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진짜 세상의 모습

by 분촌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날씨가 더워지면,

‘여름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고, 바람이 시원해지면,

‘가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달모시는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양, 아무 것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오직 꾀꼬리의 노랫소리에 의지해 걷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때는 개울물에 빠지기도 하고, 작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달모시를 도와주었다. 사람들은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먹을 것을 주기도 했지만, 달모시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애썼다. 달모시는 사람들이 무섭고 싫었다. 그리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사금이고, 서리이고, 재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떠돌이 소년을 가엾게 여겼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잘 곳을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달모시는 이틀이 넘게 굶은 적이 없었다. 추위가 매서운 겨울에는 빈 방이나 헛간 같은 곳을 내어주며 날이 풀릴 때까지 며칠이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었다.

달모시는 길 위에서 여러 해를 떠돌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한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달모시는 단 한 번도 진짜 세상을 본 적이 없었다. 달못을 찾아오던 백성들, 옹기종기 모여 있던 부리마을의 초가들, 그리고 이사금의 별궁이 달모시가 본 세상의 전부였다. 눈이 먼 이후에는 다래어멈의 오두막과, 친절을 아끼지 않던 몇몇 사람들만이 그의 세계였다. 달모시는 그 작은 세계 안에서 자신이 단 한 번도 굶거나 추위에 떤 적이 없으며, 질병으로 고통 받은 적도 없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눈을 잃고 길 위에서 귀와 몸으로 겪은 진짜 세상은 자신의 상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진짜 세상은, 가뭄과 흉년, 전염병과 전쟁이 오랜 세월 쉼 없이 반복되는, 눈물뿐인 세계였다. 이것이 자신 말고는 모두가 행복할 거라고 믿었던 바깥세상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진한에는 아직 인정이 남아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친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먼지투성이 달모시를 피하는 사람들, 거칠게 내쫓아버리는 사람들, 돌을 던지고 괴롭히는 조무래기 아이들도 만났다. 그러나 달모시는 이제 캄캄한 앞길이 두렵지 않았다. 달모시는 사람들을 조금씩 믿게 되었다. 그토록 단단하던 미움과 분노도 햇살 아래 놓인 얼음바위처럼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어느 날부터인가 달모시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달못으로 가는 길을 묻기 시작한 것이었다. 달모시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이상 겁내지 않았다.

그러자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달모시의 마음에서 두려움과 미움이 사라지자, 갑자기 꾀꼬리가 노래를 멈추었다. 달모시는 꾀꼬리가 언제든 다시 노래를 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노랫소리는 영영 들려오지 않았다. 꾀꼬리는 달모시를 길 위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린 것이었다. 달못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많은 고을을 지나야 했고, 달모시는 눈이 보이지 않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지도 몰랐다. 달모시는 이제 그 먼 길을 사람들만을 의지하며 걸어가야 했다.

달모시는 그토록 미워했던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방향을 걷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고, 사람들이 내어주는 장소에서 잠을 잤다.

달모시의 마음은 고요해져갔다. 그것은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포근한 봄 밤, 빛나는 거울처럼 잔잔하던 달못의 모습과도 같았다. 무서웠던 세상이 무섭지 않게 되고, 미웠던 사람들이 밉지 않게 되고, 모든 감정이 달못의 물처럼 맑아졌다. 이따금 작은 행복이 물보라처럼 밀려왔다. 마치 봄날 저녁, 부드러운 바람이 고요한 달못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킬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