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관찰_서정문
작성 노운아 (盧韻芽)
기분 좋게 끈적거리는 목, 가슴 아래에서는 강아지 뱃살처럼 보드랍지만 역시나 끈적거리는. 나갈까 말까를 고심한 끝에 시원한 나일론 혼방 소재의 초여름 원피스를 한달음에 입고 모자를 써보았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회색빛으로 짐작하건대 습한 먼지가 분명 가는 길에 일렁일 터. 그렇지만 이 길을 몇 년째 택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나는 허상의 가스에 중독된 설정인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항상 자문하곤 했다.
어딘가 야릇한 공상. 극적인 타이밍, 로맨스, 꿈같은 생활의 전환 등등
평범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부정하려는 공상은 그 산책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의식은 내게 자꾸 습기에 도취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이미 허상의 가스는 머릿속에서 뿜어져 내려와 나의 귀밑, 목덜미, 속을 끈적하게 적셨다. 분명 저항하려고 몇 번이나 의식을 붙잡아보기도 했지만, 의식은 습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내 무의식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취하곤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 녹음이 깔린 좁은 산책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기 때문이다. 습기는 나를 지배한다. 습기가 나를 망가뜨린다.
검초록색에서 가스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바람은 끈적한 엿가락처럼 굳었다. 그 길에서는 햇볕도 신선한 공기의 흐름도 아무것도 없었다. 습기로 가득 찬 야릇한 공간에서 초록빛 음울한 기운이 무서울 때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창공을 가린 나뭇잎에서도 음산한 습기가 머리로 내려왔다.
습기 환각이 시작되는 타이밍이다. 이 정도면 잘살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근원이 없는 생각, 바로 설정의 공상이라고 생각한다. 설정의 공상이 내 자아를 조정하려고 했다.
‘당신에게 요즘 어떤 칭찬할 만한 일이 있는가.’
‘당신에게 요즘 어떤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있는가.’
물음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렇다. 있다’
초록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산책로에 들어선 지 이제 15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옆에서는 강이 식은 누룽지처럼 눅눅하게 흐르고 있다. 습한 물보라 냄새가 조용한 회오리처럼 일더니 나를 감쌌다. 땀이 더욱 진하게 흘러내렸다. 강물의 물기가 몸에 덕지덕지 붙는 것 같기도 했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창의성으로 가장된 이상한 명제를 습기가 내게 던졌다. 교묘한 달콤한 공상이었다.
‘당신의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말랑말랑한 형이상학에 관한 것이다.’
산책로 중간 지점에 들어선 것 같았다. 간간이 보이던 사람들도 없었다. 오롯이 녹음, 습기 그리고 나뿐이었다. 녹음에 서성이는 것은 축축한 거미뿐이었다. 까치가 울먹거리면서 눅눅한 공기의 팽창을 깰 때가 있곤 했다. 그러면 내 생각은 일정 정상적인 것으로 머물려 했지만, 까치는 인내심이 없어서 금방 새파란 뾰족 잎이 창창한 소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유혹됐다.
감상이 일더니만 나는 어느새 곁에 없는 누군가를 만들어냈다. 그와 함께 환상의 가도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의 지식을 닥치는 대로 소화한 존재였다. 지식의 처음에서 끝을 잘도 요리했다. 더욱 마음에 드는 점으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눈빛으로 감성을 관통했다. 나는 그가 나만의 소울메이트라고 여겼다. 상상이어도 좋았다. 여자와 남자를 아우르는 사람이 나의 상대방이라는 사실에 취해서 계속 걸었다. 이제 산책을 시작한 지 40분이 지난 것 같았다. 이따금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모두 운동복을 입고 음악을 들으며 바쁘게 뛰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더욱 늘어뜨렸다. 산책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까치가 다시 쨍 한 소리를 울부짖으며 내 걸음을 방해했다. 불현듯이 괴로운 지나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실제 과거에 존재하는 그는 의식 속에서 또렷이 존재했다. 나를 질려 하는 눈빛. 더는 나하고는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 내가 저지른 실수라곤 상대방과 조금 더 로맨틱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나만의 일방적인 감성이라고 해도. 그렇지만 극적인 설정은 항상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나를 경멸했다. 별 이상하고 미친 여인을 잠시 만난 것에 관한 후회의 눈빛. 나는 무례하게 굴지도 실례를 범하지도 않았다. 단지 달콤한 캔디처럼 나를 어린 소녀처럼 알아봐 달라는 의미의 말투와 손짓 정도밖에. 그건 지식, 예술, 음악과 같은 조금 아주 조금 형이상학적인 것이지만 소녀의 머리끈처럼 작은 파편 같은 것들이라고.
그래서 나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내밀한 그, 지식의 끝과 처음, 나만의 말랑말랑한 형이상학적 존재인 그를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습기가 더욱 심해졌다.
목덜미는 미끄덩해졌다. 그 일을 회상하니 머릿속이 고통스러웠다. 허상의 가스가 필요했다. 차라리 없는 현실의 망각이 더 편했다. 누구도 나의 내면을 이 산책길에서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됐어 하는 자기 안위를 해도 녹음에 모든 것이 가려져서 허망한 생각은 허용됐다. 모든 건 습기 때문에 괜찮다. 습기가 내 무의식을 더욱 크게 잠식했다. 그것은 모든 일상을 지배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옆 사람들을 보았다. 거기는 회사였다.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슬쩍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내 옆의 남자 직원이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그는 10분째 한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는 그렇게 일을 열심히 했다. 괜찮았다. 그렇게 시간을 넓게 펼쳐 써야 했다. 그 남자의 책상에는 습기를 뿜어내는 푸른 식물들이 자리했다. 식물들이 그가 타자를 칠 때마다 요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이만하면 괜찮겠지, 허상의 가스가 어디든 지배하였다. 시간은 흐르고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검은색 이상의 검은색이 사람들을 에워쌌다. 모두는 힘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자기 안위가 이제 자기도취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이런 종류의 습기 감염은 사람들에게 비난당하지 않았다. 무의식이 의식으로 가장돼 생활에 침투한 습기의 마력을 나는 종종 이렇게 목격하곤 했다.
그렇지만 나의 습기 환상은 왜 현실에서 비난만 당할까. 그것을 공상이라고 누구는 멘탈 디스오더라고 비난했다.
산책길이 이제 거의 끝나갔다. 집에서 나온 지 한 시간 정도 된 것 같았다. 초록색 길의 끝자락에 아스팔트가 보였다. 많은 사람이 그곳을 서성였다. 모두 괜찮아 보였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까치가 한 번 더 울었다. 쨍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저 마른 아스팔트 길로 걸어가려고 한다. 지식의 처음과 끝을 관장하는 그 남자도 그리고 종일 시간을 펼쳐 쓰면서도 힘들다고 믿는 남자 직원도 없을 마른 길.
습기의 마력이 이제, 그만 나를 우리를 옭아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