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음절 구조
영문과를 다니는 동안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자주 하던 말 중에 하나가 모두 영문도 모르고 입학을 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을 해서 영어가 한국어만큼 편한 사람도 있었다. 본인은 영어를 무지막지하게 좋아했던 소녀였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서 부끄럽지만 상도 타고 그랬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영어영문학부에 입학하면 영어와 관련된 달콤한 것을 배울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입학했는데 그렇지 않은 내 주변 친구들 중에는 영어는 괜찮으나 영문학 즉, 영문은 정말 영문도 몰랐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럴만한 것이 영어학 입문 English Introduction, 통사론 Syntax, 음성학 Phonetics과 같은 과목들은 중간에 아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했을 정도로 어려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지만 영어 발음은 따로 배운 적이 없었는데 네.이.티.브처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굴리자. 굴려. 그랬던 조금은 부끄러운 기억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럼 대학교 때부터였을까. 과연 언제부터 영어가 본인의 의식에 존재했나 기억을 곱씹어 보던 중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들어도 내게는 분명 5음절이었다. 교회에서는 성극 준비로 일동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본인은 동정녀 마리아 역을 맡아서 열연을 해야 했다. 한편에서 막 구운 쿠키를 대면했을 때나 맡을 법한 정겨운 냄새를 풍기는 트리에 적힌 글자가 아리송했다. 금실로 둘러싸인 붉은색 글자. 영어를 처음 배웠을 때 훗날 나는 느꼈다. 왜 2음절로 발음해야만 하는 것일까. 애먼 혀만 나무라면서 나는 나를 단련시켜나갔다. 아,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을 좀 누군가 알려주었다면 얼마나 수월했을까. 중학교 영어 선생님은 항상 무거운 어학용 카세트테이프 cassette tape를 들고 다니셨다. 감고 재생하고 감고 재생하던 일을 반복하셨다. 우리는 앵무새처럼 따라 읽었다. 오후 수업시간에 졸릴 때는 그렇게라도 목청껏 외쳐야 잠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방의 모방에서 탄생한 ‘나만의 발음’을 확인받을 때까지 무려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니 얼마나 참담했나. 그것도 영어권 국가가 아니라 비영어권 국가에서 말이다. 왜 외국어의 발음을 배우는 것이 ‘타고난’ 그리고 ‘감각이 좋은’ 것이어야 하는 것일까. 본인은 우리가 무척 무지했다고 단언한다. 옆에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을 두고서도 먼길을 계속 돌아다녔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크-리-스-마-스’는 5음절이었다.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발음을 두고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빨리 읽는 연습을 통해 ‘크리스마스’를 억지로 2음절로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빠르게 읽다 보니 ‘크리스/마스ㅡㅡ’ 이렇게 끝이 길어지고 말았다. 저 꼬리에 붙은 것은 하이픈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이야기하려는 ‘ㅡ’ 모음 즉, ‘으’이다. 2음절로 만들라고 했지 끝을 저렇게 늘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어디서 길게 늘어뜨리는 소리를 배웠던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소리가 자연스럽게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크리스마스 Christmas’
‘밀크 Milk’
‘스튜던트 Stdent’
영어를 배우면서 따라 하려고 했던 것 중 (모르겠다. 나를 지도한 외국어 선생님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하나가 영어는 어떻게 하면 굴려볼까 어떻게 하면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감칠맛 나게 해 볼까 하는 것이었다. (대중매체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았다.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떨림이란. 요즘도 AFKN으로 영어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으려나…)
그런데 버터칠?을 제대로 한 그 발음이 왜 나는지 누구도 선생님께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발음을 하니까 그런가 보다 그렇게 수긍만 했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네이티브처럼 보이고 싶었던 욕망이 더 컸었다.
영어 발음을 연마하기 위해서
1) 일단 꼬부랑 소리를 내기
2) 내 나름의 소리 규칙을 적용한 것과 카세트테이프의 발음을 듣고 협의된 중간 발음
즉, 위의 두 가지 원칙을 갖고 발음을 연습했다. 얼추 비슷하게 발음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새로운 단어나 모르는 단어를 봤을 때는 또 말문을 잇지 못했다. 언젠가는 말문이 트일 거라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더러 텔레비전에서 아이들 영어 발음을 위해 혀 수술하는 부모에 관한 뉴스는 잊힐만하면 방송에 보도되곤 했는데 그 부모들 비난만 했지 왜 우리는 ‘영어와 한국어의 음절 구조’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아리송하다. 의문과 질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많았다. 영어 사교육의 상술, 질문하지 말라는 잠언, 그냥 무지 등등
먼저 왜 우리는 ‘밀크, 크리스마스’라고 쓰는 것인가. 여기에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로 모음 ‘ㅡ’의 존재다. 한국어의 음절 구조를 살펴보면 모음+자음, 모음, 자음+모음+자음, 자음+모음이다. VC, V, CVC, CV 한국어는 모음과 자음이 번갈아 가면서 음절이 만들어져 있다. 자음과 자음이 연결된 구조는 없다. 쉽게 풀어쓰면 이런 것이다. 자음이 먼저 오더라도 뒤에는 꼭 모음이 따라온다. 따라서 크리스마스를 영어권 국가 원어민이 발음하는 것을 한국어로 옮기면 대략 이런 모습이다.
∎ㅋㄹㅅ- 멋
문제는 한국어 음절 구조로는 이렇게 자음 ㅋ,ㄹ,ㅅ를 어두에 한꺼번에 쓸 수 없다. 자음과 자음이 함께 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로 아주 유용한 것이 바로 ‘ㅡ’이다. 크.리.스.머.스로 음절이 만들어지면서 우리는 읽을 때 5음절로 읽는 것이다. 웃을 일은 아닌데, 모두 멀뚱 거리면서 서로의 발음에 민망해한 적이 많지 않았나.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봐도 재미있다. ‘밀크’라고 표기한 것을 영어 발음식으로 표기하면 어떨까.
∎미ㄹㅋㅡ
∎ㅋㅡ리ㅅㅡㅁㅏㅅㅡ
영어식으로 표기한 후 보이는 ‘ㅡ’ 발음을 지워보면 아래와 같다.
∎ㅁㅣㄹㅋ
∎ㅋㄹㅣㅅ마ㅅ
여기에 우리가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밀크의 발음 미역 즉, [미억]처럼 발음을 하려면 어떤 요소가 더 필요한 걸까? 바로 유성음(voice)과 무성음 (voiceless)의 변별을 이해하면 드디어 본인이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굴리는 발음을 조금 더 쉽게 구사할 수도 있다. 유성음과 무성음 변별은 한국어에서 크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ㄹ’ 발음을 [l/r] 동시에 표기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이 유음 ‘ㄹ’에 관해서는 다른 호에서 언급하겠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어는 영어와 달리 연속적으로 자음이 올 수 없는 음절 구조이기 때문에 한국인 학습자가 영어 단어를 배우면서 발음할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으’를 자음과 자음 사이에 집어넣어서 발음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렇게 되면 음절이 늘어나게 되면서 우리가 말하는 ‘한국식 영어 발음’처럼 되는 폐해를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으’는 중설 고모음으로 좋게 이야기하면 맑고 경쾌한 고음이어서 소리가 꽤 명료하게 들리나, ‘으’가 없는 영어에서는 이 ‘으’모음이 전혀 다른 소리로 들리게 된다. 다른 외국어의 예로 일본어도 ‘으’음이 없기에 ‘우’로 발음해야 하는 소리에도 한국인은 대체로 ‘으’로 발음해 버리는 실수를 초반에 한다. 대표적으로 すし[수시]를 [스시]로 발음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그럼 st로 시작하는 단어를 발음할 때의 변화에 대해서 영어와 한국어를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어는 어두에 자음이 연속적으로 오지 못한다고 했다. s,t는 모두 자음이다. 먼저 캠브릿지 Cambrige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학생이라는 의미의 단어 ‘student’의 발음을 찾으면 아래와 같다. 영국식과 미국식의 발음 차이 (st)를 경음화시키느냐 경음화시키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음절 모두 같다.
∎Student
영국식 [stjuː. dənt] 미국식 [ˈstuː. dənt]
∎Student
한국식 [스튜던트]
먼저 한국인이 student를 이해하는 한국인의 발음을 한국어 음절 구조로 표기해보면 이렇게 된다.
(1)ㅅ (2)ㅌㅠ (3)ㄷㅓㄴ (4) ㅌ
그런데 ㅅ라는 음가는 있지만 이것이 음절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음 단독으로 구성될 수 없다. 따라서 모음이 필요한데 이 모음이 바로 매개모음 ‘ㅡ’ 이다. 매개 모음 ‘ㅡ’의 위치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따라서 음가 ‘ㅅ’의 음절 구조 형성을 위해서는 매개모음이 필요하다. 이에 ‘스’라는 음절이 만들어진다. 그럼 스튜가 ‘스뜌’로 인식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단 t ㅌ가 tt/t’ ㄸ로 들리는 것은 우리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맞게 들은 것이다. 영국식이든 미국식이든 영어의 음절은 자음과 자음이 연속해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ㅅㅌ’ 가 한 자리에 올
수 있고 이것이 ‘ㅅㄸ’로 경음화가 진행된다. 즉 ‘스뜌던~’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한국어의 우수성으로 ‘뜌’라는 소리는 적어낼 수 있으나 그 문자로 통용되는 단어가 없으니 ‘튜’로 쓰다 보니 결국 ‘스튜~’ 이렇게 시작한 ‘스.튜.던.트’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마지막 음가 ‘ㅌ’도 영국식이든 영어식이든 한 음절로 나는 소리가 아니라 ‘-den’의 끝소리에 아주 미약하게 들릴 듯 말 듯 나는 소리이다. 따라서 더ᇉ 처럼 밑에 받침으로 ㅌ가 들어와야 한다.
∎Milk [mɪlk] 1음절
∎christmas [ˈkrɪs.məs] 2음절
∎Student [stjuː.dənt] 2음절
∎밀.크 2음절
∎크.리.스.마.스. 5음절
∎스.튜.던.트 4음절
그러니까 결론은 무턱대고 혀를 굴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발음의 순서는 먼저 목표 외국어의 음절을 이해하고 한국어의 음절 구조와 비교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러한 작업을 왜 계속할 수밖에 없느냐면 외국어를 배울 때 모국어를 배울 때처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될 확률이 지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 환경이 모두 목표 언어로 형성돼 있는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우는 원리를 지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를 학습하는 자세를 지켜야 하는 것이 매우 불합리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결한 상황이다. 따라서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언어를 취하려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입력을 하면서도 모국어 간섭으로 인한 자연적 습득이 힘들 때는 한 번쯤 모국어와 비교해 가면서 학문적 관찰을 통해 학습하는 것도 중요하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제3, 제4의 외국어를 배울 때도 이러한 음가의 원리를 이해하고 처음부터 외국어를 배운다면 그 지독한 문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원어민 같은 발음을 구사할까요?”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물론 완벽히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발음뿐만 아니라 억양과 강세와 같은 부분도 있으니 일단 오늘 살펴본 음절 구조를 통한 외국어 발음의 이해에 관해서만 아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