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눈물의 꽃

by 분촌

길을 떠난 지 두 해가 지난 어느 여름날이었다. 달모시는 뜨거운 한낮의 태양 아래를 걸어가고 있었다. 짧은 장마가 지나간 후로 두 달이 가깝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곳곳에서 백성들의 한숨과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달모시가 걸어가는 길 아래 개울에는 하얗게 마른 바닥에 물고기 대신 풀이 자라고 있었다. 들판의 곡식은 비를 맞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여름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한참만에야 나무그늘을 만난 달모시는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다.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제법 들려오는 것을 보니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 같았다. 달모시는 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아 열기를 식혔다. 그러자 금세 몸이 나른해지며 졸음이 몰려왔다.

얼마쯤 지났을까? 달모시는 문득 들려온 여인의 노랫소리에 잠이 깨었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여인은 두 발을 무겁게 끌며 걷고 있었고, 발걸음을 떼는 것이 몹시 힘겨워보였다. 달모시는 여인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달님, 달님, 높이 솟으소서

높이 솟아 단비를 내리소서

우리 아기 작은 몸에

밤에는 달빛 내리시고

낮에는 단비 내리소서


여인은 달모시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을 지나 계속 발을 끌며 걸었다.

‘나무 그늘을 그냥 지나치는군. 저토록 힘겨운데 왜 멈추지 않지?’

달모시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몸을 일으켜 여인의 뒤를 따라 가보았다. 여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열 걸음 쯤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그런데, 잠시 후 여인은 문득 노래를 멈추었다. 걸음도 멈추었다. 달모시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여인은 이제 한 발짝도 더 걷기 어려운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길 위로 ‘털썩!’ 무너져 내렸다. 달모시는 두 발이 길 위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노랫소리는 영영 멈추어버린 채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여인을 따라간 것은 달모시뿐 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런! 아기는 벌써 한참 전에 숨이 끊어졌군, 그래.”

한 남자가 아기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죽은 아이를 업고 다녔단 말이야?”

다른 남자가 놀라서 외쳤다.

“에구, 가여워서 이를 어쩌나.”

한 여인은 눈물을 찍어내며 울먹였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을 더 데리고 왔다. 사람들은 손수레와 연장을 준비해 와서 여인과 아기를 마을 근처의 묘지에 묻어주었다.

일을 마친 마을 사람들은 숲 그늘에 모여 앉아 땀을 식혔다.

“허어, 이 산 전체가 무덤으로 덮이게 생겼네, 그려.”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어릴 적엔 이 언덕이 사시사철 아이들 놀이터였는데 말이야. 이젠 공동묘지가 되어 버렸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내년에도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있을 수 있을까?”

“흥.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 아니겠어? 우리도 숨만 붙어 있을 뿐,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지 뭘. 아무런 희망도 없으니 다들 산 귀신이 아니고 뭐겠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달모시는 곁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저는 세상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러자 나이 지긋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옥이 따로 없다네. 하루하루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만 같다네. 비가 오지 않고 농사가 안 되어 굶는 일은 다반사요, 먹을 게 없으니 도적이 되어 이웃의 곡식을 빼앗고 목숨까지 해치지. 곳곳이 전쟁터라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피골이 상접한 마당에 철마다 전염병까지 휩쓸고 지나가니, 사람 목숨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네. 이 모든 게 달님이 없기 때문이네. 이사금님은 하늘에서 새 달을 내려주신다 했는데, 열다섯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구먼.”

그날 밤 달모시는 그 노파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노파는 혼자 살고 있었다. 왜 가족이 없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후, 노파는 달모시에게 부엌방에서 잠을 자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노파는 짚을 엮어 만든 자리를 가져와 부엌바닥에 펼쳐 놓았다. 달모시가 누워 자도 좋을 만큼 넉넉한 크기였다. 노파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후 달모시는 잠자리에 누웠다. 잠자리는 폭신했고 마른 짚 향기가 솔솔 배어나왔다.

잠시 후 노파의 방에서는 베 짜는 소리가 딸각딸각 들려왔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베틀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낮 동안 혼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달모시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하루였다. 달모시는 오래 전 미설이 해주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미설은 아로 이사금이 달의 축복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었다. 미설은 아로가 언젠간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것이라고도 했었다. 그렇다면 그 ‘언젠간’은 도대체 언제인 걸까? 달모시는 생각해보았다.

‘열다섯 해는 짧은 시간이 아니야. 이런 삶은 한 해도 견디기 힘들어. 이사금은 죄인이야. 백성들을 열다섯 해나 지옥 속에서 살게 했으니까.’

달모시는 수많은 생각으로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문득 달모시의 귓전에 노파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노파가 베를 짜며 부르는 노래였다. 그 노래는 울음이었다. 노파의 구슬픈 목소리와 곡조는 달모시의 가슴을 한없이 미어지게 만들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달모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달모시는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모시의 눈은 눈물을 잊은 눈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눈물은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

달모시는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눈물은 마른 강바닥을 적시듯, 굳어있던 마음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무언가 작고 하얀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늘 끝만큼 작았지만, 이상하리만치 강하게 빛났다.

달모시는 그 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빛은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았다.

노파의 방에서는 더 이상 베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달모시는 작고 하얀 빛 때문에 잠들 수 없었다. 그 빛은 신비로웠고 달모시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피곤함도 가셔버렸다. 달모시는 밤새도록 그 빛을 지켜보았다.

아침은 금세 찾아왔다. 달모시는 노파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인사를 한 후, 또다시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며 길을 떠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검은 공간 속의 하얀 빛은 사라지지 않고 달모시의 눈앞에 머물러 있었다.

달모시는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빛을 지켜보았다. 작고 미약한 그 빛은 하루하루 자라나 차츰 모양을 갖추더니, 마침내 꽃이 되었다.

그것은 달모시가 본 적 없는, 별처럼 빛나는 꽃이었다. 꽃잎에는 반짝이는 이슬이 맺혀 있었고, 그 이슬은 가만히 흘러내렸다. 달모시는 그 이슬을 눈물이라 믿었다. 꽃이 핀 날부터, 자신도 다시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꽃은 결코 시들지 않았다. 까만 어둠 속에서, 언제나 소리 없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달모시는 가슴 속에 그 꽃을 품은 채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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