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itness death that flows in daily L.
작성: 노운아(盧韻芽)
공연일시: 2016년 8월
공연장소: 국립극장
죽음과 삶이라는 무거운 명제를 대면해야 하는 연극 무대가 솔직히 쉽게 다가올 리 없었다. 더구나 햄릿이라니! 햄릿 대본을 몇 번이나 읽고, 햄릿의 대사들을 차용한 현대극도 관람해 봤고, 심지어 몇 년 전에 명동 예술 극장에서 한 연말 공연 ‘햄릿’을 관람했음에도 불구하고 ‘햄릿, 오 햄릿’은 그저 어려운 문제를 논하는 이야기 또는 복잡한 서사시라는 일종의 정서적 괴리감이 나에게 항상 존재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환상적 사랑 이야기의 ‘한여름 밤의 꿈’을 매우 좋아하며, 비극보다는 희극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더욱 솔직히 고백하자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연극 대본보다 즐겨 읽는다. 따라서 비극, 리어왕, 맥베스, 줄리어스 시저 등은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봐야 하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봤던 것이 사실이었다.
극장으로 들어가는 길.
조금 있으면 나는 무엇을 만날 것인가 하는 기분 좋은 초조함이 몰려왔다. 여름의 국립극장은 신선했고 사람들은 마치 명화 속 한 점처럼 그려진 점 같았다. 쇠라의 점 그리고 모네의 빛. 선명하고 뚜렷한 에너지가 나를 공연장 안으로 인도했다. 그래 봤자 히스테릭한 햄릿이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텅 빈 무대가 홀리는 기류에 나는 들떴다. 그뿐이었다. 그래서 ‘햄릿’이라는 공연 자체에 큰 기대는 없었다. 후반부가 되면 어차피 좀 지루함을 느낄 테니깐. 시작은 그랬다.
사람들은 햄릿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우유부단의 캐릭터라고들 칭하기도 하는데 그 의견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플롯을 보면 햄릿은 나름 치밀하고 계획된 행동과 위장을 통해서 숙부와 그의 어머니를 서서히 압박한다. 그는 필경 세상의 부조리한 면, 인간 본성에 흐르는 나약하고 어두운 면을 보는 예리하고 섬세한 우울 향의 기질, 멜랑콜리가 충분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자연히 상황을 파악할 때 오는 자아도취 적 정취, 깊은 연민과 슬픔이 뒤범벅돼서 그의 행동은 다분히 여성적인 히스테리가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본 햄릿은 그래왔다.
몇 년 전, 정보석 선생님 주연의 ‘햄릿’에서 나는 그러한 점을 느꼈다. 풍만한 거투르투와 비교하여 보면 나약하여 버림받은 아들, 그리고 그 비통함을 친구 호레이쇼에게 토로하며 괴로워했지만 성에서 그의 편은 없었다. 소외로 오는 불안의 정서를 한층 짙게 표출해 오던 햄릿, 내가 봐왔던 햄릿은 그랬다. 그래서 나약한 오필리어를 대신해서 내가 햄릿을 감싸주고 싶다는, 일종의 모성으로 무장된 여성이 되어 보고픈 상상에 빠지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낭만 기질이 가득한 햄릿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햄릿’은 어딘지 달랐다. 그는 의지가 있었다. 그 의지라는 것은 죽음으로 뒤범벅된 스올에서도 생명을 향해 달려가려는 몸짓이었다고 느꼈다. 기본적으로 그도 내가 위에서 기술한 점들, 자아도취 적 낭만의 정취, 비애와 고통이 만들어 낸 히스테리아적 성격은 기본적으로 표출됐다. 하지만 유인촌 선생님의 햄릿은 한 캐릭터가 가진 내면의 ‘착상’과 ‘불안’을 뛰어넘어, 그 안의 확고한 유정 油井, 생명이 있었다. 사나운 운명의 폭풍에 맞서 싸울 결단을 키우려는 듯, 그의 마지막 대사는 전율이었고 장엄하게 열리는 무대의 커튼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경고였다. 관객 모두는 지금까지 관람석이 아닌 무대에 앉아 있었다. 관객 모두는 텅 빈 객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햄릿은 무엇을 향해 경고한 것일까.
나 개인적으로는 그 경고가 마치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이 ‘인간의 마음 (the Heart of Man)’에서 기술한 활기찬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음습한 골짜기, 즉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삶, 그런 것에 일갈하는 것이라 느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 Sein-zum-Tode라고 명기했다. 따라서 햄릿의 포효는 죽음만을 향하는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본 연극을 연출한 손진책 선생님의 연출 의도라고 궁극적으로 생각했다.
아, 지금까지 나는 관객이 아니었구나!
나는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무대의 주체였다. 배우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생각하게끔 했던 것이었다. 교묘했다. 그래서 전율은 깊었다. 전율이라는 것은 과연 이런 것이었다. 타자화된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표상된 연극. 나는 무대를 즐기러 온 관객이 아닌 일상의 죽음을 목격한 주체였다.
와…. 비명이 새어나온다. 그렇다면 나는 삶의 주체자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삶에 휘둘리는 죽은 자로서 살아야 할 인가! 이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리는 항상 괴롭지만, 문제는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중 몇몇이 이 문제를 대면하려고나 할까. 글을 쓴다든가 창작을 업으로 삼지 않는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서만큼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으로 피하려 든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너무 골똘히 생각하면 자칫 사회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다른 의미의 스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햄릿의 작품은 모른 척 해왔던 우리의 내면을 두 시간 동안 ‘목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단연코 눈에 띄는 역할, 그것은 폴로니어스!
Fool, 광대는 셰익스피어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햄릿’에서는 여타 셰익스피어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광대는 없다. 굳이 광대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들자면 연극 속의 연극에서 등장하는 풍자극 배우 역이다. 물론 그들은 광대처럼 현란한 대사는 없다. 다만 과장된 행동에 맞춘 짧은 대사가 전부이다. 하지만 이번 ‘햄릿’에서는 박정자 선생님께서 맡은 폴로니어스가 오묘하게도 Fool을 생각나게끔 했다. 폴로니어스는 지혜와 노련미가 충만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본적인 성격 위에 광대다운 위트와 끼를 조화롭게 매치하여 무거운 캐릭터로 무장된 ‘햄릿’의 극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지루함을 배제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이 전달하려는 무거운 의미를 가볍게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 햄릿, 나의 어려운 햄릿’은 일순간 단순 명료해졌다. 내가 햄릿을 보면서 신나게 웃고 있다니!
마지막으로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더 슬퍼했을 거라면서 절규하던 햄릿의 대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한 달 만에 연인을 갈아치우는 일이 무슨 비난거리라도 될까. 셰익스피어를 읽고 나면 이상하게 사랑이 생각난다. 자연스레 나의 의식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흐른다. 아무튼, 한여름 밤의 생명 범벅의 연극, 햄릿을 만난 건 정말이지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