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향기가 내 주의를 끌었다
공연: 맨 끝줄 소년 (El chico de la última fila)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 (Juan Mayorga)
극장 :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공연일시: 2015년 11월
가끔 어떤 향기가 내 주의를 끌곤 한다. 물론 나의 향기도 누군가에게 깊은 울림이 되리라. 성격을 두고 하는 말이 결단코 아니다. 성격, 정말 피곤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아우라와 성격을 혼동할 뿐만 아니라 더욱 참담한 것은 대부분은 아우라는 보지 못한다. 일평생 성격이라는 근거로 타인의 향기를 맡으려고 애써 밤의 불나방처럼 날아다니는 한낱 그런 존재리라. 불나방이 향기를 알 수 있으랴. 인생에서 슬픔이 슬픔을 슬퍼한다.
슬픔은 사람을 관조한다. 슬픔이 순수하게 슬픔에 젖을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고통의 감정에 관통당하기 때문에 순수한 슬픔이 그들에게 피어날 리 만무하다. 슬픔은 어디서든 슬프지만, 고통은 오롯이 사람에서 피어나는 사람의 몫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눈이 하나 더 있었다면. 우리는 다 볼 수 있었을 텐데. 슬픔을 슬퍼하고 기쁨을 기뻐하는 주체성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인생은 고통의 여정이라는 말로 결국 인내와 참선이라는 명제로 승화시켜버리는 이상 심리가 고통을 이겨낸 결과로 존경받는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든다. 눈, 하나 더 필요한 눈은 왜 없는 걸까. ‘맨 끝줄 소년’을 관람하고 부슬비 내리던 서초동 대로변에서 든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문학과 언어를 가르치는 헤르만은 학생들의 작문을 채점하며 절망한다. 학생의 작문 실력, 언어 구사 능력도 문제였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는 학생의 작문을 채점하면서 한 학생의 작문을 읽는다. 그는 그 학생의 작문에 끌리면서 아내 후아나와 이야기를 한다. 작문을 낸 학생은 문학 수업 시간에 항상 맨 끝줄에 앉아 있던 학생 클라우디오였다. 그는 작문의 맨 마지막에 (계속)이라고 썼고 이렇게 글은 계속된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가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작문을 지도한다. 이야기의 중심 플롯은 이렇다. 그렇지만 이 극은 클라우디오가 써 내려간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극 속을 헤엄쳐 다닌다.
나는 이 작품이 남미 소설가들이 20세기 중반에 펼친 환상적 리얼리즘을 연상케 했고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 (마리오 바르야스 요가 작)의 구성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관람을 하면서도 (또는 대본을 읽는 동안에도) 어느 부분이 클라우디오가 쓴 이야기고 어느 부분이 작품의 현실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이러한 점이 이 연극이 관객의 상상력을 더욱 높은 차원의 상상력으로 이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상상력을 통해 관객은 생각한다. 철학을 수학한 후안 마요르가가 철학 하는 연극을 선보이는 이유라고 작가 소개란에 표기돼 있다. 그의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가끔 상상하는 것 자체를 공상이라고 격하하여 상상을 깎아내리려 하는 분위기를 경험해 본 나는 (꽤 슬픈 기억이었다. 소설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한 이상한 통제?) 상상과 공상에 대해서 고민을 해 봤다. 공상이라는 것이 인생과 철학 없이 표출되어 재미와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상상과 공상을 엄격히 제어하려는 제 3자의 이상한 지도편달은 이해할 수 있다. (대의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겠다. 상상과 관련하여 누군가의 통제와 지도편달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됨이 본인 개인적 입장이다. 공상이든 어떠하랴.) 그렇지만 이번 ‘맨 끝줄 소년’에서 관객의 상상을 예술의 경지로 격상하는 것이 결국 작가가 만들어 놓은 ‘생각하도록 하는 상상’ 즉, 철학 하는 연극이라는 점이 이 극이 근래 보기 드문 명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작가에게 시선을 돌리면 작가도 상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정확성, 갈등에서 출발하여 인생과 재미를 확보하는 것이 근간이 된 상상력을 함양했을 것이라는 본인의 추리를 해 본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클라우디오는 작품을 쓰고 헤르만은 이것에 대해서 관점이 어떠하다, 문장의 품사는 어떠하다, 갈등이 부족하다 등 여러 지도를 한다. 클라우디오의 글은 학교 친구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고 그 친구 집의 가족을 관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이야기 속에는 라파의 엄마 에스테르가 등장하는데, 클라우디오는 그녀를 묘사함에 그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것들이었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글에 감격하며 아내 후아나에게 읽어 주지만 그녀는 클라우디오의 글을 통해서 그의 아우라를 금방 알아차린다. 아우라를 알아차린다는 표현은 나의 개인적인 표현이다. 그녀는 클라우디오의 내면을 냉정하게 분석한다. 그렇지만 헤르만은 후아나의 이야기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클라우디오의 글쓰기 지도에 매진한다.
그렇지만 천성적으로 사람의 아우라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의 눈은 매서운 법이리라. 어느 순간부터 후아나는 클라우디오의 작품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덜 애들 같아지고 그가 아주 글을 많이 쓴다고 느꼈다.
그녀는 남편 헤르만에게 클라우디오의 이야기는 끝이 좋지 않을 것이고 결국 모두가 상처를 입고 만다고 거듭 경고한다. 사실 아내는 미술 작가이다. 갤러리 소장은 그녀에게 한 달 안에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치우라는 통보를 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어필할 만한 예술에 냉담하다. 그런데 예술의 한 선상에 있는 문학을 가르치는 남편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강조하는 예술관에 어떤 동의와 위안을 받지 못한다. 헤르만은 후아나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아내와의 대화에서는 평범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글솜씨를 통해 문학이 줄 수 있는 어떤 만족과 기대 이상의 긍정적인 것에만 빠져든다. 그는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문학과 언어를 가르치고 한 단편만 보는 즉, 문학의 성격만을 보는 인물이었다. 우리 대부분이 저러하다. 슬픔이 이때부터 피어오른다.
그렇지만 후아나는 달랐다. 클라우디오가 또래와는 다른 감수성이 싫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이야기의 초점이 점점 그녀에게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가 어쩐지 불안하게 전개될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그녀가 눈을 하나 더 가진 예술적 경지의 인간이며 그녀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우라를 보는 선천적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클라우디오가 얼마나 슬픔에 가득 찬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클라우디오는 보지 않고도 사람을 깊게 보는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의 향기를 깊게 맡으리라. 극 끝에 클라우디오는 후아나를 그녀의 집에서 만난다.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아우라가 아우라를 끈다.
성격에 끌린다. 이 말, 나는 오늘부터 부정한다.
차라리 당신의 몸에 당긴다. 이 말은 오늘부터 철석같이 믿겠다.
사람을 바라본다. 누군가의 깊은 우물에 고인 아우라에서 피어나는 느낌과 향기를 본다. 클라우디오를 바라보는 후아나는 슬프다. 이런 후아나를 깊게 보는 클라우디오는 슬프다. 그렇지만 잘못된 이야기의 끝으로 상처를 받을 헤르만, 헤르만은 성격으로만 대상을 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고통이 관통한다. 슬픔과 고통이 이렇게 교차한다. 결국,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따귀를 때리며 극은 끝난다.
클라우디오의 깊은 눈망울을 표현한 남자 주인공 배우의 연기, 사람의 목소리 허밍으로 음향을 구성한 무대, 이야기와 공간을 넘나드는 무대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자의 슬픔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표면으로 대상의 속성을 전체라고 결론짓는 우매함을 지을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한다.
죽을 때까지….
따라서 우매한 본인은 이렇게 연극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고 결국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이 눈 하나 더 가지지 못한 자의 열등감이 아닐까. 그렇지만 내게 진짜 예술가처럼 눈 하나가 더 주어졌더라도, 내가 이제 맡을 수 있는 누군가의 아우라가 존재는 할까 하는 의구심이 피어난다. 이 순간 정말 슬픔이 슬픔을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