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사로국의 소도인 부리마을에는 밤마다 검은 그림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그림자들은 외인들의 것이었다. 삼한이 살기 좋다는 소문에 그동안 먼 북방과 바다 건너 왜국에서는 유민들이 종종 이주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부리마을에 들어온 이 외인들은 보통의 유민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가진 것 없이도 진한에 편히 정착하게 해 준다는 누군가의 약속을 믿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 약속을 조건으로 먼저 해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칠 때까지 부리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되었다.
외인들은 부리산을 마주 보는 언덕 위의 커다란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 저택은 이사금의 별궁이었다. 부리마을의 소민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외인들이 숨어 지내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밤마다 검은 그림자들의 행렬은 끝없이 별궁으로 이어졌지만, 별궁의 겉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밤낮 고요하기만 했다.
석 달이 지나자 외인들의 수는 거의 천 명에 이르렀다. 외인들은 낮에 잠을 자고 밤이면 깨어나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 매일 밤 천 개의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대문을 빠져나갔다. 장정의 그림자도 있었고, 여인의 그림자도 있었다. 노인의 그림자도 있었고, 소년, 소녀의 그림자도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대나무를 깎아 만든 창과 흙을 팔 수 있는 곡괭이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별궁 담장을 돌아서 산길로 마을을 빠져나간 후, 마을 밖 들판을 통과해 빠른 걸음으로 부리산을 향했다. 하급 무관 한 명과 예닐곱의 부하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부리산 중턱에 있는 달못에 도착하면, 그들은 곡괭이로 흙을 파서 쌓았다. 무덤 모양을 한 흙더미가 숲 속 여기저기에 생겨났다. 그러다 달이 기우는 시간이 되면, 숲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달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이런 날들은 한 달이나 계속되었다.
한편, 궁궐에서는 첨해와 화령이 이제나 저제나 부리마을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불한이 몸 져 눕더니 혼인을 서두르자고 보채는구려. 부리마을에서 빨리 소식이 와야 할 텐데.”
첨해가 불안한 듯 방을 서성이며 말했다.
“부리산의 일이 마무리되면 새 이사금 즉위식을 서둘러야 합니다. 혼인한 후에는 왕위를 가져올 수 없을 거예요. 귀족들이 그냥 두고 보진 않을 테니까요. 왕이 된 후에 이웃 소국의 왕자들 중에서 사윗감을 고르면 돼요.”
화령의 얼굴에는 불안과 미소가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서불한이 노여워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는구려. 세력이 큰 사람이니 서불한의 생각에 따라 움직일 귀족들이 많을 것이오.”
“서불한은 곧 죽습니다. 방자하고 오만한 길선을 따를 사람은 없을 테니 염려마세요.”
화령의 말에 첨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더니 뜻 모를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