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로컬리 Nov 18. 2022

꿈의 레시피로 구운 공간

[부로컬리] 크리에이터 인터뷰 vol.3 청킴제과


여덟 살 소녀 넬리. 어느날 어릴 적 엄마가 살던 집으로 향한다. 돌아가신 할머니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른 새벽, 엄마가 사라졌다. 곧 오겠지, 라고 생각하던 넬리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를 찾기 위해 숲으로 향한다. 


넬리는 그곳에서 혼자 놀고 있는 한 소녀를 만난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마리옹". 넬리는 조금 놀랐다. 엄마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다. 마리옹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자며 넬리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도착한 마리옹의 집. 어딘가 익숙했다. 넬리의 할머니 집과 구조가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마리옹은 엄마의 어릴 적 모습이라는 사실을. 그날 후, 넬리는 매일 숲으로 달려간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보며,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 둘 묻는다. 엄마의 어릴 적 꿈까지도. 나만큼 작고 여린 엄마를 만나며, 넬리와 마리옹은 친구가 된다. 영화 <쁘띠 마망>의 줄거리다.


영화 속 모녀(母女)가 ‘숲’을 매개로 시절을 공유한다면 화면 밖 한 모자(母子)는 폭신한 치즈 케이크로 시절을 공유한다. 이름보다는 누군가의 엄마 혹은 아내로 불려왔지만, 마음속 서랍장에 항상 꿈을 품어왔던 어머니. 그 레시피를 아들이 꺼냈다. 어머니의 디저트 속 사랑과 정성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려는 마음을 담아서. 청킴제과(鄭金製菓)의 탄생 서사다.


볕 좋은 평일 오후, 3호선 약수역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청킴제과를 찾았다. 이곳에서 정선녕 대표를 만났다. 가게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손님에게 디저트의 보관법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청킴제과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베이커리입니다. 아버지와 저의 성인 ‘정’, 그리고 어머니의 성인 ‘김’을 합쳤죠. 제가 학창 시절을 비롯, 상당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는데요. 거기서는 제 성을 청(chung)으로, 어머니 성은 킴(Kim)으로 발음하는 것에 익숙하죠. 그래서 청킴으로 표기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요.


또 다른 이유요?

제일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왕가위인데요.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중경삼림(重慶森林)의 중경을 영어로는 '청킹(chungking)'이라 발음해요. 그게 뭔가 청킴과 비슷하게 들려서 택한 부분도 있어요. (웃음) 어쨌든 시작은 저와 아버지의 성인 청, 어머니의 성인 킴을 따온 것입니다.


청킴제과를 운영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어머니 덕분이죠. 세계의 모든 어머니들이 위대하듯, 저희 어머니도 대단하신 분이세요. 특히나 음식에 대한 열정, 음식을 대하는 태도 같은 부분들이 그렇죠. 요리를 참 잘하세요. 한식도 잘하시지만 무엇보다 베이커리에 대한 조예가 깊으시죠. 그걸 좋아하시기도 하고요.



어머니께서 예전부터 베이커리 일을 하셨나요?

아뇨. 어머니는 원래 스튜어디스 생활을 하셨어요.


스튜어디스요? 그런데 어떻게 베이커리를?

직업 특성상 해외에 갈 일이 많으신 편이셨죠. 업무차 방문한 프랑스도 그중 하나였는데요. 그곳에서 다양한 디저트들을 맛보시면서 다른 맛의 세계를 발견하셨어요. 이후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고 저와 제 동생을 낳으셨죠. 지금은 좀 변했지만, 그 시절엔 특히 그랬죠. 어머니들이 가족을 돌보는 일에 모든 걸 쏟아부으시는. 제 어머니도 마찬가지셨어요. 가족들을 보살펴주시고, 우리들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주셨죠. 


어머니가 원래부터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셨던 건가요?

어머니는 친할머니로부터 상당부문 영향을 받으셨어요. 할머니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에 거의 모든 걸 직접 만드시던 분이셨거든요. 아직도 기억나요. 할머니 댁 옥상에 가면 장독대가 가득했고, 천장에는 메주들이 모빌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모습이요. 그런 할머니 곁에서 어머니도 자연스레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숙성하기 시작하셨죠.


사진: 김동규

요리에 관한 철학과 비법을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으셨다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할머니께서 베이커리까지 알려주시진 않으셨을 거 같은데요.

어머니가 베이킹을 보다 전문적이고 몰입해서 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동생의 일본 유학이에요. 예술 쪽에 재능이 있던 동생을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정하신 건데요. 당장 중학생이 되는 동생 혼자 일본으로 갈 순 없는 노릇이었죠. 결국 어머니가 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향해요. 거기서 프랑스 식문화에 대해 공부하셨어요.  


프랑스 요리를 일본에서요?

네. 일본의 디저트 문화가 상당히 발달해 있거든요. 프랑스 파티셰들도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보다 일본 시장을 더 중시하기도 해요. 우리나라 디저트 문화도 일본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요.


쉽지 않으셨을 거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때 어머니가 마흔이 조금 넘으셨었는데, 생소한 언어인 일본어를 처음부터 배우셨어요. 새 언어를 배운다는 건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대단하시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진: 김동규


어머니의 일본 생활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 주세요.

도쿄에 있는 프렌치 전문 요리 학원에서 교육을 이수하셨어요. 2년의 교육 기간이 끝난 후에는 그곳에서 조교로 1년 정도 활동하셨고요. 이후, 도쿄 시내 유명 호텔 내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1년간 실습 과정도 거치셨죠. 프랑스 식문화 전체를 습득하신 정도였어요. 물론 어머니는 그중에서도 베이킹을 좋아하셨어요.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시는 일을 자주하셨죠. 할머니가 되신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니까요.


자녀의 유학 생활을 서포트 하시면서 본인 공부까지 하신 거네요?

네 맞아요. 정말 대단하시죠.


네 정말요. 이제 알겠네요. 교육을 수료 하시고 베이커리를 시작하셨군요?

아뇨. (웃음)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을 끝으로 동생은 미국으로 가요. 저는 이미 미국에 먼저 가 있었고요.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오셨죠. 그 시절 어머니는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시기에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드셨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때도 지금도 가족들을 위해 더 시간을 쏟으시느라 사업 쪽에는 욕심을 내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손에서 베이킹을 놓지 않으셨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을 위해 정성을 담은 디저트를 만들어 선물해 주시곤 하셨죠. 제가 좀 더 어릴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 초청해서 베이킹 클래스도 무료로 여셨고요. 


사진: 김동규


타국에서 깨달은 어머니의 맛


삶의 궤적이 선명히 그려지네요. 대표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나요? 아까 얼핏 듣기로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꽤 오래 하셨다고 한 것 같은데요. 

저 역시 처음부터 베이커리를 하진 않았어요. (웃음)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그러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죠. 어릴 적, 만화 <슬램덩크>를 좋아했는데요. LA 사는 사촌들이 매직 존슨(Magic Johnson)이나 카림 압둘 자바(Kareem Abdul-Jabbar) 같은 선수들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내주면 그것들도 챙겨보곤 했죠. 그런 걸 접하다 보니 저도 미국에 가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갔죠. 수업 끝나면 농구하고, 농구 보다가 자고, 주말에는 비디오게임기로 농구 게임을 했죠. 농구가 정말 좋아서 간 거예요. 


농구를 배우려고 유학 가신 건 아니죠?

네. (웃음) 대학 전공은 금융 계열이었어요. 남들처럼 전역 후 취업을 준비했죠. 그런데 당시 대다수 금융회사가 채용을 중단했어요. 그때가 2008년도, 미국 금융위기가 발발했던 시기였거든요. 귀국 후 가족들과 논의하다가 로스쿨 진학을 결정했어요. 모의고사를 풀어봤는데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오는 거예요. (웃음) 당시 한국은 사법고시를 치러야만 변호사가 될 수 있었어요. 결국 로스쿨 제도가 갖춰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고, 졸업 후 변호사 생활을 했어요. 


우여곡절이 많으셨네요. 이후의 삶은 어떠셨나요? 

졸업 후, 홍콩에 있는 미국 대형 로펌에 취업했어요. 거기서 한 3년 정도 일했는데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사진: 김동규


이유가 있을까요?

업무량과 강도가 상당히 높았거든요. 업무가 복잡한 건 차치하더라도, 업무를 붙들고 있는 시간도 길었죠. 아까 제가 미국 로펌 회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예를 들어 제 퇴근 시간이 오후 8시라면 저는 6시 이후에도 일을 해야만 해요. 홍콩 시간으로 8시쯤이면 본사가 위치한 뉴욕은 아침이거든요. 업무 관련 메일이 와르르 도착할 시간이죠.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 게 일상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뉴욕 시간에 맞춰 일하지 않으면 본사 직원들의 업무가 진행되기 어려운 구조였거든요. 늦은 새벽, 일을 마무리하고 자다가도 화들짝 놀라서 깬 적이 한두번이 아니예요. 변호사란 직업은 신뢰가 상당히 중요한데요. 오탈자 하나라도 나오면 그게 흔들리게 되거든요. 혹시나 몽롱한 상태로 작성한 메일에 오타 난 건 없었나, 다시 확인하려고 일어나기 일쑤였죠. 


듣기만 했는데도 버겁게 느껴지네요.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졌죠.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먹는 걸 좋아해서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어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지 못한 느낌을 받았죠. 더는 안되겠다 싶어 퇴사 후 한국으로 돌아왔죠. 


이후 베이커리 운영하신 건가요?

아뇨. (웃음) 한국에 와서는 영어유치원 원장으로 일했어요. 약 20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을 담당했죠. 약 4년 정도 다녔던 거 같아요. 즐거웠어요. 영어를 쓰는 일도,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그러던 와중에 코로나가 창궐했죠.


사진: 김동규

2008년과 2022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대표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네요.

네. 그쯤부터 베이킹을 한번 제대로 해볼까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미국 대학시절부터 가끔 했거든요. 유학 시절, 다양한 디저트를 맛봤는데 뭐랄까, 시중에 판매하는 디저트는 지나치게 달게 느껴졌거든요. 제 입에 안 맞았죠. 그래서 직접 만들어 먹었던 거예요. 제 몸에, 미각에 어머님의 흔적이 새겨져 있던 거죠. 타국에서 디저트를 먹다가 깨달았어요.


베이커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신 건 한국에 돌아오신 다음인 거죠? 

네. 한국에 돌아와보니 다양한 디저트 가게들이 생겼더라고요. 미국에 가기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죠. 열심히 돌아다녔어요. 여러 디저트를 맛보며 나름대로 공부도, 연구도 했죠. 제가 한번 만들어봐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에 교육도 받았고요. 그러면 그럴수록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치즈케이크가 생각났어요.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웃음) 결국 어머니의 레시피로 돌아왔죠. 우리만의 베이커리를 운영하자고 말씀드렸어요. 못 다 핀 어머니의 꿈을, 지금이라도 이뤄드리고자 하는 각오로요. 




함께 나이 드는 ‘동네 제과점’을 꿈꾸며


사진: 정선녕

청킴제과가 출발하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필요했네요.

네.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지셔서 매장에 나오시기는 어려워지셨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정신만큼은 제 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주셨던 치즈케이크와 당근케이크, 파운드케이크의 레시피를 좀 더 현대적으로 발전시켰어요. 제가 개발한 레시피도 접목시켜봤고요. 


청킴제과의 디저트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듯 정성을 담아 즐겁게 만들죠. 직원분들에게도 늘 말해요. 이걸 드시는 손님에게 하나하나 선물하는 느낌으로 일하자고 말이죠. 재료도 신경 써요. 어머니가 늘 강조하셨던 정성과 애정을 담으면 자연스레 재료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게 되거든요. 모든 레시피 속에 가장 중요한 재료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고민해 담아 놓았어요. 자극적인 맛으로 미각을 사로잡으려 하기보다는, 풍미에 좀 더 집중하고 있어요.


뭐랄까요. 공간도 그런 느낌이 강해요. 자극적인 맛보다는 뭔가 담백하고 무구한 느낌 같다고 할까요?

맞아요. 공간도 디저트를 닮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디자인 콘셉트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바로 “우리 동네 제과점” 느낌이었어요. 설계를 담당해 주신 워프앤우프(WARP AND WOOF)와 이야기할 때도 소위 ‘핫 플’ 같은 공간은 지양해달라고 요청드렸어요. 화려함 대신 안온함을, 그리고 우리 스토리를 공간 언어로 풀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의외네요. 공간을 만들거나 운영하면 아무래도 대중의 주목을 원하실 것 같은데 말이죠. 대표님은 오히려 반대의 이야기를 하시네요. 핫플 대신 지역(local)에 집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브랜딩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도처에 널린 브랜드들과 함께 살아왔죠. 어떤 브랜드들은 충성고객처럼 소비하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거 거 같아요. 내 옆에 오래 남는 브랜드들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결국 사람들 마음에 남는 건 주변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오래된 것들이라고 결론 지었죠. 동네 제과점을 지향하는 이유예요. 그게 저희 가족이 원하는 방향이기도 하고요. 


청킴제과의 정신을 주민분들에게 알리는 과정이 중요하겠어요.

단골손님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걸 느껴요. 이번 추석 때 약과 까눌레와 흑임자 마들렌을 만들었는데요, 손님들이 엄청 찾아주셨어요. 한 손님은 지인들에게 선물하겠다며 거의 10개 정도를 들고 가셨죠. 외부에 많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주목하고 찾아오는 장소가 되는 거 감사하고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저는 좀 더 동네에 서서히 녹아들었으면 좋겠어요. 인스타그램 계정에도 써놨어요. ‘우리 동네 제과점’이라고요. 진심입니다. 지역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공간, 청킴제과의 꿈입니다.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한 청킴제과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건너편에 오래된 빵집 하나가 있었는데요, 사장님 몸이 아프셔서 운영을 중단하셨다고 들었어요. 주민분들이 식사용 빵을 구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진 셈이었죠. 동네 제과점이니까 동네 분들이 필요한 걸 반영해야지 생각했어요. 소금 크로아상은 청킴제과 초창기 계획에는 없던 메뉴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정황들을 고려해 추가했어요. 식빵도 준비하고 있어요.



외부에 있는 입간판이 인상 깊었어요. 글자 하나하나 써넣으신 게 손님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느낌도 받았고요.

입간판도 원래는 없었는데요. 지역 주민분들을 위해 마련했어요. 가장 잘 팔리는 메뉴가 뭔지 물어보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새로 나온 메뉴와, 청킴제과에서 인기 있는 메뉴를 적어놓아 손님들이 보시기 편하게 했어요.


중요한 질문을 빼먹었네요. 어머니가 해주셨던 디저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요?

치즈케이크요.



그 치즈케이크, 청킴제과에서 맛볼 수 있나요? 

현재 여름 치즈케이크는 판매가 종료됐어요. 계절에 따라 케이크 토핑 및 베이킹 방식을 바꾸는 어머니의 레시피 때문이죠. 여름에 판매했던 치즈케이크는 카스텔라 위에 숙성시킨 프랑스산 치즈 세 개를 얹고 그 위에 골드 키위와 생크림이 올라가는 형태의 케이크에요. 어머니의 방식을 고수하되, 이걸 좀 더 먹기 편할 수 있게 떠먹는 형태로 발전시켰죠. 조만간 크리스마스 치즈케이크가 나올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웃음)



마지막 질문이에요. NBA 팀 중 어느 곳을 좋아하시나요?

LA 레이커스요!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은퇴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아니면 수비에 좀 더 기여해 줬으면 하네요.





에디터 김승훈

인터뷰 청킴제과

설계 WARP AND WOOF warpandwoof.kr





부로컬리(Boolocally)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영감이 되는 공간을 소개하는 플랫폼입니다. 인터부(INTERBOO)는 매주 다양한 크리에이터들과 마주(inter) 앉아 공간을 보는(view) 그들만의 태도를 부로디(BOOlody)에게 소개하는 인터뷰 콘텐츠입니다.



부로컬리 다운로드

App store

Android



작가의 이전글 조금 다른 의미의 지속 가능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