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떠났어. She’s gone

슬퍼 말아. 그녀는 원래부터 없었어, 한국어에서.

by 부밍북

노운아


누구나 아는 몰라도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노래. 오래간만에 그 노래가 생각나 인터넷을 뒤적이며 가사를 찾아봤다. ‘그녀가 떠났어, 그녀가 사라졌어, 그녀가 가버렸어’ 등 여러 중간 언어로 번역돼 존재하고 있는 그녀는 이제 그 남자의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현실의 남자는 ‘그녀’라고 좀체 말하지 않았다. 현실의 남자는 그저 본인의 이름을 담백하게 불러주든가 약속된 애칭으로 지칭할 뿐 로맨틱한 목소리로 애절하게 ‘그녀’라고 속삭여 준 적이 있었던가. 아주 오래전에 무수히도 많이 받았던 편지를 꺼내 읽어봤다. 누구는 ‘00야’ 또는 ‘00아’ 더러 어떤 이는 ‘00 님’으로 시작하면서 본인에 대한 어떤 감정을 읊었던 그 무리. 눈에 띄던 편지가 하나 있었는데 끝맺음이 인상적이었다. ‘나만의 그녀에게’ 이렇게 끝맺음을 한 편지였는데, 그 시절 ‘그녀’라는 표현이 참 생경하면서도 듣기 싫지는 않았는지 본인은 그 편지에 곧장 답장을 했다. 그렇게 설렐 것만 같았는데… 현실적 애칭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현실을 둘러보았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텔레비전. 핸드폰 창이 쉴 새 없이 바뀌는 SNS 창. 세계로 뻗어가는 K-Pop.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 가만 보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제창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통 그들을 현실에서는 마주할 수 없다. 왜 그럴까.


몇 해 전의 일이다.

본인도 열심히 소셜 미디어를 하던 중에 인상적이었던 커플의 소통방식이 생각났다. 두 사람은 남부러울 것 없는 커플이었고 말 그대로 선남선녀 그 결정체였다. 그런 커플들의 소통방식을 처음부터 구경하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소셜미디어는 쉼 없이 업데이트가 됐고 인터넷상의 친구인 관계로 구경거리가 점차 쌓이면서 그 사람들의 소셜미디어를 관찰하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부터 남자가 여자 친구를 지칭하는 대명사에 눈이 가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는 그 여자를 ‘그녀’라고 대명사화 시켰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읽었는데 문득 왜 굳이 ‘그녀’라고 진짜 ‘그 여자’를 소설화, Kpop화, 영화화처럼 현실에서 불리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 남자는 정말 그 여자를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라고 지칭하면서 ‘그’가 더 부각되길 바랬었나.

어느 순간부터 본인 혼자만의 물음과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변모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본인의 추리였고 이것은 다소 발화자의 무의식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는 언어심리학적인 관점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로맨틱’을 굳이 ‘언어심리학적’인 것과 연관 지어 두 남녀의 시샘을 불러일으킬 만한 애정 표현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왜 ‘그녀’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수용하기 힘든가에 대해서 계속 의문을 품고 있었다.


또 몇 달 전의 일이다.

한국어 수업을 듣는 과정이어서 더욱 의아했던 기억이었다. 다문화와 연관된 수업이었고 수업의 형식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수업은 고요했고 홀리holy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더니 본인의 귀를 긁어서 결국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그 여자는 평범한 한국인이었다. 본인은 다시 눈을 감고 그 여자… 아니, ‘그녀’가 읊는 이야기를 다시 곱씹으면서 들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을 자꾸 ‘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틀린 것까지는 아니었는데 부자연스러운 그 지칭을 왜 ‘그녀’는 계속 쓰는 것일까.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회오리치는 ‘그녀’를 분석하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고 본인의 조잡한 개인적 결론으로 또 언어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현실에 없는 ‘그녀’가 되고 싶은 욕망이 대체로 많은 성향의 사람이었고 단 그것을 외국어로 읊을 만큼의 외국어 지식, 그리고 쓰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의 충분한 한국어 지식을 겸비하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Steellheart의 노랫말처럼 내게서 홀연 떠나가버렸다. 그 여자의 발화에 더는 큰 무게 중심을 두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말끝마다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저 멀리 어디 미지의 외국에서 온 한국인 ‘그녀’.


그렇다면 3인칭을 지칭하는 한국어 대명사는 무엇인가?


한국어 문법 총론(2017)에서는 대명사를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인칭 대명사에 대해서는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나누었고 특별히 3인칭은 대화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기준으로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근칭, 중칭, 원칭으로 나누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근칭으로는 ‘이이, 이분’, 중칭으로는 ‘그, 그이, 그분’, 원칭으로는 ‘저이, 저분’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한국어는 대명사가 그리 발달한 언어가 아니므로 특별히 ‘하십시오체’를 써야 할 상황에서는 적절한 대명사를 찾기가 어려워 이름과 같은 명사를 빌려 사용하기도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3인칭 대명사를 명사 즉 이름을 빌려 사용하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대화가 이루어지는 문맥을 통해서 3인칭 대명사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대명사가 발달한 인도-유럽어 언어와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영어, 독일어로 각각 번역해 보면 아래와 같다.


A: 빌리 씨는 (또는 빌리 씨가) 독일 사람이에요?

B: 네, 저는 독일 사람이에요.

A: Are you(Billy) German?(EN)/ Sind Sie(Billy) Deutscher? (DE)

B: Yes, I’m / Ja, Ich bin.


A: 빌리 씨가 미국 사람입니까?

B: 아니요, 빌리 씨가 독일 사람이 아니에요.

A: Is he(Billy) German? (EN) / Ist er (Billy) Deutscher? (DE)

B: No, he is not German. (EN) / Nein, er ist kein Deutscher. (DE)

영어, 독일어 관점에서 보면 대명사를 구분 짓는 것은 이름 뒤에 붙는 조사(particle)를 유심히 살펴야 Billy가 대화에서 지칭하는 주체가 현재 대화에 참여하는 발화자인지 아니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3인칭 대명사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조사 ‘은/는’, ‘이/가’가 다르게 쓰이면 금방 구별해 낼 수 있지만 한국어에서는 ‘주제 중심의 주어’ (Theme/Topic Subject)로서 ‘은/는’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한국어 문장에서 주어를 결정하는 조사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은/는’을 첫째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이 혼돈이 ‘주제 중심 주어’를 나타내는 보조사 ‘은/는’의 공로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어는 맥락을 아주 면밀하게 살펴야 하는 언어라는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한국어 문법 총론에도 등장하지 않는 ‘그녀’는 대체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이화여자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편찬한 유학생을 위한 대학한국어2 읽기·쓰기(2018) 단원 10 문학에서 제시된 소설 두 편을 참고하면 텍스트 안에서 3인칭을 지칭하는 대명사의 쓰임을 비교해 볼 수 있다.


… 나는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식구들을 위해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었다. 앞집 여자-철이 엄마가 내 요리 선생이었다. 그녀는 내가 만든 반찬을 냠냠 간을 보고 나서 식초도 찔끔 쳐 주고, 고춧가루도 솔솔 뿌려 주고 했다. 그네가 너무 맛있어 하면 나는 아낌없이 한 접시 나눠주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빈 접시를 보내는 법 없이 뭐든지 꼭 담아 보냈다. (출처: 박완서, 닮은 방들, 기나긴 하루 ㈜ 문학동네, 2012, 235쪽)


앞집 여자-철이 엄마를 지칭하는 3인칭 표현은 ‘그녀’, ‘그네’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문단이 바뀔 때나 ‘그녀’와 ‘그네’의 지칭보다는 ‘철이 엄마’로 더 많이 쓰인다. 모두 영어로 번역한다고 가정해 보면 Cheol-Hee’s Mom인데 통상 영어권 국가에서는 아이의 엄마라고 해도 ‘누구의 mom’이라는 표현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불러준다거나 대명사 ‘you’, ‘she’처럼 불린다. 마찬가지로 영어권 사람에게 명사로 된 이름을 사용하는 3인칭이 낯선 것처럼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그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말이지 낯설고 이상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언어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상 심리에 기댄 서툰 한국어 표현이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즉 작품에서나 존재하는 종이 인형 같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박완서 작가의 ‘닮은 방들’은 1970년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70년대에 발표된 것인데 여기에서 이미 ‘그녀’를 찾아볼 수 있다. 구어에서 지칭하면 되게 이상한 ‘그녀’ 지만 작품 속에서 ‘그녀’는 매우 자연스러운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국 현대 소설 1900-1950년대까지 가만히 소설을 읽다 보면 ‘그녀’라는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화수분, 배따라기, 운수 좋은 날, 날개와 같은 단편 소설을 찬찬히 보면 ‘그녀’라는 없다. ‘그’라는 표현이 그 남자, 그 여자라는 의미를 모두 갖기도 하며, 통상 이름을 사용한 명사로 처리한다. 그렇게 사용된 경우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동옥은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 한창 유행되었던 중중 때때중 바랑 메고 어디 가나를 부르고 다녔다. 그 사이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보니 동옥의 모습은 전연 기억도 남지 않았다. 동욱의 말에 의하면 지난 법 1·4 후퇴 당시 데리고 왔는데 요새 와서는 짐스러워 후회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남편은 못 넘어왔느냐니까, 뭘 입때 처년데, 했다. (출처: 손창섭, 비 오는 날, 두풍, 한국 단편 베스트20, 1993, 두풍 293쪽)

이 문단에서 동옥은 여성인데 그녀의 남편을 지칭할 때 ‘그의 남편’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대명사 처리를 한 것보다는 대부분 ‘동옥’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쩌다 탄생하게 되었나?

‘그녀’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어로 쓰인 소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언제부터 외국 작품이 번안되어 나타났는가를 확인해 보면 도움이 된다. 현대 소설이라는 것이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장르가 아니라 서구에서 도입된 장르였다. 외국 작품을 번역하면서 자연스레 she/he에 대응되는 단어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이 ‘그’와 ‘그’ 뒤에 ‘-녀’를 붙여서 ‘그녀’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이 서로를 지칭할 때 ‘나만의 그녀’라고 하면 왠지 어색하고 거북하다고 느끼는 것이 틀린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틸하트 she's gone 공식 유튜브 캡처

우리, 코리언의 DNA에서는 ‘그녀’라는 존재가 정말이지 낯설다. 그녀의 탄생은 백 년 남짓인데. 고작 그 시간이 반 만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의 사상을 바꿀 수는 없다. 더구나 ‘그녀’는 작품에서나 존재하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우리는 책을 결코 읽지 않는다. 심지어 소설이라면 완벽히 담을 쌓고 사는 민족이 아니던가.

‘그녀’

떠난 그녀, She’s gone. 찾지 말자 ‘그녀’.


애당초 없었다. 한국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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