?

사실 주어진 환경, 의뢰하는 클라이언트의 성향, 공간의 용도 전부 다 달라요. 애초에 똑같은 걸 할 순 없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고요. 다만 그런 상황들을 풀어가는 방식이라던지, 재료라던지, 분명 기존 어휘들을 차용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중요한 건, 그런 경우를 인정하되, 기존 방식에서 좀 더 발전된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경험의 한계가 있다고 해서 이전 방식을 계속 사용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거고요. 기존에 사용했던 어휘들은 가져가되, 그것보다 더 발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참조를 통한 재해석 혹은 재가공이라고 해야 할까요?


‘재해석'이라는 표현을 듣고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에이치오피스가 생각하는 재해석은 무엇인가요?

요즘 그런 단어 많이 사용하잖아요. ‘전유’라는 말. 전유라는 단어의 의미는 원본을 차용하거나 참조, 인용하고 재가공해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잖아요. 재해석도 그런 거 같아요. 원본이라는 존재의 이미지나 개념을 빌리되, 시대라는 맥락에 맞춰 변주하는 작업.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해석과 복제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재가공 여부가 아닐까 생각해요. 재가공되지 않은 전유는 복제라고 볼 수 있죠.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이 작업은 <ROOM>이라는 작품이에요. 미식(@meeseek)이라는 갤러리에서 ‘집의 용도’라는 주제로 전시했을 당시 출품했던 작업인데요. 집이라는 공간에 실용적 온도가 0이 됐을 경우를 상상, 실용에서 벗어난 주거 생활의 미학을 탐구하는 내용이었어요.


제공: 에이치오피스 (Hoffice)


집의 목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이 상실된 상황을 전제로 한 거네요.

맞아요. 실용성을 소거한 후, '자유롭게 작업해 봐라'하는 방식이었어요.


어떻게 풀어가셨나요?

문학, 전통, 조형, 건축 이렇게 네 가지 카테고리를 참조했어요.


각각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문학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쓴 <음예예찬>의 한 구절(“Were it not for shadows, there would be no beauty”)을 인용했어요. 전통은 우리나라 가구 중 하나인 살평상을 차용했고요. 조형의 경우,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데이배드(daybed)’ 혹은 그의 조형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을 빌려왔죠. 마지막으로 건축에서 쓰는 방의 개념을 활용했어요. 흔히 방이라는 구조에서 볼 수 있는 파티션 개념을 적용하되, 이걸 반투명 폴리카보네이트로 풀어냈거든요. 보통의 파티션은 구획과 가림이 주된 목적인데, 실용의 온도가 낮아졌기에 시도할 수 있던 부분이죠. 작품의 규격은 저드의 1:1:2 비율을 적용했고, 오브제 하부구조에 살평상의 요소를 덧대었어요.


제공: 에이치오피스 (Hoffice)

각각의 요소를 차용해서 그것들을 잘 조합하신 느낌이 들어요. 이런 게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요?

‘재조합이 재해석이다’라는 정의는 아니에요. 재해석에는 방법론이 많아서, ‘무엇이다’라고 명확히 규정할 순 없거든요. 제 작업물 <ROOM>을 예시로 말씀드리면, ‘분해 후 재조합하는 방식을 취해 재해석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해석과 복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둘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서 ‘이건 복제고, 이건 해석이야’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영역 같아요. 제가 가진 어휘도 부족하고요. 단, 복제가 아닌 해석을 지향했다면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했을 것이고, 그것들이 결과물 속에 잘 드러나야 하지 않나 싶어요.


공간을 작업하실 때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시는 편인가요?

고정된 작업의 틀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다양하죠. 어떤 경우는 이미지나 문헌, 사물 등을 전유할 때도 있는데요. 전유의 대상이 꼭 객체(subject) 일 필요는 없어요. 주체(object), 즉 자기 자신을 전유할 때도 있죠. 공식처럼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죠.











이미지 채집부터 재고(再考)까지


인용, 재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활용할 재료 또한 충분히 쌓여있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평소에 어떤 것들을 하고 계신가요?

영감을 찾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하는 게 있긴 해요.


어떤 건가요?

핀터레스트(pinterest)요.


자주 보시나요?

네. 이미지 디깅(digging)을 즐겨하거든요. 취미생활에 가까워요. 틈만 나면 이미지들을 ‘핀’해요. 몇 만 장씩 모아놓죠.


소유욕이 어마어마하시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실물에는 그렇게 큰 욕심이 없거든요. 지금 사는 집에 인덕션도 없어요. (웃음) 옷도 많지 않아 헹거도 엄청 작은 걸 사용하고 있는 걸요. 그런데 이미지는 정말 많이 모아요.


뭐랄까. 디자이너 분들이 핀터레스트를 본다는 건 암묵적으로 알고 있긴 했는데. 거리낌 없이 말씀해 주신 분은 처음이에요.

아, 근데 이건 에이치오피스의 방식은 아니고요. 제 방식이에요. 팀원들에게 권하지는 않아요. 설령 권한다고 해도 제 말을 듣지도 않을 거예요. (웃음) 본론으로 돌아오면, 대놓고 핀터레스트 본다고 하면 그걸 좋지 않게 보는 시선들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많은 디자이너 분들이 디지털 이미지들을 경계한다는 것도 잘 알고요. 근데 또 많이들 살펴보시긴 하거든요.



어떤 방식이나 수단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문제는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할 지에 달린 것일 테니까요. 주로 공간 관련 이미지를 찾아보시는 편인가요?

아뇨. 공간 디자인, 건축, 시각 예술 관련 분야만 보는 건 아니에요. 이것저것 다 살펴보는 편이죠. 훑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수집해 뒀다가 주기적으로 꺼내봐요. 보다가 좀 더 궁금한 자료들은 관련 텍스트도 유심히 읽어보고요.


이 작업들을 평상시에 수시로 하고 계신 거군요.

맞아요. 작업이 코 앞에 찾아왔을 때, 번뜩이는 영감을 찾아 헤매지는 않아요. 그저 평소에 다양한 재료들을 내면화시키는 일종의 선작업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걸 꾸준히 할 뿐이죠. 그러다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각각의 주어진 조건, 맥락,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 예산 등에 맞춰 이것들을 조합해요. 머릿속에 프로젝트라는 명령어를 입력하면, 이에 가장 적합한 아이디어나 소스를 발췌해서 저한테 던져줘요. 대부분의 작업이 이런 습관과 재해석의 과정으로 탄생하는 것 같아요.


간혹 자기도 모르게 특정 이미지를 모사(模寫)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의식 중에 말이죠.

그래서 쉬지 않고 반복해서 살펴봐요. 수집에도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모아만 놓고 살피지 않으면 무용해지거든요. 평소 스치듯 본 것들을 최대한 모방하지 않고자 저만의 컬렉션들을 계속 재고(再考)해요. 그런 식으로 한번 더 검토를 거치는 과정을 통해 최대한 카피 이슈를 피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요.


래퍼런스라는 말을 그저 이미지 참조 정도로 아는 분들도 간혹 있는데. 뭐랄까. 논문 쓰고 검사하는 느낌이네요.

그런 느낌이죠. (웃음) 퇴고한다고 해아하나.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사람이다 보니 무의식 중에 수집하고 스쳐간 무언가를 오롯이 제 머리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농후하잖아요. 너무 많이 봐서 이게 어디서 본 건지 모를 경우도 있고 말이죠.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일 텐데요.

취미라고 생각해서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웃음)












요즘 공간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간이 품은 복잡성을 간과한 채, 그저 이미지로 소모하는 현상에는 동의하지 않는데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SNS의 발달이 공간을 홍보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죠.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해요.

시류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엔 순기능도 있고 악영향도 있죠. 확실히 SNS 덕분에 홍보나 영업적인 부분은 수월해진 게 사실이에요. 또한, SNS로 인해서 일반 대중들이나 클라이언트의 식견이라고 해야 할까요? 관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것들도 확실히 높아진 것 같아요. 이러면 당연히 디자이너들의 수준도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과거에는 극소수의 디자이너와 그렇지 못한 디자이너 간의 간극이 좀 컸다면, 지금은 아뜰리에 형태의 스튜디오들이 많아지면서 업계 자체가 상향 평준화 된 느낌이 들거든요. 좋은 면이라고 생각해요. 대신에.



대신에.

SNS를 위해, 공간을 일종의 피사체로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건 조금 기괴한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본래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고 공유하는 용도로 나온 게 SNS였는데, 도리어 비일상을 자랑하는 형태로 변모했으니까요. 평소라면 가지도 않았을 공간을, 업로드를 위해 방문하고 연출하는 건 비일상을 전시하는 거잖아요. 


그렇네요.

소견으로는 이런 현상들이 결국 일상적인 장소가 부재해서 생겨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일상적인 장소의 부재요?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장소가 필요하잖아요.


그렇죠.

사람과 사람이 상호 교류하며 사회 관계망을 만드는 것. 어떤 이벤트가 벌어지려면 결국 장소가 필요한 건데요. 그런데 뭐랄까. 저는 지금 이 시기 우리에게 이런 장소들이 부재하지 않나 생각해요.


좀 더 설명해 주세요.

DDP라던지, 공공 도서관 등 분명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장소들도 있지만요. 대다수의 공공시설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강의 경우, 특정 계절 외에는 사람들이 이용하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하고요.


네.

결국 공공성을 띤 장소들이 어떤 의미에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니, 카페와 같은 상공간이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쇼핑이라는 소비문화가 공공 문화의 빈자리를 메우는 거죠. 와이파이를 쓸 수 있고 작업이 가능한 장소를 찾아서 카페를 찾고, 추억을 남기고자 소위 말하는 ‘힙한 카페’로 가는 이런 상황들 모두가 말이죠.


소비력이라는 지표가 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된 세상 같네요.

그런데 상업시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 특성상 자극적인 이미지에 몰두할 수밖에 없기도 해요. 순환율을 높이거나 홍보를 하려면 포토존 혹은 화려한 입면을 만들어야 주목받을 수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에요. 다만, 저는 SNS로 공간이 과잉소비되는 것과 이미지로 부유하는 상황을 비판하기보다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상업시설을 어떻게 가다듬을지 고민하는 게 생산적이라고 봐요.


공공의 영역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어떤 상업 공간이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그건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민간의 영역이니까요. 매출을 생각해야 하는 운영자 입장에서는 공간의 의미에 대해 깊게 고민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쉽지 않죠. 그러니 에디터 님 같은 분들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주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런 담론들이 보다 더 많이 번져나갈 수 있게 말이죠.



그간 저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만 취했지, '왜 그럴까'에 대해서는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답변을 들은 후, 지금의 사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됐어요.

건축가 램 콜하스(Rem Koolhaas)의 논문 <Project on the City ll: The Harvard Guide to Shopping> 에는 쇼핑 행위가 현대 건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 그는 결국 쇼핑이라는 행위가 도심에 남은 마지막 공공 활동이라고 정의했어요.


그렇군요.

저 역시 이 현상을 비판적으로만 생각할 건 아니라고 봐요. 램 콜하스의 말처럼 마지막 남은 공공 활동이 쇼핑이라면, 이 행위가 일어나는 상업시설을 어떻게 개선하고 발전시켜 갈 것인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 문을 연 대형 쇼핑몰 같은 공간 중앙에 채광을 들여오게 만든다던지 하는 취지들이 그런 고민의 산물 아닐까 싶어요. 쇼핑몰이 공공시설의 기능을 어느 정도 담당하게 하려는 방향과 노력이라고 말이죠.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

동시대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다시 에이치오피스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오브제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실용적이지 않은 사물’과 ‘실용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에는 유사점도 있을 것 같고 차이점도 있을 것 같거든요.

말씀하신 오브제가 ‘아트 오브제’를 지칭하신 거라면 둘 사이에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요. 우선 규격이 다르고요. 작업 프로세스가 달라요. 앞서 말씀드렸듯, 공간은 인간을 고려해야 하니 여러 가지 제약 환경 등을 살펴야 하는 세심함이 필요해요. 아트 오브제는 반대죠. 기능적인 부분에 대해선 고려할 게 없거든요. 일단 사용 안 하는 순간부터 많은 것에서 자유로워지죠. 물론 오브제를 통해 인간에게 어떤 이슈나 메시지를 던져준다는 점은 중요하지만 디자인의 시작과 끝이 실용에만 점철되진 않아요.



그렇군요.

그런 지점에서는 둘 간의 차이점이 있지만, 작품을 대하는 관념적인 태도랄까요? 이건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공간에도 필요한 오브제들이 있잖아요. 오브젝트라고 한다면 사실 손잡이 같은 것도 오브젝트라고 할 수 있고, 의자나 테이블처럼 ‘공간에 들어가는 오브젝트’와 ‘독립된 오브젝트’로 구분하면 답변해 드리기 더 수월할 것 같아요.


좋아요. 그럼 그 둘 간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공간에 들어가는 요소로서의 오브젝트들은 각각의 어떤 그런 강한 에고(ego)라고 해야 할까요? 과한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그림에 들어가는 하나의 구성 요소로 작동하도록 역할을 부여해요. 후자의 경우에는 작가의 의도라고 해아 할까요? 노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이 전자에 비해서 많이 들어간다고 볼 수 있어요.


공간을 만드는 데 있어 에이치오피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가요?

당연한 내용일 수도 있는데요. 다 중요해요. 공간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으니까요. 다만, 그중에서도 으뜸을 고르자면 아무래도 인간인 것 같아요. 결국 디자이너는 인간을 위한 어떤 것을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항상 인간을 생각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능이나 심미적인 조형의 경우에도 이걸 사용하는 인간이 어떻게 느끼고 경험했으면 좋겠다를 항상 구상하고 작업하니까요.


답변해 주신 ‘인간’이 모든 사람들을 품은 느낌은 아니거든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면 좋을까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보편적인 지각 능력과 감각 능력, 여기에 이동에 제약이 없다는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을 칭한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거기까지 포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충족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해했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이어가자면, 인간의 범위를 좀 더 세분화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떻게요?

현대, 그러니까 동시대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하는 거예요. 공간이 과거에 살았던 인간을 위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미래인을 위한 공간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추후에 그 시대 사람들이 맡으면 될 것이고요. 에이치오피스는 ‘지금 여기 우리’한테 필요한 공간을 중시해요.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절 건물들이나 고려시대 사찰들을 보면 참 좋죠. 과거를 반추하고 참고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분명 동시대에 주는 의미가 상당하고요. 그런데 저는 그런 의미보다는 당장 우리네 일상에 필요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를 다니다 보면 가끔 이런 답변을 들을 때가 있어요. 시간성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공간을 지향한다는 이야기들. 시류에 반하는 느낌으로써 작업을 하신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그런데 에이치오피스는 반대로 동시대성을 고려하며 작업하시네요.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클래식'이라 하는 건 보통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것들이 대부분일 거라 생각하는데요. 이걸 타임리스(timeless)라고 여기는 분들도 계신 것 같고요. 그 의견들을 비판하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입장 또한 하나의 시대상, 시류인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제가 2023년 서울에 공간 하나를 만들었으면, 100년 뒤 서울 사람에게는 그 공간은 당연히 ‘옛날 것’으로 느껴져야 해요. 우리가 르꼬르뷔지에의 작업을 보면 감동하고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지만 그건 옛 것이에요. 근대 건축 원칙에 따라 건물을 짓는 건 현대와는 맞지 않는 방식이죠. 에이치오피스는 지금 여기 우리한테 맞는 공간을 만드는데 힘쓰고 있어요.




에디터 김승훈

인터뷰 에이치오피스 한호





부로컬리(Boolocally)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영감이 되는 공간을 소개하는 플랫폼입니다. 인터부(INTERBOO)는 매주 다양한 크리에이터들과 마주(inter) 앉아 공간을 보는(view) 그들만의 태도를 부로디(BOOlody)에게 소개하는 인터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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