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길선의 불만

by 분촌

아로는 길선과의 혼인을 미루기 위해 아버지 첨해의 장례를 핑계 삼기로 했다. 첨해가 숨을 거둔 다음 날, 아로는 신하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말했다.

“아버님 장례 기간은 일 년으로 정하겠습니다. 지금 나라 사정이 몹시 어렵습니다. 어머님 장례를 치른 지 일 년 만에 아버님마저 돌아가시니 물품도 인력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정성을 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따라서 지금의 형편에 맞추어 기간을 정한 것이니 그렇게들 알아주세요.”

이렇게 해서 길선은 장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일 년이 지나 장례가 모두 끝난 다음 날, 길선은 아침부터 아로를 찾아가 불만을 늘어놓았다.

“이제 혼인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해가 바뀌면 이사금께서도 열여덟이 되십니다. 저는 스무 살이 되고요. 이러다간 둘 다 꼬부랑 늙은이가 되겠습니다.”

아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길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든 것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으니 아직은 여자 군주가 필요해요. 서불한께서는 설마 이사금의 자리 때문에 혼인을 서두르려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길선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솟구쳐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대꾸했다.

“제 손으로 제물을 구해 저의 재물을 들여 제사까지 제 손으로 올렸습니다. 산신이 노하셨는지 삼한의 호랑이들이 다 부리산으로 몰려왔지요. 그 중 대장인 놈은 집 채만했답니다. 그날 저와 저의 하인들이 한꺼번에 호랑이 밥이 될 뻔 했다는 걸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쉽게도 하시는군요!”

길선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서불한의 공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서불한도 눈이 있으면 보실 게 아닙니까? 무엇이 달라졌죠? 제물을 바쳤는데도 진한의 사정이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정말 발천이 말한 아이를 데려온 게 맞습니까?”

아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길선을 쏘아보며 말했다. 길선은 이를 꽉 물더니 대꾸했다.

“저를 계속 의심하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진심을 말해 주시지요. 혼인을 언제 하시겠습니까?”

길선은 아로를 노려보았다. 아로는 길선의 눈빛에서 섬뜩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대로 두었다간 무슨 일이라도 낼 것만 같아 아로는 길선을 달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로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떼었다.

“내가 예민한 것을 이해해 주세요. 제물을 바쳐서 나라가 좋아질 줄 알았으니까요. 나라가 좋아진 후 혼인을 하고 서불한께 왕위를 내어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에겐 이사금이라는 자리가 무거운 짐 같기만 하답니다. 이 짐을 하루빨리 던져버리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예요.”

아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진한이 더 나빠지고만 있으니……. 가장 큰 문제는 도적떼입니다. 요즘 이서국에서 이틀이 멀다 하고 도적떼가 사로국으로 넘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엔 이곳 국읍에까지 도적들이 들어와 사로의 소민이 죽임을 당했었지요? 이서국을 그대로 두어선 안 되겠어요. 나는 이서국 신지 지휴간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에요. 그리고 누군가가 지휴간을 대신해 이서국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불한의 생각은 어떠세요?”

아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길선의 눈치를 살폈다. 아로의 말을 듣는 동안 길선은 아로의 의중을 눈치 채고 조금씩 낯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길선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길선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휴간은 보통 깐깐한 사람이 아니어서 아무나 다룰 수 없지요.”

“그러니 서불한께서 또 한 번 어려운 일을 맡아주셨으면 해요.”

아로의 말에 길선은 입이 귀밑에 걸릴 지경이었다. 길선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로는 길선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후 진한의 모든 군장들이 사로국에 모였다.

군장들은 부리방에 모여 이사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아로가 부리방에 나타나 앞쪽에 섰다. 아로는 군장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소년 시절부터 죽현의 벗이었던 이서국 신지 지휴간과 조문국 신지 금아간 외에는 모두 머리가 백발이 다 된 노인들이었다. 아로는 입을 열었다.

“달님에게 형벌이 내린 후 우리 진한에도 하늘의 노여움이 미쳐 백성들의 삶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예전의 진한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 군장들이 서로를 위해주며 어려움을 나누기로 하였고, 특히 지난 번 회합에서 저는 도적떼가 이웃 소국을 약탈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군장들은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알겠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듣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사로국은 이틀이 멀다 하고 도적떼에 시달립니다. 도적들을 붙잡아 물어보니 모두 이서국에서 넘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지휴간이 눈을 부릅뜨고 아로를 노려보았다.

“며칠 전엔 국읍까지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하였고, 저항하는 사로의 소민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있는 궁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로는 지휴간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 계속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휴간께서는 어떻게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지휴간은 너무나 분한 듯 언성을 높였다.

“그 도적떼가 참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이서국 출신이란 증거가 있으십니까?”

“그럼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씀이세요?”

아로도 분하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증거만 보여주신다면 믿겠다는 말씀이지요. 달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하늘의 형벌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우리 진한 사람들이 달님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으며 천신 제사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습니까? 하늘이 왜 느닷없이 진한을 벌하고 달님을 벌한단 말입니까?”

지휴간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군장들은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지휴간은 아로를 노려보며 거침없이 이어갔다.

“달못의 흙을 보십시오! 그건 하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사람이 한 일이오! 누군가 달님을 이용해 이익을 얻을 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소?”

아로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분노에 찬 거친 호흡 때문에 양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아로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그 말은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제가 여자의 몸이라서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진한의 맹주 사로국의 이사금에게 그 따위 무례한 말을 함부로 내뱉는단 말이오? 며칠 내로 이서국으로 관리를 보낼 것이오! 지휴간께서 저를 의심하듯 저도 지휴간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소? 증거는 그때 갖다 드리지요!”

지휴간은 두 손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부리방을 나가버렸다. 부리방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로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모두 먼 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시장하고 고단하십니까? 우리 진한의 군장님들을 위해 산해진미를 준비해 두었으니 어서 연회장으로 가시지요. 마음껏 드시고 푹 주무신 후 내일 떠나도록 하시지요.”

아로는 이렇게 말하고 부리방을 떠났다. 군장들 틈에서는 크고 작은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다들 마지못해 연회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문국 신지 금아간은 조용히 무리에서 빠져 나가 지휴간을 뒤쫓았다. 지휴간은 이제 막 마구간에서 꺼내 온 말 위에 올라타려는 참이었다.

“지휴간, 잠시 기다리시오. 우리 이야기를 좀 나눕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저도 이해가 가질 않소.”

지휴간은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아 숨을 거칠게 내쉬며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이서국에 관리를 보낸다니 무슨 뜻이겠소? 섭정이오. 섭정을 보내겠다는 뜻이오.”

“심상치가 않소. 우리 죽현의 집으로 갑시다. 죽현과 이 일을 상의해봅시다.”

금아간의 말에 지휴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 죽현의 집으로 향했다. 사로에 다니러 올 때마다 지휴간과 금아간은 꼭 죽현을 만나고 갔다. 죽현도 군장 회의가 있는 날은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서 벗들을 기다렸다. 오늘도 죽현은 집에서 두 군장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두 군장은 먼저 죽현의 방에서 다래어멈과 새미어멈이 준비한 소박한 밥상으로 요기를 하였다. 밥상이 물러가자, 두 군장은 죽현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죽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실은 얼마 전부터 길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소. 길선은 이미 무관들을 금은으로 주무르고 있소. 언제든지 병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이오. 길선이 무력을 써서 이서국을 뺏더라도 아로는 내버려 둘 생각인 겝니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른 먹잇감을 주는 것이니 말이오.”

죽현의 말에 금아간이 나섰다.

“그렇다면 내가 도우겠소. 돌아가자마자 군대를 준비 시키겠소.”

그러나 지휴간은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맙소. 하지만 전쟁은 하지 않겠소. 이미 기근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전쟁까지 겪게 할 수는 없소.”

지휴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죽현과 금아간의 눈에도 눈물이 비쳤다.

“이사금의 친족이 되어 아무 것도 막지 못한 내가 죄인이오. 부끄럽고 미안하구려.”

죽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죽현은 달이 묻힌 것도, 달모시의 일도, 지휴간이 이서국을 빼앗길 위기를 맞게 된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그동안 삼키고 견뎠던 슬픔과 절망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한꺼번에 눈물로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