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이른 아침, 해가 산꼭대기 위로 고개를 내밀기도 전이었다. 고요히 잠들어 있어야 할 숲속 동물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오두막 마당으로 달려 온 동물들은 달모시와 미설을 깨우려는 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미설이 벌떡 몸을 일으켜 문을 박차고 나왔다.
수십 명의 무사들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비단으로 된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검은 비단으로 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긴 칼을 차고 있었다.
무사들의 맨 앞에는 도후가 금실로 수놓은 검은 비단 포를 입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아무런 장식 없는 포를 입은 두 명의 상급 무사가 서 있었다. 그들도 모두 복면을 하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잠에서 깬 달모시는 미설의 옷자락 뒤에 숨어 이 무서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미설의 옷자락을 잡은 달모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도후가 뒤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무사들이 길을 열고 머리를 조아리자, 무사들 틈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듯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로 이사금이었다. 이사금은 금실로 수놓은 흰 옷을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수정으로 만든 띠를 두르고 있었다. 수정 귀걸이와 옥 목걸이, 옥팔찌는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고와 보이게 만들었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무척 아름다운 이목구비였다.
“바로 저 아이옵니다.”
이사금의 뒤를 따르던 또 다른 여인이 말했다. 저택에서 달모시에게 갖은 친절을 베풀었던 이사금의 시녀, 서리였다.
“과연 살아 있었군. 천 년을 천 번이나 산다는 저 늙은이가 아이를 기르고 달은 어미 노릇을 한다고? 참으로 재미있는 가족이 아닌가?”
이사금은 차디찬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이사금을 따르던 시녀들과 하인들이 하하 호호 함께 소리 내어 비웃었다.
이사금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달모시는 소름이 돋았다. 이사금은 다시 정색을 하고 달모시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 아이에게 달의 생명력이 있다. 우리 사로국과 진한, 아니 삼한 전체를 되살릴 제물이니 반드시 산 채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번엔 미설을 향해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돌렸다.
“나라의 제물을 빼돌린 늙은이다. 저 늙은이만 아니었다면 삼한이 이토록 오래 고통을 겪진 않았을 것이다. 당장 끌고 가서 옥에 가두어라. 죽음으로 죄를 갚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신선과 나무를 향해 차가운 얼굴을 돌렸다. 이사금은 나무를 향해 다가가서 신선과 하나를 만져보더니 똑 소리를 내며 땄다. 이사금이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자, 시녀들도 재미있다는 듯 깔깔깔 웃어댔다. 서리가 이사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이 세상이 다 마마의 것이옵니다.”
서리의 말과 몸짓 하나하나가 달모시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깊이 박혔다. 전날의 친절하고 다정했던 여인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이사금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정말 자신이 상상하던 무서운 이사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달모시의 두 손은 덜덜 떨렸고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 나무를 당장 궁궐 정원으로 옮겨 심도록 해라.”
이사금의 명령이 떨어지자 손에 괭이를 든 하인들이 달려와 신선과 나무 아래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이사금은 흙이 파헤쳐지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잃었던 입맛도 되찾고 밤에는 잠도 잘 수 있겠구나. 슬 켜는 소리가 없으면 한숨도 잘 수 없었던 세월……. 나의 고통뿐이겠느냐? 이제 삼한의 고통이 모두 끝날 게야.”
이사금이 고개를 돌려 달모시를 한 번 더 쏘아보았다. 입가에는 야비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이사금은 달모시의 마음속에서 어느새 괴물이 되어 있었다.
달모시가 얼어버린 듯 서 있는 동안, 이사금과 시녀들이 오두막을 떠났다. 그러자 이번엔 시퍼렇게 번득이는 긴 검을 든 무사들이 달모시와 미설을 향해 다가왔다. 미설은 달모시를 자신의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곤 달모시에게 속삭였다.
“달모시, 내가 등을 치면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바람보다 빨리, 번개보다 빨리. 알겠느냐?”
“할아버지는요?”
달모시가 훌쩍이며 물었다. 미설은 달모시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
“먼 훗날, 하늘에서 꼭 다시 만나자꾸나.”
말을 마친 미설은 허리춤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었다. 흰색 무명 천 위의 까만 호랑이. 전날 미설이 그리고 있었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미설은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달모시의 등에 그림을 휘둘렀다. 그 순간, 달모시는 커다란 호랑이로 변해 숲을 울리는 포효를 터뜨렸다. 달모시는 미설이 시킨 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렸다. 무사들이 달모시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았다. 달모시의 몸에 몇 개의 화살이 박혔다. 그러나 달모시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그들을 물리치며 마당과 안개 숲을 벗어났다.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놓치면 안 된다! 반드시 잡아 오너라!”
무사들이 달모시를 뒤쫓았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와 달모시의 몸 여기저기에 꽂혔다. 그래도 달모시는 계속 앞을 보고 달렸다.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서 달리는 동안, 다리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달모시는 어느 울창한 나무 숲 아래에 이르러 잠시 멈추었다. 뒷다리에 박힌 화살 때문에 달리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달모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풀숲 위에 몸을 뉘였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눈을 감으니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