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왕좌를 지키기 위해

by 분촌

도후는 거의 이틀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좋은 말이 있다고 해도 늙은 발천에게는 쉬운 여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도후는 발천을 곧장 첨해의 방으로 이끌었다. 첨해가 반갑게 발천을 맞으며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의자로 데려가 앉게 했다.

“그대도 많이 늙었구나.”

“이사금 마마께서는 어찌 이리 쇠약해 보이십니까?”

발천이 가여운 눈길로 첨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라가 이리 어려우니, 아무리 새 이사금을 세워두었다 한들 내 속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왕비는 떠났고, 아로는 아직 어리고, 나라는 어지럽네. 내가 어찌해야 좋겠는가? 제발 방법을 말해 주게.”

첨해의 간절한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발천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이사금께 아룁니다. 이 나라 백성들의 생명은 달님의 생명과 이어져있사옵니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되듯, 달님과 조선의 후예들은 달빛으로 연결되어 있사옵니다. 그런 달님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계시니, 나라의 기운이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마한과 변한은 진한처럼 어렵지 않다고 들었다. 진한만 고통을 겪는 이유를 자네는 알고 있겠지?”

첨해는 발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발천이 첨해의 눈을 바라보자, 첨해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알고 있지요. 이사금께서도 그 이유를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발천이 말하자, 첨해는 괴로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탁자에 기댔다.

“아로의 힘이 굳건해지면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릴 생각이네. 이 모든 벌은 죽은 후에라도 내가 다 받을 것이네.”

첨해는 고개를 들고 다시 발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니 자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주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오나,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하옵니다.”

“무엇이든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기 하나를 달못에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러면 달님의 생명력이 조금은 회복될 수도 있사옵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백성들에게도 금방 효과가 나타날 것이옵니다.”

“아기를?”

첨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단, 조건이 있사옵니다. 일 년 전, 달님이 묻힌 날에 태어난 아기를 찾아, 산 채로 바쳐야 하옵니다. 그 방법이 아니면 소용이 없을 것이옵니다.”

첨해의 눈은 더 커지고, 낯빛은 몹시 어두워졌다.

“살아있는 아기를 바치란 말이냐? 꼭 그래야만 하느냐?”

“달님이 묻힌 날은 달님의 생명력이 사라진 날이옵니다. 달님의 생명력이 사라지던 날 태어난 아기들은, 대부분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옵니다. 허나, 분명 돌을 넘기고 살아남은 아기들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 아기들의 생명력은 평범하지가 않아서, 장차 성장하여 진한에 큰 공을 세울 것이옵니다. 그만한 생명력이어야 달님께 효험이 미칠 것이니, 숨이 없는 제물은 아무 소용이 없사옵니다.”

첨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리 진한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 산 제물을 법으로 금지해왔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방도가 없사옵니다.”

발천이 물러간 후, 첨해의 시름은 더욱 깊어져 급기야 자리에 눕고 말았다. 백성을 보살펴야 할 왕이 달을 해하여 백성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하여 죄 없는 아기를 죽여야 한다니,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니, 첨해는 절망스러웠다.

첨해가 며칠 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아로가 첨해에게 물었다.

“아버님, 말씀을 해주세요. 발천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왜 발천이 다녀간 뒤로 이렇게 괴로워하시는 것입니까?”

첨해의 얼굴은 며칠 사이 까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그동안 첨해는 무척 쇠약해진 자신을 보며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죽기 전에 모든 걸 아로에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아로의 왕권이 튼튼해지면 달을 풀어준 후, 자신의 죄를 아로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첨해가 원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첨해는 오늘 밤 아로에게 모든 걸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아로야, 나와 네 어머니는 너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큰 죄를 저질렀다. 진한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다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이란다. 발천에게 해결 방법을 물었더니, 또 다른 죄로 덮어야만 한다는구나.”

첨해는 몹시 어렵게 아로를 낳은 일과 아로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달을 묻은 일, 발천이 말한 제물 이야기까지 모든 것을 아로에게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에 아로는 이따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하고 말없이 흐느끼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로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왕위를 공주인 저에게 물려주시기 위해 부모님께서 그토록 큰 고초를 겪으시다니요! 이 못난 아로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로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자신의 두 손으로 첨해의 한 손을 감싸 쥐었다.

“아로야, 산 제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어린 생명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첨해의 말에 아로는 입술을 꼭 깨물며 아버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아버님, 이 여식 비록 어리지만, 이 나라의 어엿한 이사금입니다. 더는 아버님께서 이 일로 근심하시지 않도록 답을 찾아내겠습니다. 아버님의 딸, 저, 아로가 이 나라를 고난에서 건져내겠습니다.”

첨해와 헤어져 자신의 방으로 돌아 온 아로는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발천은 산 제물 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했는데. 진한의 수많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어린 생명 하나를 희생시키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될까?’

아로는 고개를 저었다.

‘발천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잖아. 아버님은 너무 인자하셔서 그리 하지 못하시는 거야. 아버님과 백성들 몰래 한다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어?’

아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느꼈다. 자신을 위해 부모님이 저지른 일은 실로 엄청난 죄악임을 아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로는 부모님의 희생을 허망한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왜 지금 네 곁에 없지, 아로?’

아로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했다.

‘바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지. 나를 이사금으로 만들어주시려고 달을 묻으신 내 어머니. 달을 풀어주면 나는 왕위를 잃어버리게 될 거야. 가엾은 내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순 없어!’

아로의 얼굴에선 굳은 결심이 묻어났다. 아로는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길선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죽현처럼 올곧은 이의 충언이 아니라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교활한 자의 욕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로는 더 망설이지 않고 서리에게 길선을 불러오라 명하였다.

저녁이 다 되어 길선이 도착하자, 아로는 준비해 둔 음식과 술을 내놓았다.

“아찬, 이제 나랏일에 제법 손이 익으셨지요?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품계를 잠시 낮춘 건 아버님의 뜻이었습니다. 더욱 큰 재목을 만들기 위해선 그리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이사금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이사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랏일에 어두워서는 안 되니 말입니다. 이제 자잘한 일들에는 눈이 밝으실 터이니, 곧 서불한의 품계를 받아 더 큰 일을 맡으셔야지요. 그래야 저와 혼인할 구색이 맞추어질 것이 아닙니까?”

말을 마친 아로는 귀한 약초 술을 길선의 잔에 따라 주었다. 길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길선이 술을 들이켠 후 빈 술잔을 내려놓자, 아로는 다시 술을 따라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님께서 몹시 편찮으신 것을 알고 계시지요? 나라가 태평하고 저의 왕좌가 안정이 된 후 저희를 혼인시키려 하셨는데, 나라 상황이 점점 나빠지니 아버님께서는 모든 희망을 잃으셨습니다.”

아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께서는 예언자 발천을 불러 해결 방법을 물으셨습니다. 진한을 다시 살리려면, 살아있는 아기를 달못에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하는군요. 하늘의 노여움이 너무 커서, 여자 군주만으로는 진한을 되살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저는 제물을 바치고 진한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아찬과 혼인을 한 후 왕위를 아찬께 드릴 것입니다. 저는 왕위 따위에는 본래부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답니다. 달님을 대신하여 어쩔 수 없이 이사금이 된 것일 뿐이니까요.”

아로의 말에 길선은 흡족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이사금 마마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까? 무엇이든 이야기 하시지요. 마마의 일이 곧 저의 일인데, 제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로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길선을 바라보았다. 길선은 매우 기분이 좋아 어금니가 다 드러나도록 웃고 있었다. 아로는 길선에게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