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는 도후가 달모시를 잡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달모시가 부리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눈이 보이지 않는 그를 잡는 일은 덫에 걸려 든 토끼를 잡기보다 쉬울 것 같았다.
그러나 도후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가 푸른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먼 하늘에 샛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로는 서리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길 애타게 기다리며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곧 어두워질 텐데. 왜 이리 소식이 없는 걸까?’
그때였다.
“마마!”
서리가 다급하게 아로를 불렀다. 아로의 얼굴에 화색이 피어올랐다.
“어서 들어오너라. 그래, 달모시는 잡았느냐?”
그러나 서리는 창백한 표정을 한 채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지금 궁궐 밖 사로벌에 무장을 한 자들이 모여들고 있사옵니다. 아낙들까지 섞여 있다 하옵니다. 당장 피하셔야 하옵니다!”
서리의 말에 아로는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아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직 죽현뿐이었다.
“죽현은 어디 계시느냐? 백성들이 죽현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하지 않느냐! 빨리 죽현을 모셔 오너라!”
“이미 발이 빠른 아이를 죽현 님 댁으로 보냈사옵니다.”
“오, 잘했구나. 이제 염려할 것 없다. 할아버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게야. 할아버님의 말 한마디면 백성들을 달랠 수 있을 게야.”
아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고 맞잡은 두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후, 어린 시녀 하나가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시녀는 울부짖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마마, 죽현 님은 해질녘에 급히 부리마을로 떠나셨다 하옵니다!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하옵니다! 사로벌에 무장한 백성들이 가득 찼나이다!”
말을 마친 어린 시녀는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로는 서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리는 허겁지겁 무명 주머니를 꺼내어 아로의 물건을 싸기 시작했다.
“마마, 서두르셔야 합니다! 어서 마마의 옷을 갈아입혀 드려라!”
서리가 어린 시녀를 향해 소리쳤다. 어린 시녀는 허둥지둥 아로의 포를 벗기기 시작했다. 아로는 눈처럼 하얀 비단 포가 방바닥에 스러지듯 내려앉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리는 남아있던 무사들에게 모두 궁궐 문을 수비하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세 여인은 남장을 한 채 방을 나갔다. 궁궐 문 밖에서 백성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서리는 아로를 뒤뜰로 이끌었다. 어린 시녀는 맨 마지막에 서서 뒤를 살피며 따라갔다.
세 여인은 뒤뜰 담장 앞에 세워진 돌탑 앞에 도착했다. 잘 다듬은 판석으로 쌓은 돌탑이었다. 서리와 어린 시녀가 두 손으로 힘껏 돌탑을 밀어 무너뜨렸다. 그런 다음 아랫부분의 커다란 판석을 들어내었다. 담장 아래쪽에 어른 몸 하나가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나왔다. 구멍은 크기가 제각각인 돌들을 아무렇게나 끼워 넣어 엉성하게 메워져 있었다.
서리가 주먹 만 한 돌 하나를 손으로 빼냈다. 돌은 아주 쉽게 빠졌다. 그때, 칼날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오래지 않아 칼날들의 소리가 멎더니, 마침내 궐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천둥 같은 함성이 쏟아져 들어왔다. 백성들의 함성은 아로의 귀밑까지 밀려들었다.
“마마, 어서!”
서리가 다급하게 아로를 안아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담장의 반대편에도 구멍을 가리기 위한 돌탑이 서 있었다. 이 돌탑은 크기가 작아서 한 손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아로는 힘껏 돌탑을 밀어내고 담장 밖으로 몸을 빼냈다. 거의 다 빠져 나왔을 때였다. 뒤에서 서리와 어린 시녀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아로의 발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이 앙큼한 것!”
분노에 찬 장정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는 아로의 발목을 꽉 움켜쥐고 담장 안으로 끌어 당겼다. 아로는 우연히 손에 걸린 어린 나무 둥치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문득 모든 소리가 그쳤다. 세상은 거짓말처럼 고요했고,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더니 스르르 발목을 놓았다.
아로는 허겁지겁 담장 밖으로 빠져나와 맞은 편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온 세상이 고요하였다. 백성들의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아로는 사방이 대낮처럼 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로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달이 하늘 높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