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서국을 차지한 길선

by 분촌

다음날, 길선은 수백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서국으로 왔다. 지휴간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무기를 쓰지 말라 일러두었다. 길선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국읍으로 들어와 지휴간의 궁궐까지 갔다. 문지기들은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고, 지휴간은 뜰에 나가 길선을 맞았다.

길선은 지휴간이 하는 모든 일에 참견하였고, 지휴간이 가는 모든 곳에 함께 나타났다. 또한 스스로를 ‘신지’라 일컫고, 이서국의 소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길선간이라 부르게 하였다. 길선이 직접 처리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났고, 지휴간은 이 모든 굴욕을 견디고 있었다.

죽현은 종종 양질과 양적을 이서국으로 보내 동태를 살피고 오게 했다. 길선이 스스로 신지라 칭한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죽현은 곧장 궁궐로 달려갔다. 아로는 무척 감격하며 죽현을 맞이했다.

“죽현 할아버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아버님께서 할아버님께 저를 맡기셨는데 어찌 그리 저를 만나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죽현은 아로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화가 나서 외쳤다.

“길선이 자신을 스스로 신지라 칭하고 다닙니다! 이사금께서는 이 사태를 어찌 하시겠습니까?”

아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는 기색도 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사금이 못 되어 원통함이 있을 것이니 잠시 원이라도 풀도록 내버려 둘 생각입니다. 곧 아무도 모르게 그자를 없앨 생각입니다. 아주 위험한 자니까요.”

“위험한 줄 아신다면 그자를 멀리 하셨어야지요!”

죽현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할아버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니까요!”

아로도 소리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자의 몸으로 열다섯에 이사금이 된 저입니다. 제가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었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지금부터라도 할아버님께서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면 제가 길선 같은 자와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아로의 말에 죽현은 기가 막힌 듯 한숨을 토해내었다.

“그 일이란 아무 죄 없는 아기를 산 채로 달못에 바치는 일을 말하시는 겝니까?”

“진한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진한의 모든 백성을 위해 어린 생명 하나를 희생시키는 것이 그토록 큰 잘못이란 말인가요?”

아로와 죽현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마마께서 저에게 도움을 청하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달못의 흙을 파서 달님을 놓아드리는 것이지요. 병사들을 동원한다면 며칠 걸리지 않아 해낼 수 있습니다. 사로국 병사들로 모자라면 이서국에서도 도와줄 것입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죽현은 내심 기대를 품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로는 단호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달님이 다시 하늘에 오르면 세상은 나에게 왕위를 내놓으라고 하겠죠. 나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여인의 몸이라고 해서 이사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해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달님이 오르셔도 왕위를 지킬 수 있도록 제가 목숨을 바쳐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그만하세요.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제 힘으로 진한을 되살리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후에 그리 하겠어요. 힘을 가진 후에 말이죠! 지금은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그렇다면 고통 받는 진한의 백성들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죽현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쌀쌀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돌린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기다리면 되죠. 이사금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백성들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어요?”

죽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가슴 속에서 울분이 솟구치는 것 같아,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린 시절, 아로 공주는 소민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놀며 그들을 아끼고 염려할 줄 아는 소녀였지요. 이사금께서는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리셨습니다.”

죽현의 말에 아로는 억울한 표정이 되어 외쳤다.

“저, 아로 이사금은 백성들의 어머니예요! 저도 그들을 걱정하고 아낀다구요! 하지만 백성들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해요! 그게 백성의 도리예요!”

죽현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사금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곤 조용히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를 쐬니 답답함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사금은 눈과 귀를 닫으셨다. 달못의 흙보다 두터운 것이 이사금의 눈과 귀를 덮어버렸구나.’

마음의 탄식은 깊은 한숨이 되어 터져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죽현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모든 것을 되돌리려면 달을 풀어주어야만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러려면 지휴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죽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쉴 새도 없이 곧장 양질과 양적을 데리고 이서국으로 달려갔다.

지휴간은 거의 모든 권한을 길선에게 빼앗긴 채 자신의 방에 갇히다시피 지내고 있었다. 죽현은 지휴간을 데리고 나가 인적이 드문 들길을 걸었다. 양질과 양적은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달님을 풀어드릴 생각입니다.”

죽현의 말에 지휴간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달님을요? 이사금 몰래 말이오?”

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정들을 모으려고 하오. 하지만 사로국의 장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밤을 틈타 몰래 하려고 하는데, 하룻밤 안에 모든 걸 해내야 하오. 그러려면 아주 많은 장정들이 필요하지요. 지휴간께서 도와주실 수 있겠소?”

이 말을 듣자, 지휴간은 망설임도 없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와드리고말고요. 당연히 해야지요.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겠소.”

지휴간의 얼굴에서 그늘이 걷히고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날부터 죽현과 지휴간은 비밀리에 장정들을 모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길선은 이서국으로 온 첫날부터 지휴간의 시녀들과 시종들을 금은과 옥으로 꾀었고, 이들로 하여금 지휴간이 하는 일을 염탐하여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죽현도 도후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죽현이 달을 풀어주어야 한다며 화를 내고 떠난 후, 아로는 죽현이 무슨 일을 꾸미지나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도후를 시켜 죽현과 그의 식솔들이 하는 일을 몰래 지켜보라 일러두었던 것이다.

지휴간의 어린 시종 하나가 죽현과 지휴간을 몰래 뒤쫓았다. 어린 시종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길선에게 달려가 고했다. 자신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길선은 당장 말을 꺼내오게 한 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사로국으로 달려갔다.

도후 역시 양질과 양적이 사로의 촌락들을 다니며 체격이 건장한 장정들을 모으고 있다고 아로에게 고하였다. 죽현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챈 아로는 몹시 화가 나서 부서져라 탁자를 내리쳤다.

“죽현께선 끝까지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군요!”

아로는 마치 죽현이 눈앞에 있기라도 하듯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로는 죽현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아로는 부왕 첨해가 그랬듯이 덕망 높은 죽현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달을 풀어주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로는 죽현을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그날 저녁, 길선이 사로의 궁궐에 도착했다. 길선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아로의 방으로 달려갔다.

“지휴간이 장정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겁니다.”

길선은 숨도 고르지 않고 신 나게 말을 내뱉었다.

“어제 죽현과 지휴간이 비밀 이야기를 나누더니, 오늘 날이 밝자마자 지휴간의 부하들이 장정들을 모으고 다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죽현과 지휴간이 함께 역모를 꾸미는 것입니다. 당장 두 사람을 잡아 가두어야 합니다.”

아로는 길선의 경박함이 못마땅하여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길선이 초조한 듯 말을 이었다.

“이서국의 일은 제가 맡고 있으니, 지휴간 만큼은 제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습니다. 지휴간은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길선이 말을 마치자 아로가 대꾸했다.

“잠시 생각을 해야겠으니 쉬고 계시지요.”

아로는 서리를 불러 길선을 다른 방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도후를 불러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이서국으로 달려가거라. 지휴간은 오늘 밤 안으로 떠나야 한다. 시간을 끌었다간 길선의 손에 죽을 것이다. 지휴간의 누이가 변한 낙노국 군장의 부인이니, 그리로 피신하면 안전할 것이다.”

아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후는 횃불을 밝혀 들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밤이 이슥해서야 이서국에 도착한 도후는 지휴간을 만나 아로의 말을 전하였다.

“알겠네. 이 일이 아니더라도 길선은 언제나 나를 없앨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 우린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네. 이사금께 고맙다는 말씀 전해주시게. 그리고 나, 지휴간은, 길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서국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싸움을 피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전해 주시게.”

지휴간과 도후의 대화가 끝났을 때, 밖에는 이미 말과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차에는 부인과 네 명의 아이들, 두 명의 시녀들을 태우고, 지휴간 자신은 말 위에 올라탔다. 여섯 명의 무사와 여섯 명의 시종들도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 도후는 지휴간 일행이 무사히 떠나는 것을 지켜 본 후 사로국으로 돌아갔다.

같은 시간, 사로국 궁궐, 아로의 방에는 죽현이 와 있었다. 죽현과 아로는 탁자를 놓고 마주앉아 차가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죽현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다정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지휴간이 떠났습니다.”

아로의 대답에 죽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선이 재물을 이용해 여기저기에 첩자들을 심어놓았어요. 이 궁궐에도 첩자가 있을 거예요. 할아버님께서 지휴간과 꾸미신 일은 금세 들켰어요. 길선은 이사금에 대한 역모라며 이참에 지휴간을 없애버리려 하더군요. 도후를 보내어 변한으로 피신토록 했어요.”

죽현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아시겠어요, 할아버님? 또다시 그런 무모한 일을 꾸미신다면, 다음엔 소중한 누군가를 정말로 잃게 되실 거예요. 제발, 제 뜻을 거스르는 그 어떤 행동도, 말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죽현은 너무나 당황하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휴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혀오는 듯했다.

죽현은 힘없이 궁궐 뜰로 나왔다. 궁궐 안 어느 방에서 길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길선은 자신이 이사금이라도 된 듯, 열일곱 명의 대등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연회를 즐기고 있는 참이었다. 죽현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지휴간이 떠난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러더니 곧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혼잣말을 했다.

‘길선, 너의 다음 목표는 이 궁궐, 사로의 왕좌겠지. 그 다음은 진한, 그 다음은 삼한 전체를 갖고자 하겠지. 하지만 쉽진 않을 것이다. 네가 교활하고 간악하지만, 아로 이사금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그리고는 터덜터덜 무거운 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갔다.

길선은 사로의 궁궐에서 실컷 연회를 즐기고, 이틀이 지나서야 이서국으로 돌아왔다. 궁궐에 도착하자마자 지휴간의 방부터 찾아 둘러보던 길선은 절로 어깨가 들썩여졌다.

“눈엣가시가 사라졌구나. 더 큰 가시가 사로의 궁궐에 새파랗게 살아있지만, 머지않았다. 두고 보라지. 이사금의 의자가 꿈에까지 쫓아와 진짜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길선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 잃은 이서국 궁궐 곳곳으로 길선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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