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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밍북 Apr 24. 2018

나는 더러워지고 싶다. 한없이

주체할 수 없다. 카.타.르.시.스! 이유는 없어 

작품: 로베르토 쥬코

극작가: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극장: 명동 예술극장, 2016년 9월 


사진 명동예술극장 공식 홈페이지


   욕망. 끝없이 흐르는 욕망. 기괴함. 뜨거운 피. 나는 그 무엇이든 이처럼 극적인 것들을 눈앞에 펼쳐진 광경으로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카. 타. 르. 시. 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라는 극작가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본,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를 통해서였다. 대본을 읽고 느낀 점, 왜 나는 이 대본을 이제 읽었던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상상하면 안 될 법한 욕망의 욕망, 가끔은 꿈속에서나 만날 법한 기괴한 장면의 파노라마, 연극을 관람하면서도 연극 속의 연극처럼 또 무엇인가를 보고 싶다는 착각과 과도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다. 나는 언제 그의 연극을 관람할 수 있겠는가! 대본 말고 극장에서 말이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와 ‘숲에 이르기 직전’을 읽고 궁금함이 일었다. 연출에 관한 궁금한 보다는 과연 배우가 이 욕망의 욕망이 출렁이는 시적 (poetic) 텍스트를 어떻게 연기를 했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유튜브에서 그의 연극을 찾아보았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연극만의 그것, 조명 아래서 빛나는 무중력 상태의 공간, 나는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잠수함 유리창을 통해 부유하는 바다 생물을 보고 바다의 장엄함을 느끼는... 

 

   비로소 연극이 콜테스에 이르러 ‘작가주의’로 회귀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연사의 설명을 듣고서 나는 문득 ‘작가주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곱씹게 됐다. 

실험적, 난해함, 비대중적      

 대충 이러한 코드가 내재돼 있다. 이번에도 그러겠거니. 콜테스의 ‘작가주의’도 그러하겠거니 생각하였다. 드디어 소식이 들려왔다. ‘로베르토 쥬코’라는 콜테스의 작품을 상연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간 보고 싶었던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아니었지만,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작품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 만으로도 연극 관람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날을 기다렸다.     

 

  이것은 영화 크로우의 한 장면인가! 

검은 재가 허공에서 날아다녔다. 나비의 날갯짓보다 더욱 관능적인 죽음의 물결. 조명을 받아서 그 색은 검정에서 회색으로. 회색에서 검정으로 마음껏 음험한 기운을 발사했다.      

 

민음사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책커버 (사진 부밍북)


   세상이라는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야욕을 숨긴 표범 

   생존으로 단련된 근육의 조각이

   마치 세느의 유유한 물결처럼 

   낭만적으로 움직였지만

   그 눈동자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광기 그 자체였다.      


   쥬코가 무대에 등장하였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가 대답한다. 

  I’m murder!      

 

  지금도 선명한, 무대에서 등장한 쥬코의 모습을 나도 그가 썼다던 방식, 시적(poetic)으로 표현해 보았다. 시적인 언어. 시집 속에 활자로 박제된 시적인 대상이 아닌, 무대 위에서 입체적으로 공간을 나부끼는 시적인 텍스트의 움직임. 하지만 내 역량은 부족했다. 그럼에도 나도 쥬코처럼 그렇게 해보고 싶은 욕망을 여기 지면에 풀어본다.

 

  실제 로베르토 쥬코는 체포 직전 경찰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살인자! 

그는 희대의 살인마였다. 사이코패스의 잔인무도한 행위가 매스컴에서 쉽게 흘러나오는 요즘 웬만한 유혈 낭자로는 대중들이 놀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당시 대중들이 접했을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살인의 필요조건으로 여겨졌던 누군가를 향한 원한, 분노, 원망처럼 원초적인 감정이 전제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관점에서 살인을 자행하였다. 

 연극에서는 ‘살인의 광기’처럼 자극적인 것에만 초점을 두고 극이 진행되지 않았다. 이것은 연속극이 아니다. 그리고 상업영화도 아니었다. 바로 비로소 연극이 작가주의에 의해 이뤄지는 작가주의 연극, 로베르토 쥬코였다.      

 

  하류 인생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언어는 거칠다. 어느 계층에도 속하지 않는 외부자들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거친 사람들, 자식에게 살해를 당하는 부모, 범인을 쫓는 형사, 사창가. 이 사이를 마치 가을 갈대를 뛰어다니는 철없는 아이들처럼 쥬코는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쥬코를 통해서 아웃사이더 삶의 익지 않은 비릿함, 매정함, 폭력성을 관객은 여과 없이 목격한다. 

  연극을 관람하고 나면 대체로 나는 확언할 수는 없지만, 꽤 뚜렷한 결론을 내곤 했다. 무대는 어떠했다, 배우의 연기 이런 객관적인 것이 아닌, 극의 구성, 전개, 결론과 같은 주관적인 대상에 관한 나의 자의적 주관성의 객관적인 결론 도출을 말한다. 하지만 콜테스의 연극에서 나는 이런 주관적 대상에 관한 객관적 결론을 내지 못했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선명한 무대 이미지. 섬뜩한 장면, 장면과 장면의 연결. 대부분 시각적인 것들 뿐이었다. 참담한 기분은 무엇일까.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연극을 내가 다시 관람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욕망이 흐르는 시적인 물결, 검은 재와 함께 로베르토 쥬코는 화염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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