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해 이사금과 화령 부인에게는 혼인한 지 20년이 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갖가지 비법을 다 써보아도 소용이 없자, 첨해는 실직국 가리촌에 산다는 예언자 발천을 불러 물었다.
“앞일을 내다보는 네 능력이 뛰어나 소문이 예까지 났구나. 발천아, 우리 부부를 도와다오. 왕비가 아이를 잉태하려면 무슨 수를 써야 하느냐?”
발천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궁궐 정원에 제단을 만드시고 밤마다 달을 향해 제사를 올리십시오. 제단에는 매일 새로 떠온 달못의 물을 올리시고, 제사가 끝나면 화령 부인께서 그 물을 드셔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낙담하지 마시고 정성을 다하시면 기다리시는 소식이 올 것이옵니다.”
이사금 부부는 예언자 발천이 말해 준 대로 궁궐 정원에 제단을 꾸몄다. 화령 부인이 매일 밤 정성을 다해 직접 제사를 올리고, 제사가 끝나면 매일 새로 떠 온 달못의 물을 마셨다. 100일이 넘어가니 초조함과 근심이 사라져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300일이 넘어가자 마침내 아기를 갖게 되었다.
화령 부인은 여름도 다 지난 어느 초가을 밤, 달빛이 환히 비쳐드는 방에서 어여쁜 공주를 낳았다. 이사금 부부는 공주의 이름을 아로라 짓고, 온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키웠다. 부부에게 아로는 자신들의 목숨과 온 세상을 다 합친다 해도 맞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이사금 부부는 아로가 어릴 때부터 최고의 남편감을 구하기 위해 사로국의 귀족 자녀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삼한에서는 공주가 왕위를 이을 수 없었기에, 덕망 있는 귀족과 혼인시켜 그 남편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해야 했다. 아로가 모든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며, 더 넓은 세상을 갖도록 해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훌륭한 덕을 지닌 배필과 맺어주어야만 했다.
첨해는 아로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서불한 해례의 아들 길선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었다. 길선은 아로보다 두 살 위였는데, 어린 아이임에도 외모가 남달리 출중하고 생각이 영특했으며 무예에도 재능이 있었다. 길선이 백성을 아낄 줄 아는 해례의 인품까지 물려받았다면 공주의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을 터였다. 게다가 서불한 가문이 사로국의 첫 임금인 거서간의 후손인 것과 사로국 최고의 부자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서불한 가문에는 언제나 귀한 구슬과 유리가 넘쳐났고, 먼 북방에서 들여온 말과 수레에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장식이 달려있었다.
그런데 길선이 나이가 차고 제법 어른 흉내를 내게 되자, 차츰 얕은 품성과 거친 행동거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화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 그런 성품으론 어진 왕이 될 수 없음은 물론, 아로와 평생을 함께 하도록 허락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첨해와 화령의 고민은 깊어졌다.
첨해는 삼촌인 죽현을 떠올려보았다. 죽현의 본래 이름은 미추인데, 소국 정벌에 큰 공을 세운 구도의 아들이었다.
구도는 사로국의 대장군이자 진한의 영웅이었다. 평생 전투를 치루며 진한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웠으나 미추의 나이 열두 살 때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어머니인 술예 부인마저 삼년 후 병으로 세상을 등지자, 미추는 열여섯 살에 혼자가 되었다.
미추는 아버지 구도를 닮아 무예가 출중했고 검소하였으며 자애로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을 여의자 그때까지 살고 있던 크고 호화로운 집을 팔아 귀금속으로 바꾸었다. 그리곤 노비들을 불러 모아 조금씩 나누어 준 후,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나도록 해주었다. 미추 자신은 남아있던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평범한 백성들처럼 귀틀집을 지어 살았다. 그는 혼인도 하지 않았으며, 나랏일에는 뜻이 없었다. 이 고을 저 고을 다니며 삼한의 산천을 구경하고 돌아와선 소민들을 모아놓고 세상 이야기 들려주길 좋아하였다.
그런 미추를 사로국의 귀족들과 백성들이 모두 존경하고 따랐다. 그가 사는 집 둘레에는 대나무 숲이 보기 좋게 둘러쳐져 있었는데, 미추의 곧고 귀한 인품이 마치 그 대나무와 꼭 닮았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죽현’이라고 불렀다.
첨해는 죽현의 큰누이 옥모 부인의 아들로 죽현의 조카였다. 하지만 나이는 죽현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누가 보아도 죽현은 분명 나라를 이끌 재목이었다. 첨해는 죽현과 아로를 혼인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첨해와 같은 부족 출신인 화령 부인의 마음에는 애초부터 죽현이 없었다. 화령은 부족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여 늘 다른 부족을 경계하였다. 중요한 직책도 동족에게만 맡기도록 나랏일에 일일이 간섭하였다. 첨해는 화령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던 첨해는 어느 날 화령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부인, 길선의 성품이 저리 거칠고 경박한데 아로와 맺어줄 수는 없소. 그래서 말인데……”
첨해는 잠시 뜸을 들였다.
“죽현 말고는 새 후계자가 떠오르질 않는구려. 둘을 결혼시키면 어떻겠소?”
첨해의 말에 화령은 두 눈이 동그래지며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안 됩니다! 죽현에게 왕위를 준다면 우리 부족은 영영 왕권을 되찾지 못할 지도 몰라요! 죽현의 부족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잘 아시잖아요?”
“그럼 어쩐단 말이오? 길선의 그 거칠고 교활한 성품으론 이사금이 될 수 없소. 내년이면 아로도 열여섯입니다. 혼처를 정해야 하는데 후계자가 될 만한 가문의 사내들은 모두 혼인을 했거나 뛰어다니며 노는 철부지들뿐이니…….”
첨해는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인품이 부족한 자와 혼인을 시켰다간 왕위는 물거품이 될 게요. 왕족과 귀족들이 다른 후계자를 물색할 것이 틀림없소. 죽현 숙부 말고는 아무도 떠오르질 않는구려. 올해 추수가 끝나면 혼사를 치러야겠소.”
그 말을 들은 화령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쏘아붙였다.
“공주는 왜 왕이 되면 안 되죠?”
화령의 말에 화들짝 놀란 첨해가 고개를 들었다. 화령은 두 손을 떨고 있었지만 눈빛은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듯 이글거렸다.
“지금껏 공주가 왕이 된 적은 없었소.”
첨해도 누가 들을세라 한껏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화령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하면 되지요. 아로가 훌륭한 이사금이 되기만 한다면, 백성들에게 여자 이사금이란 사실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백성들은 남자 이사금을 대할 때와 똑같이 여왕을 받들고 사랑하게 될 거예요.”
화령의 말은 그럴 듯했다. 첨해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달빛의 힘으로 태어난 아이. 그 아이는 세상 그 어떤 사내보다 사로국을 잘 다스리고, 진한을 더 강하게 통합시켜 줄 것만 같았다. 역대 왕들은 모두 특별하게 탄생했고 하늘이 보낸 이들이었다. 아로 역시 특별하게 탄생했고 하늘이 보낸 아이였다. 여자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문제 삼겠지만, 첨해는 자신만 굳게 마음먹는다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첨해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화령은 기쁨에 찬 얼굴로 첨해의 두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