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아로는 길선에게 서불한의 품계를 내렸다. 길선은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고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자, 제물이 될 아기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길선은 신이 났다. 하루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빨리 제물을 구해야 빨리 아로와 혼인을 할 수 있고, 빨리 혼인을 해야 빨리 이사금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길선은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는 곧장 자신의 무사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말을 타고 가며 길선은 요리조리 머리를 굴렸다.
‘이제야 내 것을 모두 되찾는구나. 공주가 왕이라니! 흥! 왕이 될 몸은 처음부터 나, 길선이었어.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뜻을 이루어야 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길선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지나가는 이들 중 누군가가 아기를 안고 있으면 놓치지 않고 섬뜩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아기를 바라보는 길선의 눈빛은 교활했고, 눈동자는 팽이처럼 재빠르게 돌아갔다.
어느 마을을 지나갈 때였다. 그곳은 길목마다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하는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그리고 열 집 중 한 곳은 담장 너머 집 안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길선은 무사에게 마을의 상황을 살펴보고 오라 명하였다.
잠시 후 돌아온 무사가 말했다.
“이 년 째 흉년이 심하게 들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길선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금부터 너는 두 살이 된 아기들이 있는지 샅샅이 찾아보아라. 꼭 두 살이 아니어도 되니, 두 살 쯤 되어 보이면 된다.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없다. 부모가 다 죽고 없으면 그냥 데려오고 부모가 있으면 부모도 함께 데려오너라. 해가 지면 저기 보이는 주막에서 만나기로 하자.”
길선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허름한 주막을 가리켰다.
“나는 여기서부터 산기슭 쪽으로 갈 테니, 너는 하천 쪽을 향해 가보아라.”
무사가 인사를 올린 후 먼저 떠나자, 길선도 말을 타고 혼자서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산기슭에 외딴집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다. 길선은 그곳으로 말을 몰았다. 외딴집 앞에 이르니, 사람이 사는 흔적은 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 아무도 없소?”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길선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기의 보채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리는 듯 했다. 길선은 귀가 번쩍 뜨였다. 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짧은 울음소리가 또 한 번 들리는 것이었다.
길선은 단숨에 마당을 가로질러 문을 벌컥 열었다. 아궁이에는 불씨가 꺼져 집안에는 냉기가 돌았다. 방과 방을 잇는 사잇문 틈으로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애처로운 아기의 칭얼거림이 들려왔다.
길선은 그 방을 향해 걸어갔다. 젊은 여인과 남자아기 하나가 누워있었다. 여인은 이미 숨을 거둔 지 며칠은 되어 보였다. 길선은 아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마를 굶은 것인지 앙상하게 마른 아기는 울 힘도 없어 겨우겨우 외마디로 울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기의 골격을 살펴보니 첫 돌은 넘은 듯 보였다.
“쯧쯔......”
길선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쌀쌀한 표정에는 인정머리라곤 없었다. 길선은 아기를 안아 올리더니 죽은 여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내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네 아기는 어차피 굶어죽을 목숨이 아니냐?”
그러더니 이번에는 아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굶어죽느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길선은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와 말에 올랐다. 그리고 곧장 부하와 만나기로 한 주막을 향했다.
주막에 도착한 길선은 방 하나를 얻어 아기를 뉘이고, 주모에게 아기가 먹을 미음을 끓여 오도록 했다. 주모가 아기에게 미음을 먹이는 동안 해가 넘어갔고, 무사가 돌아왔다. 무사는 빈손이었다.
“아이들은 많았지만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길선은 상관없다는 듯 다른 명령을 내렸다.
“먹을 것이 없어 아이들을 굶기고 있는 젊은 여인이 있거든 데려오너라.”
그런 여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사는 금세 한 여인을 데려왔다. 길선은 무사에게 음식과 술을 준 후, 여인을 아이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아이들이 며칠을 굶었느냐?”
길선이 여인에게 물었다.
“음식을 구경 못 한 지가 닷새나 되었습니다. 물만 먹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길선은 작은 비단 천에 싸인 무언가를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여인이 그것을 받아 펼쳐보니, 안에는 작은 수정 구슬 하나가 들어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여인에게 길선이 말했다.
“내가 시키는 것만 잘 하면 아이들을 원 없이 먹이고 입힐 수 있도록 해주겠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여인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길선은 여인을 데리고 아로에게 갔다. 여인의 품에는 전날 데려온 아기가 안겨 있었다.
“달님이 묻힌 날에 태어난 아기입니다. 아기의 어미에게 확인하여 보시지요.”
아로는 줄곧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길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도 빨리 찾아내실 줄은 몰랐군요.”
“마마, 저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나라의 명운이 달린 일에 제가 속임수라도 썼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길선은 사뭇 언성을 높이며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로는 여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아이가 태어난 날은 어땠느냐?”
그러자 여인이 짐짓 눈물을 흘리는 체 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사금님께 아뢰나이다. 이 아이를 낳은 날은 잊을 수가 없사옵니다. 닭이 울고 흙비가 쏟아졌습지요. 사흘 밤낮 쉴 새 없이 흙비가 내렸나이다.”
아로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서 조그맣게 한숨을 토해내었다.
“아이를 나에게 주면 아이가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아로의 물음에 여인은 숨을 한 번 들이쉰 후 아뢰기 시작했다.
“이사금 마마, 이 어미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아뢰겠나이까? 하지만 저에겐 살려야 할 아이들이 셋이나 더 있고, 이 아이는 나라를 위해 쓰일 것이라 들었나이다. 아이를 지금 다시 집으로 데려간다 해도, 저희는 어차피 모두 굶어 죽고 말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사금 마마께서 이 아이의 몸값으로 먹을 것을 주신다니, 나머지 아이들은 살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더니 여인은 정말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기가 죽게 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알고 지내던 이웃의 아기였다. 자신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가엾은 생명을 자신으로 손으로 죽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여인의 가슴을 죄어왔다.
여인의 눈물을 보자 아로는 마음 속 의심이 걷히는 것 같았다. 아로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더니 서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서리가 아기를 빼앗듯이 넘겨받았다. 아로는 여인이 돌아갈 때 수레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히 실어 보내라 명하였다. 여인은 이마를 바닥에 찧어대며 몇 번이고 절을 하였다. 그리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더러운 옷소매로 닦아내며 허겁지겁 궁을 떠났다.
여인이 나간 후, 아로가 길선에게 말했다.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소. 제사 준비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길선이 대답하였다.
“성대한 제사가 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물에 대한 입단속 또한 단단히 시켜두었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고맙소. 절대로 산 제물이라는 것이 탄로 나서는 안 됩니다.”
아로는 다시 한 번 단단히 일렀다.
길선은 집으로 돌아가자 분주히 제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 동이 트기 무섭게 교활한 눈을 번뜩이며 달못을 향했다. 그의 무사와 북 치는 사람 한 명, 하인들 예닐곱 명과 짐을 실은 우차가 그 뒤를 따랐고, 궁궐에서 나온 병사 수십 명이 맨 뒤에서 출발했다.
그때, 멀리 떨어진 오동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이 장면을 바라보는 두 소년이 있었다. 그들은 열세 살과 열 두 살 난 형제들이었는데, 형의 이름은 양질이었고 동생의 이름은 양적이었다. 그들은 아직 어렸지만 키가 컸고 무술로 다져진 팔다리는 단단해보였다. 얼굴과 머리는 흑색 천으로 감싸서 가렸지만 눈은 매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