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아로의 절망

by 분촌

미설이 사라진 것을 알고 아로는 온 몸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로는 서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아로는 침상 위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아로는 부리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달못이 가까워지자, 찬란한 황금빛이 달못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로는 왠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로는 기쁜 마음으로 달못을 향해 달려갔다. 달못가에 이르자, 갑자기 모든 빛이 사라지고 암흑이 아로를 휩쌌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달이 누워있었다. 처음에 달은 백옥처럼 보였다가 잿빛으로 변하더니, 곧 까맣게 되어버렸다. 불에 타버린 것 같기도 하고, 썩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두려움과 절망이 밀려왔다. 달을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아로의 뒤에는 어느새 길선이 와 있었다. 아로가 돌아서자 길선은 긴 검으로 아로의 심장을 겨누었다.

“너는 처음부터 나와 혼인할 마음이 없었다. 왕위를 넘길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왕위를 미끼로 날 이용하고 이서국이라는 다른 먹이를 던져 준 거야. 나는 사로국을 칠 것이다. 너의 죄를 만천하에 밝혀 진한의 모든 군장과 백성들이 너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것이다. 너를 죽이고 진한을 통일하여 나의 왕국으로 만들 것이다!”

칼끝이 마침내 아로의 앞섶에 와 닿았다. 아로는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로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숲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새 병사들이 아로의 뒤를 쫓고 있었다. 병사들이 화살을 쏘았다. 아로의 등에 화살이 꽂혔다. 아로는 계속 달렸다. 그러자 길이 끝나고 절벽이 나타났다. 아로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강력한 힘이 아로를 절벽으로 밀어냈다. 아로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로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다. 아로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아로의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아로는 울부짖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공포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마마, 악몽을 꾸셨습니까?”

서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시녀들이 물그릇과 무명 수건을 가지고 급히 들어왔다. 시녀들은 무명 수건을 물에 적셔 서리에게 건네주었다. 서리는 아로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후 아로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마, 도후가 마마를 잠시 밖으로 뫼시라 하였습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서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로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았다.

궁궐 뜰에는 무사들이 모여 있었고, 도후가 그들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로가 나타나자 도후와 무사들은 아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좀 더 다가가서 보니, 사내 한 명이 오랏줄에 묶인 채 궁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몇 명의 무사들이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로가 물었다.

“반역자입니다. 마마의 침실로 숨어드는 것을 잡았습니다.”

도후가 대답했다. 아로는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복면이 내려져 있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로의 무사들 중 한 명이었다. 아로가 물었다.

“누가 시켰느냐?”

반역자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길선이 시킨 것이냐? 어서 말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네 목을 칠 것이다!”

아로의 호통에 반역자는 흐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길선간이 병사를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사금 마마께서 부리산의 일이 끝나면 자신을 없애겠다고 하신 것을 알고 준비를 해왔습니다. 당장 오늘이라도 쳐들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왜 나를 배반했느냐? 내가 너와 식솔들을 잘 돌보아주지 않았느냐? 먹고 입을 것이 부족했느냐?”

아로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슬픔이 묻어있었다.

“새로운 신분을 약속 받았습니다.”

반역자는 다시 흐느껴 울었다. 아로는 잠시 슬픈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더니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옥에 가두어라. 서리는 죽현 님을 불러오너라.”

아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죽현을 기다렸다. 죽현을 기다리는 동안 아로는 의자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아무 것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하늘은 절대로 자신을 돕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백성들의 삶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곡식은 늘 부족했다. 국읍 밖으로 나가면 언제나 새 무덤들이 생겨나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눈길은 점점 사나워졌다. 그리고 이젠 자신을 지켜주어야 할 무사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현이 왔을 때, 아로는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죽현은 아로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다치지 않으셨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오는 동안 이야기는 다 들었습니다.”

죽현은 아로에게 처음으로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동안 내내 아로를 미워했지만, 아로가 누구보다도 외롭고 불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할아버님은 아십니까? 저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떠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이사금이 아닌 다른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궁궐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건 그려지지도 않아요. 이제 이곳이 무서워졌지만, 그런데도 갈 곳이 없어요.”

죽현은 잠시 동안 말없이 아로를 바라보았다. 궁궐 바깥의 백성들은 고통스런 삶 속에서 아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갇힌 고통의 호수는 왕실이 만든 것이었다. 아로 또한 슬픔과 고통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과 고통의 호수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로는 스스로 고통의 호수를 만들고 자신을 그 안에 가둔 채 무거운 흙더미에 파묻혀가고 있는 것 같았다.

죽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무사 열 명만 주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할아버님 뜻대로 하세요. 얼마든지 데려가세요.”

아로는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한 채 대꾸했다.

아로의 방에서 나온 죽현은 도후를 만나 자신의 계획을 전했다. 죽현을 따라 궁궐 안에 와 있던 양질과 양적은 무사들을 골랐다. 양질과 양적은 무술이 뛰어나면서도 목소리가 좋은 자들을 각각 다섯 명씩 뽑아 두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양질과 양적은 열 명의 무사들을 데리고 이서국으로 갔다. 그날 그들은 모두 흑색 옷을 입지 않고 평범한 베옷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이서국에 도착하기 전에 무사들은 말을 숲속에 묶어두고 단검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국읍으로 숨어 들어갔다. 무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니면서 장정들을 만날 때마다 노래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이보게. 갑옷과 검은 다 준비 되었는가? 그 갑옷 입기 전에 내 노래나 한 번 들어보게.”


진한이 연합하여 길선을 치러 온다

간악한 그를 위해 목숨을 잃을 텐가?

창과 화살에 맞서지 않는다면

창과 화살에 피가 묻지 않으리


노래는 비밀스럽고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서국의 장정들은 노래처럼 길선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장정들은 갑옷과 검을 들고 산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길선은 첩자에게서 원하던 소식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간밤에 내린 이슬이 마를 때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일이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길선은 급히 병사들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장정들이 모이지 않았다. 한낮이 될 때까지 궐 문 밖에 모인 병사들은 오십 명도 되지 않았다. 길선은 많은 장정들이 사라져버렸다는 보고를 받고 불같이 화를 냈다.

길선은 방으로 돌아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첩자는 들켰을 게 틀림없었고, 병사들은 도망쳐버려서 반란은 실패하게 되었다. 일각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허겁지겁 문갑을 열어 큼지막한 보석 주머니를 꺼내 품속에 넣었다. 그때 무사 하나가 뛰어 들어와 외쳤다.

“신지님, 도후가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국읍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곧 다른 소국 군대들도 몰려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계획은 모두 틀려버린 것 같구나. 말을 꺼내 오너라. 지금 바로 떠나자.”

무사가 마구간에 말을 가지러 간 동안, 길선은 궁궐 뒷문으로 달려갔다. 곧 무사가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그들은 함께 말에 올라 뒷문으로 궁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