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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밍북 Apr 29. 2018

‘포착’, 그 의미가 주는 무거움

Capturing, the meaning of which is heavy

삽화 출처_ 명동예술극장 공식 홈페이지/ 이미지 제작_ 부밍북



…나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회사에 출근했다. 오전 업무를 처리했다. 상사가 아침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점심을 먹었다. 오후도 평소처럼 일을 처리했다. 옆 동료의 타자 소리가 거슬린다. 그는 일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와….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 회사로 찾아왔다. 그는 누구인가…. 알아야 하는가. 나는 동료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시간은 흘렀다. 그렇지만 퇴근 후, 내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쓴 감정. 아, 나는 또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도통 아무것도 포착해 낼 수 없다. 글이 하루를 묘사했다. 누구나 저런 하루쯤은 이제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대면한다. 일상이 어떤 형식을 빌릴 때 형상화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난다. 포착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일상이 입체화되어 형상화될 수 있음은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이고 그 통찰력은 곧 포착이라는 이름으로 귀결된다. 선 순위로서 포착된, 아직 생산되지 않은 일상이 작가의 통찰력을 통해 도출된다. 그것이 일상을 나열하여 글 짓는 것과 또 다름을, 서사세계의 완성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나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우리는 첫 단락의 글에서 단번에 깨닫고 만다. 

  기술 발전이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단지 물리적인 안락함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인간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점점 똑똑해지는 사람들. 뒤돌아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잘 대처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들면서도 똑똑해질수록 더는 슬플 것 없는 성숙을 술잔처럼 받드는 것이 일상이 된 사람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서두가 너무 길다. 

  글쓰기에서 서두가 길면 결론이 좋지 않은 법이다. 오늘 이 감상문의 결론이 벌써 불안정해지는 것 같다. 왜 이렇게 포장하고픈 욕망이 드는 것일까. 나의 솔직한 심정을 대면해야 했다. 이번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을 무대에서 만나고 든 생각을 솔직히 풀어놔야 했다.     

  나는 애석하게도 이미 똑똑해진 사람이었다. 성숙이라는 술잔을 매일 받들었다. 그날 프란츠 카프카의 성은 이미 내게는 과거의 일상이 돼 버린 이야기였다. 토지 측량사 K의 이야기에 나는 가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K, 원래 인생이 그래요. ” 

 

  마을에 도착한 토지 측량사 K.

  K는 기괴한 분위기의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원치 않는 조수가 생겼다. 그리고 프리다와의 욕정이 넘치는 정사로 함께 살게 된다. 연극에서는 정확히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소설에서는 K가 프라다와의 관계를 통해서 성의 높은 분을 만날 창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려져 있다. 그는 끊임없이 성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어떤 연유로 인해서 그 길은 계속 방해를 받고 그는 성에 당도하기는커녕 마을에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의 기묘한 엮임으로, 의심, 분노, 불안, 좌절이 표출된다. 종극에는 K는 극심한 피로를 호소한다. 눈앞에 보이는 성에 당도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성에 다가갈 수 없었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성이라는 말에 극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불안정한 마을 주민들. K의 연인 프리다의 부자연스러운 친절과 사랑을 베풀려는 모습. 정상적으로 행동하다가도 기묘한 사람들의 모습은 ‘성’이라는 단어와 부딪히면서 외부로 드러난다. 기묘한 행동의 패턴과 그 결과물인 병적인 불안증.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성. 서류와 간접적인 메시지로 연결되는 기묘한 파노라마 같은 조직. K는 그 실체에 다가가려는 욕망을 보이지만 계속 좌절된다.     



원본 사진: 성 프로그램 삽입_무대 구성 사진 (이미지 제작 부밍북)


   성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또한, 어떻게 성립되는 존재인가. 끊임없는 물음이 연극을 관람하면서 계속됐다. 문제는 이 질문에 관한 본인의 대답은 꽤 간단하고 명료했다.     

  사람들이 점점 똑똑해진다. 전체 인생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똑똑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과연 커진 욕망의 크기만큼 내부를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성이 성립될만한 전제가 이 지점에 있다. 그렇지만 성의 무게가 짓누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증에 대항하여 성처럼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마음속에 전혀 세워두지 않았을 때의 그 불안함을 견딜만한 정신적 결단력이 그럼 당신에게 있겠는가 하고 반문해 본다면, 똑똑해진 사람들은 그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결국에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만 하품을 하고 말았다. 대 작가의 작품 앞에서 그만 하품이라니.

 아울러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생각났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카프카의 성에서 니체가 떠올랐다.     


  이제 남은 단어는 딱 하나다. ‘포착’ 

  카프카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면 이제 누군가에 의해 평론되었는지 모르는 ‘관료주의’라는 말이 뒤따랐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관료주의’라는 단어가 뒤이어 오면서 시대를 앞서나간 놀라운 통찰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가 작품활동을 한 시기가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다) 관료주의가 풍기는 이미지로 인해서 필자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어휘의 개념 테두리에서 카프카를 생각했다. ‘관료주의’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포착’이라는 단어로서 카프카의 작품을 알고 싶다. 일상은 물처럼 흐른다. 흐르는 물줄기에 몸을 맡겨 흐르는 소립자는 어디로 흘러 들어갈지 모를 불안감을 안고 부유한다. 존재의 일상을 카프카는 건져냈다. 그리고 그것을 포착해냈다. ‘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끊임없이 그 주변에 머물러 안정과 불안의 복잡한 감정 교차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포착을 해내는 것, 바로 작가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상에 많은 K는 결국 그들의 방식으로 성에 당도할 수도 당도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 흐름은 각 K의 몫이다. 그 몫이 세상에 드러나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은 평생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못한 작가 카프카의 눈을 통해서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흐르던 일상을 형상화한 카프카. 그리고 2018년 4월, 책에서 머물던 형상화를 명동예술극장 무대 공간에서 관람하였다. 슬프게도 이미 똑똑해진 본인의 내면이 무대 위 K에게 한낱 '인생은 원래 그런 거예요’라는 냉소적인 목소리로 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더욱 참담한 건 앞으로 더욱 똑똑해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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