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여왕의 탄생

by 분촌

“마마, 흙비가 쏟아집니다!”

방 밖에서 한 시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고했다. 첨해가 창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히자, 거친 비바람이 방안으로 몰아쳤다. 첨해의 얼굴과 흰 옷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을 본 화령이 비명을 질렀다.

“악!”

화령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흙비는 사흘 밤낮 쉴 새 없이 내렸고, 온 나라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쓰러진 화령은 기운을 되찾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화령은 잠들기만 하면 악몽을 꾸었고, 눈을 뜨면 수시로 밀려오는 공포에 입술이 하얗게 타들어갔다. 근심에 찬 첨해에게 화령은 매일 똑같은 꿈을 꾼다고 말했다.

“사로의 비옥한 땅이 모두 하얗게 마르고 갈라져 있어요. 그러다 세상이 어두워져 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집 속에서 달님이 수도 없이 날아드는 창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거예요. 달님이 흘린 피가 달집을 붉게 물들이고 사로국으로 쏟아져요. 백성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울부짖어요. 전 너무 무섭지만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잠에서 깬 후에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화령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첨해는 화령의 어깨를 안아주며 말했다.

“나도 그날 이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소. 달님을 해치다니 아무래도 우리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요. 부인, 지금이라도 모든 걸 되돌려 놓아야겠소.”

그러자 화령은 정신이 번쩍 든 듯 울음을 그치고 외쳤다.

“안 됩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어요. 우린 달님을 잠시만 가둬둔 것일 뿐이에요. 아로가 새 이사금이 되고, 왕권이 안정될 때까진 달님을 그대로 두세요. 달님은 다시 풀어드리면 되지만, 아로에겐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아요!”

화령은 곧장 시녀 서리를 불렀다. 그러자 스무 살 남짓의 시녀가 들어와 화령의 침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서리는 희고 고운 얼굴에 여느 시녀들보다 값진 옷감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예언자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

“예, 마마, 오늘 중으로 궁에 들어올 것이옵니다.”

서리가 대답했다. 화령은 안도한 듯 눈을 감고 다시 몸을 뉘였다. 첨해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날 오후, 도후를 따라 초라한 행색을 한 예언자 하나가 궁궐 마당에 들어섰다. 예언자는 두 눈을 감고 있었고, 오른손에 잡은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걸었다. 그러나 그는 가짜 예언자였다. 눈이 먼 것도 거짓이었다.

서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도후와 서리는 남매로서 본래 노예의 자식들이었다. 평범한 소민이던 아버지가 남의 물건을 훔쳐 노예가 되었는데, 처자식을 데리고 도망치다 부모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주인은 겨우 일곱 살과 다섯 살이던 남매를 도로 끌고 와 저잣거리에 세워두고 팔려고 하였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화령 부인이 두 아이들을 거두어 궁에서 키워주었다. 그 이후 남매는 화령 부인을 하늘처럼 여겨 화령 부인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절대 복종하였다. 화령 부인에게서 내려 온 명령은 언제나 서리를 거쳐 도후에게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가짜 예언자를 구해 오는 일은 화령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달을 묻은 천 명의 외인들을 모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외인들을 모으는 데 필요한 것은 금은보화 한 자루면 되었다. 도후는 사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진한으로 이주할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주민 스무 명에 옥구슬 하나씩을 상으로 내걸었고, 이주한 사람들에게도 먹고 살 것을 마련해 준다고 약속하였다. 대신 삶이 곤궁하면서 무기를 쓸 수 없는 사람들을 모으게 했다. 배가 고프면 말을 잘 들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고, 무기를 쓸 수 없어야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은 장사보다 쉬운 돈벌이를 위해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사람들을 모아 보내주었다.

가짜 예언자는 서리를 따라 부리방으로 들어갔다. 부리방은 나랏일을 의논하는 회의실이었다. 부리방 앞쪽에는 첨해 이사금이 앉아 있었고, 방 좌우로는 17관등의 왕족과 귀족들이 첨해를 향해 서 있었다.

예언자는 지팡이로 바닥을 더듬으며 열일곱 명의 대등들이 서 있는 부리방 가운데로 나아갔다. 예언자는 걸음을 멈추자 곧장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첨해가 물었다.

“북방의 옛 조선 땅에서 온 불눈이라 하옵니다.”

예언자 불눈이 머리를 더욱 낮게 숙이며 대답했다.

“듣자 하니 너보다 밝게 보는 자가 없다지? 자, 말해 보아라. 달님에 대해서는 너도 이야기를 들었겠지. 달님이 형벌을 받으시는 동안 우리가 화를 입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느냐?”

그러자 불눈은 기다렸다는 듯 술술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모두 연습한 대로 읊어대는 말이었다. 나라 상황에 대한 귀족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여자 군주를 세우는 데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도록 화령이 미리 꾸며 놓은 거짓 예언이었다.

불눈이 거짓 해결책을 일러주고 물러난 후, 첨해와 열일곱의 대등들은 회의를 했다. 결론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지만, 귀족들은 여자 군주를 세우는 데 선뜻 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긴 시간의 회의 끝에 마침내 아로는 새 이사금에 추대되었다. 달이 묻힌 지 한 달 만이었다.

닷새 후, 첨해는 사로국의 모든 왕족들과 귀족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을 궁궐 앞 광장인 사로벌에 모이게 한 후 이렇게 천명하였다.

“달님은 하늘의 어머니시다. 이제 달님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 이 진한의 사로국 부리산에 갇힌 몸이 되셨으니, 삼한의 백성들은 어머니를 잃었다. 나 첨해와 사로의 대등들은 조선의 후예 가운데 제일가는 예언자‘불눈’을 불러들여 해결책을 묻고, 긴 시간 생각을 나누었다. 불눈이 이르길, 하늘에서 태양의 기운만 남고 달님의 기운이 사라졌으니 이는 아버지만 있고 어머니가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따라서 여자 군주로 하여금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고 예전의 평강을 빌게 하라 충언하였다. 이에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우리는 하늘의 어머니 대신, 어머니의 몸을 가진 여자 군주를 세워 어머니의 기운을 채울 것이다. 우리 사로국에는 달님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공주, 아로가 있다. 우리 사로의 모든 대등들이 한마음으로 아로를 새 군주로 추대 하였으니, 이는 달님을 대신할 어머니로서 가장 알맞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 이사금 아로는 하루빨리 달님을 다시 모시도록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며, 그날까지 나라의 어머니로서 몸과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열흘 뒤, 아로는 열다섯의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고 새 이사금이 되었다. 아로는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 첨해가 시킨 대로 길선에게 아찬의 품계를 내렸다. 그리고 죽현에게는 서불한의 품계를 주었다.

길선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는 대아찬이었고, 이제 아찬으로 강등되었다. 서불한이었던 아버지의 자리는 뜻밖에도 죽현에게 돌아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불한에 오른 후 아로와 혼인하게 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터에 오히려 품계가 내려간 것이다. 아찬은 왕족의 품계가 아니었다. 이는 곧 아로와의 혼사가 끊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첨해의 속셈을 눈치 챈 길선은 배신감과 분노를 삼키며 남몰래 이를 갈았다.

화령의 병세는 하루하루 눈에 띄게 나빠졌다.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해다 써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달이 묻힌 지 넉 달이 지난 어느 가을 밤, 화령은 서리에게 창을 열게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달이 없어 칠흑 같았다. 화령은 머리맡에서 자신을 돌보고 있는 서리에게 말했다.

“서리야, 나는 평생토록 너와 도후를 자식처럼 여겼다. 너희가 아로를 동생처럼 아낀다는 것을 안다. 아로를 지켜다오. 아로의 형이 되어 아로를 보살펴 다오.”

서리는 고개를 끄덕여보이곤 화령의 머리맡에서 숨죽여 울었다.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던 첨해는 화령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첨해는 아로와 죽현, 도후를 불러 들였다. 친족들과 대등들도 급히 궁궐로 모여들었다.

화령은 삼경이 넘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로를 바라보던 화령의 움푹 팬 눈은 눈물에 젖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