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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로컬리 Nov 25. 2022

사물에 숨을 불어 넣는 사람

[부로컬리] 크리에이터 인터뷰 vol.4 임태희

무언가를 만들려면 무언가를 부숴야 할 때가 있다. 공간 설계도 진배없다. 기존에 무언가 있던 자리의 흔적을 지우고, 그 위에 새 옷을, 새 삶을 덧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다수 공간 디자이너들이 대부분 이런 일을 하며 산다.


임태희는 조금 다르다. 그는 단어를 부순다. ‘공간 디자이너’라는 벽체와 바닥으로 구성된 하나의 단어라는 틀을 해체한다. 정확히는 세간에서 공간 설계자를 보며 떠올릴 법한 이미지에 균열을 내는 일에 가깝다. 공간을 만드는 건 미감을 조성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고, 그는 단호히 말한다.


그보다는 숨을 불어 넣는 일(in/spire)이라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선이 향하는 쪽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곳에서 가치를 재발굴한다. 이를 통해 누군가에게 영감(inspiration)을, 시각 정보라는 하나의 매체로 전달한다. 이용객의 동선이 아닌, 누군가의 삶의 방향(direction)을 안내(direct)하는 것. 그가 생각하는 공간 디자이너의 업이다. 


날이 조금 흐린 11월 어느 오후,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하늘은 조금 울적했지만, 마주 앉은 임태희의 표정은 화사했다. 언제나 자연을 귀감 삼아 작업한다는 그의 말처럼, 양재천 사무실 창 밖에는 저물어가는 계절이 고스란히 보였다. 공간 디자이너 임태희와 이야기를 나눴다. 


벽, 바닥, 천장 대신 

삶의 태도를 구축하는 사람

 


오랜만에 봬요 소장님.

네 기자님. 아니지, 네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에디터님? 


네. 저희는 구면이지만 부로컬리 유저 분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임태희입니다. 공간 디자이너예요. 음, 저는 공간 설계가 벽, 바닥, 천장을 꾸미는 일에 머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삶의 방식과 태도를 형성하는 작업이라고 여기고 있죠.


삶의 방식과 태도요?

네. 스튜디오 구성원들과 제가 하는 작업의 상당수는 치장하는 일보다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시간성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쪽에 더 가까워요. 공간을 만드는 지금 이 순간에서도, 그 속에서 벌어질 먼 미래의 일들을 기획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시간을 넘나드는 일이라. 마치 타임워프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너무 두서가 없었나요? (웃음)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주로 공간을 만들지만, 어떨 때는 가구를 디자인할 때도, 어떨 때는 아트 디렉터의 일을 할 때도 있죠. 자연과 식물을 공부할 때도 있고요. 


못 보던 새에 다양한 작업들을 많이 하신 것 같네요. 올봄 소장님 모습과 또 달라진 기분이 들어요.

혼란스러우신가요? (웃음) 아, 요즘 제 근황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해하기가 쉬우시겠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요. 



사진: 최용준


좋아요. 

올봄이었나, 초여름이었나? 충북 천안시에 있는 온양 민속박물관에 카페를 하나 작업했어요. 카페 온양이라는 곳인데요. 공간 디자이너 하면 흔히 떠올리실 법한 근황이죠. 이렇게 공간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지만요. 한 달 전에는 음, 저희끼리는 ‘환생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주제로 전시에 참여했어요.


환생 프로젝트?

네. 세상에는 소명을 다해서 버려진 물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어요. 옷도 싫증 나서, 유행이 지나서 버려지는 것처럼 말이죠. 학교에서 쓰이던 책상과 의자도 그래요. 기능상 결함은 없지만 미관상 이유로 버려지는 경우가 허다해요. 특히 학교 책상과 의자는 볼펜으로 새긴 낙서라던가, 칼로 흠집을 낸 자국 등이 많은 게 그 이유고요. 환생 프로젝트는 그것들들에 다시금 숨을 불어넣는 작업이죠.


리사이클(recycle)과는 좀 다른 것 같네요.

맞아요! 보통 리사이클이라고 하면 기존 형태를 뜯거나 자르고 분해해서 접합하는 식이 많은데요. 저는 그 방식이 조금은 거칠다고 느꼈어요. 그건 뭔가 죽은(死) 물체라고 인식할 때 가능한 방법 같거든요.


보통 그렇게들 생각하지 않나요?

저는 조금 다르게 봐요. 사물(事物)이지 사물(死物)이 아니잖아요. 거기엔 시간이 깃들어 있죠. 나름대로 자기 자리에서 세월을 견뎌온 친구인데. 이 친구에게도 사연이 있고, 그가 가진 나름의 경험이 있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의자를 또 다른 무엇으로 탈바꿈하는 게 아니라 의자의 꼴을 갖추되, 새로운 가치를 입혀준다는 개념으로 작업을 했어요. 


마치 인간에게 옷을 입혀주는 듯한 표현이네요.

그런가요? (웃음) 올해 초, <2022 메종 투 메종> 전시를 위해 폐기 처분된 학교 책상들을 가지고 ‘Revitalized’ 시리즈를 작업했거든요. 그런데 버려진 게 비단 책상만은 아니었어요. 널브러진 의자들도 있었죠. 이걸 시리즈로 이어가면 즐겁겠다, 하고 생각했죠. 그게 바로 두 번째 환생 프로젝트예요.


그렇군요. 두 번째 환생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이번 시리즈의 시작은 ‘사실 의자들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꿈이 있었다’라는 상상에서부터 출발했어요. 


의자들의 꿈이요?

네. 왜, 우리들도 저마다 한 번쯤은 꿈을 가져본 적이 있잖아요. 지금도 꿈을 위해 전진하는 사람도 있고, 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진정한 꿈을 이루고자 일보 후퇴하고 살아가는 분들도 있겠고요. 그 생각을 의자에게 입혀봤어요. 의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게 있었을지도 몰라! (웃음) 나아가 그 꿈들이 무엇일지 고민해보고 그 꿈에 다가가게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죠. 의자들이 원했던 게 뭘까 혹은 오늘날 이 의자들에게 역할을 부여한다면 어떤 게 적절할까? 이런 걸 염두에 두고 작업했죠. 



의자에게도 꿈이 있었다


사진: 최용준


어쩌면 죽음이란 수명의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그러졌을 때 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의자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가요? 

얘는 소파가 되고 싶던 의자예요. (웃음) 소파로 살고 싶었는데 학교 의자로 태어나 버린 거죠. 이 친구가 품었을지 모를 꿈을 이루게 하고자 옷을 입혔어요. 말 그대로 소파를 하나 제작을 해서, 그 소파를 의자에 입힌 거예요. 사람으로 치면 모자를 씌운 것처럼요. 이 모습 보고 오리 같다고 하신 분들이 많았어요. 귀엽죠? (웃음)


소장님 다운 상상이네요.

미감적으로도 흥미로웠어요. 분명 의자 다리는 과거 교실에서 볼 법한 물성을 지녔는데, 몸체는 소파의 형태라는 점이 말이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형태를 저희들은 되게 재밌게 느꼈어요. 참여했던 전시는 '래;코드(re;code)'라는 패션 브랜드의 10주년 기념전 <25개의 방>이었는데요. 이 브랜드야말로 리사이클을 지향하거든요. 그래서 꿈을 새롭게 이뤄주는 방식도 옷을 입히는 형태처럼 접근해 본 거죠.


사진: 최용준




이 의자는 어떤 친구인가요? 

흔들의자가 되고 싶던 학교 의자예요. 제가 갖고 있는 옷을 뭔가 다시 수선해서 입혀줬는데요. 할머니를 추억하며 만들었어요. 



할머니요?

제가 어릴 적, 할머니는 물건을 잘 못 버리셨어요. 오래된 건 꿰매 주셨고, 어떤 건 직접 뜨개질해서 입혀주시기도 했어요. 할머니가 떠준 조끼가 작아지면 그걸 다시 풀고 꿰매서 목도리로 만들어주시기도 했죠. 그땐 그게 참 싫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쉽게 버리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행위 말이에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런 관계가 점점 잊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할머니를 생각하며 만들었어요. 할머니를 상징하고 추억하는 의자인 거죠. 할머니들이야말로 리사이클링의 천재셨던 거예요. (웃음) 근데 손으로 뜬 스웨터를 찾기가 어려워서, 결국 제가 입던 스웨터를 의자의 몸에 맞게 수선해서 입혀봤어요. 제가 직접 한 땀 한 땀 꿰맸어요.



재밌는 상상력이네요

이 친구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보고 싶어 하는 의자예요. 요즘은 음악을 음원으로 즐기는 시대죠. 근데 저는 음악을 종합예술처럼 생각했거든요. CD를 사면 음악을 듣기 전 앨범 커버를 보고, 앨범 안에 들어있는 가사집을 펼쳐보기도 했죠. 그 안에 편집 형태, 레이아웃 같은 것들도 즐겼단 말이에요. 음원이 주류가 된 시대에 접어들자 그런 문화가 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의자의 푹신함 보다는 시디장이 의자 앞에 있고 발 올려놓는 곳이 있어. 시디를 보면서 음악을 듣는 그런 의자예요. 의자에는 제가 선물 받은 담요를 놓았어요. 그리고 벨트를 걸어서 담요를 빼서 덮기도 할 수 있게 했어요. 


당시에 진열하신 CD는 어떤 아티스트의 앨범인가요? 

한창 검정치마에 빠져있어서 검정치마 앨범들을 넣어 놨었어요. (웃음)



이용객의 동선이 아닌, 

누군가의 행위를 설계하는 일


앞서 말씀해주신 전시 이후에도 또 다른 전시 작업을 진행하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11월 16일부터 12월 16일까지 예올에서 진행하는 <반짝거림의 깊이에 대하여>라는 전시 프로젝트에 참여했어요. 예올은 전통 공예를 계승하면서도 이 시대에 맞게 계승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는 재단이에요. 매년 전통 장인, 젊은 공예인 각각 한 명을 선정하고 후원하고 있는데요. 이번 전시는 1년 동안의 결과물이 세상에 인사를 건네는 전시라고 보시면 돼요.


소장님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맡으신 건가요? 전시장 설계?

아뇨.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는 아트 디렉팅을 담당했어요. 공간 디자인만이 아니라 아트 디렉팅까지요.


아트 디렉팅이요?

네. 전시의 기획과 작품을 디자인했다고 봐주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 같아요. 


작품의 설계도를 그리면 장인 분들께서 그걸 구현해주시는 건가요?

네. 아무래도 장인분들은 전통을 지키고 계승해오시는데 특화되신 분들이죠. 저희는 장인분들에게 그간 해온 작업방식이 아닌, 그분들의 기술을 요즘 시대의 문법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제안을 드리는 역할에 가까웠죠. 본인의 장르를 유지하면서 현대에 쓸모가 있는 현대의 미감으로 재해석하는 것. 그니까 작품을 디자인한 거라고 보시면 돼요. 이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인 분들을 만나서 의논하고 공부했어요. 



공간 설계가 아닌 아트 디렉팅 작업을 담당하셨다는 게 저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네요. 작품을 기획한다라. 공간이 아닌 전시와 작품을 기획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공간 디자이너라고 하면 대부분 공간을 멋지고 예쁘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세요. 근데 제가, 그리고 팀원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거든요. 공간 만드는 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위한 무대를 만드는 것. 그러니 그 행위들을 간과한 채 미감만을 집중해선 안되죠. 가능하다면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이 더 발전되고 더 좋은 방향으로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거라고 믿고 일해요.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거푸집 안에서 그 형태로만 소모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전시에 대해서 얘기해주세요.

이번 전시 프로젝트는 작년 10월부터 약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준비했어요. 전시 주제가 두 가지예요. 하나는 금박이고 하나는 옻칠이죠.


금박이요? 

네. 공예에는 실로 다양한 장르가 있어요. 개중에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서서히 계승되고 있죠. 도자나 금속, 섬유공예는 고등교육 기관에서도 과가 있어서 공부할 수 있고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죠. 그런데 이렇게 교육적으로 계승이 안되거나 혹은 요즘 시대에서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사정이 달라요. 놋쇠로 만드는 유기(鍮器) 그릇 같은 건, 제사 문화가 존속되는 상황 속에서는 맥을 유지할 수는 있거든요. 



금박은 과거시대 사용되던 인쇄술에 가깝다. 문양판을 조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먼저 인장 도장처럼 문양을 조각해서 새긴 다음, 문양을 아교에 붙여 옷에 찍는다. 이후 얇은 박으로 만든 금을 그 위에 뿌린다. 그걸 솔로 털면 문양이 찍힌 곳에만 금이 남는다.


금박은 그렇지 않다는 얘긴가요?

맞아요. 금박은 반대예요. 쓰임의 폭이 점점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어서 택했고요. 이어지는 이야기인데요. 금박에 관한 추억이 있어요. 어릴 적, 어머니가 명절 때마다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어린이 한복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걸 사주셨어요. 거기에 금박이 새겨져 있었는데요. 근데 그게 영 안 예뻐 보이는 거예요. 왜 우리 엄마는 안 예쁜 걸 저렇게 사오실까, 차라리 금박이 없는 게 더 낫겠다, 이런 생각까지 했죠. 디자인을 할 팔자였나 봐요. 그때부터 그런 미감에 대한 생각을 했으니 말이죠. (웃음) 


말씀해주신 이야기는 추억처럼 들리지는 않는데요.

그런데요. 멋지지 않다고 생각하던 금박이 어느 날 찬연히 빛나는 순간을 목격해요. 성인이 되고 어느 날, 친구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요. 되게 어두운 곳에 놓인 병풍을 봤어요. 거기에도 금박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멋지게 보이는 거예요. 그때 무릎을 치며 혼자 말했어요. 이 멋진 게 왜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에 대해서. 


무슨 내용이었나요?

아, 어쩌면 오늘날 금박이 조명받지 못하는 건, 우리가 전기의 시대를 살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죠. 오늘날 전기를 동력으로 쓰는 조명은 균질한 빛을 만들 수 있잖아요. 낮에도 조명 속에서 살고. 그러다 보니 균질한 빛에 익숙해지는 바람에 빛의 변화에 무뎌진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했죠.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리고 상상했어요. 조명이 없던 시절, 금박의 입지에 대해서 말이죠. 금박이 뭔가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다른 반짝임을 만들어 냈을 거 같은 거예요. 달빛에 부딪힌 금박이 어두운 방을 비추는 별처럼 보였을 것도 같고. 어두운 곳에서 금박을 보다가 그런 사유에 접어들었어요.


그렇군요. 이번 전시에는 금박들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 하셨나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올 전시는 단순히 옛 것을 고증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아요. 그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오늘날의 문법으로 재해석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지죠. 그래서 금박에 어디에 주목할 것인지를 생각했죠.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사자성어가 떠올라요.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가 주목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의미(meaning)에요. 금박에는 예부터 기복(祈福, 복을 기원)의 성격이 강했다고 해요. 금박으로 새긴 패턴에 염원을 담았다는 거죠. 길상을 바라는. 그래서 주로 새겨지는 문양은 장수를 염원하는 숫자와 복(福)이라는 글자였대요. 때로는 그림 문양에도 의미를 담았다고 해요. 다홍치마에 새긴 석류의 경우, 다산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것이었죠. 그래서 이런 것들, 금박에 의미를 담는 행위에 주목하기로 했죠.



예나 지금이나 무언가를 바라는 행위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러한 의미를 계승하는 차원으로서의 금박에 집중하신 거네요.

네 맞아요. 또 하나 주목한 게 있는데요. ‘움직임’이었죠. 주로 금박이 많이 새겨진 한복은, 계속 움직이거든요. 입은 사람의 동작에 따라 주름이 생기고, 그 주름의 결에 따라 금박의 형태도 묘하게 달라지고요. 다만, 요즘 시대는 금박을 넣은 한복을 일상적으로 입는 시대는 아니니까, 한복 대신 다른 표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죠. 그러다 발(여름날 창문이나 대청에 쳐서 햇볕을 가리는 물건)을 떠올렸어요. 발은 일종의 커튼 같은 건데요. 요즘 시대에도 종종 쓰이면서도, 움직임을 표현하기 용이하다고 판단했어요. 또 하나는 모빌이고요.


작업 과정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올해부터 샤넬이 5년 동안 예올을 후원해요. 명망 높은 브랜드의 후원이 시작됐으니, 한국의 문화를 좀 더 많은 분들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금박에 한글을 새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복’이라고 써봤는데요. 뭐랄까, 말 그대로 너무 ‘복’ 같은 거예요. (웃음)


복이라는 단어 속 복잡다단하고 진중한 의미가 조금 가볍게 전달되는 느낌 같은 걸까요? 

맞아요. (웃음) 왜 한자 복을 읽으면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숙고할 시간이 생기는 거 같은데, 한글은 너무 빠르게 휙 와닿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대신 선택한 단어라 ‘꿈’과 ‘별’이에요. 


꿈과 별? 왜요?

이 두 가지가 오늘날 우리들의 머리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꿈이 뭘까’를 묻기보다는 ‘뭘 해서 먹고살까’에 좀 더 초점이 맞춰진다고나 할까요? 별도 그래요. 기후위기가 도래하면서, 가로등 불빛에 익숙해지면서 별을 바라보는 시간이 짧아지고, 고개를 들어도 별을 보기 어려워졌죠. 이건 한글로 표기해도 바로 와닿기보다는, 생각할 지점을 만들어주는 여백을 만드는 힘이 있는 단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이 두 단어를 새겨 넣었죠. 


사진: 김잔듸



시선을 돌리는 일, 

사유의 정거장을 마련하는 일


공간을 설계하는 것과 아트 디렉팅 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질문에 수정이 좀 더 필요할 거 같아요. 공간이나 가구를 제작하는 것과 전통을 재해석하는 행위 두 가지로 놓고 봐야겠어요. 차이가 커요. 어마어마하죠. 전자는 좀 더 다양한 관점과 작업 방식을 적용해볼 수 있는데, 후자는 아니에요. 전통이잖아요. 제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계승되어 온 것. 그 속에 담긴 시간의 무게. 이건 도무지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오늘날의 문법에 맞게 풀어가는 행위를 한다? 부담스러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끝까지 준비하실 수 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잊혀 가는 것들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은 마음이요. 그리고 저 또한 머물고 싶지 않았어요. 공간 디자이너가 주로 다룰 수 있는 업무라는 틀 안에 말이죠. 살아있다는 건 변화를 꾀하는 거라고 믿거든요. 자연이 변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듯 말이죠. 우리 팀의 기획과 시도가 누군가의 눈에는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금박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어떤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실 공예는 과거의 디자인이에요.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공간도, 공예도 쓰임이 있는 물건을 만드는 행위인걸요. 





폐기 처리된 책상과 의자, 기술 발전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전통 공예. 이 두 가지는 묘하게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주제 같기도 한데요. 왜 이런 것들에 시선을 돌리시나요?

질문에 적합한 답은 아닐지 모르겠어요. 누군가 최근 제가 제일 영감 받는 게 뭐냐 물으면 자연이라고 대답해요. 왜 자연이 중요하다,라고 최근 들어 더더욱 생각했냐면 인간이 곧 자연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요즘 시대의 풍광은 점점 반자연적인 것들로 가득해져 가는 느낌을 받아요. 자연의 입지가 좁아지는 걸 목격하고 있고요. 말인 즉, 자연의 일부인 우리들의 존재와 환경도 좁혀진다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저는 자연과 좀 더 밀접한 생활상을 맺어왔던 시간들, 그 시간이 담긴 사물에 주목하는 거 같기도 해요. 


그렇군요.

저는 제가 가진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사물로 전달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려면 사물 속에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담아야 하죠. 그러려면 어떤 사물을 고르냐가 중요한 문제가 돼요. 결국 제가 ‘이런 것들’에 시선을 돌리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사유의 정거장을 마련하기 위해서예요. 기차 속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급속도로 지나가는 것처럼,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사유의 정거장 말이죠.


어떤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돈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시대에,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크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것 중 하나가 뿌리라고 생각해요. 문화의 뿌리. 저는 찰나의 순간 현혹시키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는, 우리가 보고, 듣고, 누려왔던 걸 다음 세대 또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제가 대단한 환경운동가는 아니에요. 단지 쓸모를 다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새 생명을 부여할 뿐이죠. 공간 디자이너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웃음)





에디터 김승훈

인터뷰 임태희 www.limtaehee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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