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없는 15년 동안 백성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스며나는 분노는 점점 더 짙어져갔다. ‘선아의 노래’가 퍼진 이후 백성들의 눈초리는 한층 더 서늘해졌다. 진한의 군장들은 백성들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것을 깨달았다. 이젠 백성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심장이 방망이질치고 때론 소름까지 돋았다.
군장들은 가까운 이웃 소국으로 두셋 씩 모여들어 서로 머리를 맞대었다. 군장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더 이상 아로를 믿을 수도, 기다려 줄 수도 없었다. 지금 아로를 폐위시키지 않으면 자신들마저 위험해지리라는 걸 그들은 알았다.
군장들은 여러 날 동안 서로 오가며 의견을 나누었다. 몇몇 군장들은 군사를 모아 사로국을 치자고 하였고, 몇몇은 자객을 보내 이사금만 없애자고 하였다. 한동안 논쟁을 주고받던 군장들은, 전쟁은 불가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소국들이 오랫동안 굶주림과 병에 시달렸으므로 한 번의 작은 전쟁만으로도 국력이 고갈될 수 있었다. 군장들은 마침내 자객을 보내 아로를 없애고 죽현을 새 이사금으로 추대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아로가 노래를 만든 자를 쫓는다는 소식은 금세 군장들의 귀에 들어갔다. 머지않아 백성들 사이에도 소문이 퍼질 터였다. 백성들은 아로가 아닌 노래를 만든 자의 편이었다. 군장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늘도 자신들의 일을 도와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아로의 신하가 관리를 하고 있는 이서국을 제외한 열 개 소국의 군장들은 가장 실력 있는 무사 두 명씩을 뽑아 사로국으로 보냈다.
무사들은 스무 명이 다 모일 때까지 사로국 근처의 약속 장소에서 머물렀다. 그곳은 사로국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의 산자락에 있는 얕은 동굴이었다. 나무에 가려져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말은 먼 숲 속에다 숨겨두고 이곳까지는 두 발로 걸어 왔는데, 모두 짚신을 신고 베옷을 입고 있었다. 평범한 소민들처럼 보이기 위해 작은 등짐을 메고 있었지만, 짐 속에는 번득이는 단검들이 숨겨져 있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 가장 먼 실직국의 무사들이 도착했다. 스무 명의 무사들은 동굴 바닥에 모여 앉아 꼼꼼히 계획을 점검하였다. 각자의 역할을 확인한 무사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로국의 궁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국읍에 들어간 무사들은 궁궐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곧장 궁궐 앞 사로벌로 갔다. 어둠이 제법 짙어지고 있는데도 사로벌에는 소민들이 많았다. 소민들은 지나가는 길이 아니라 모여드는 것이었다. 무사들이 궁궐을 살피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동안 사로벌에는 금세 소민들이 꽉 들어찼다. 무사들은 소민들의 손에 들려진 호미와 몽둥이를 보았다. 어떤 장정들은 갑옷에 창검까지 갖추고 있었다. 마침내 오늘 밤, 사로국에서는 모든 군장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무리가 궁궐 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 이르자 누군가가 외쳤다.
“하늘을 속이고 백성을 죽인 아로를 잡자!”
그러자 백성들의 커다란 함성이 국읍에 울려 퍼졌다. 백성들은 힘을 모아 잠겨 있는 궁궐 문을 힘껏 밀었다. 튼튼하고 육중한 나무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무사들은 재빨리 사로벌을 빠져나가 궁궐 담장을 따라 걸었다. 담장 그늘에 몸을 숨긴 무사들은 각자 보퉁이를 내려놓고 매듭을 끌렀다. 그리고 단검을 꺼낸 후 바람처럼 몸을 날려 궁궐 담장을 뛰어넘었다.
무사들이 아로의 방으로 갔을 때, 아로는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방바닥에는 아로와 시녀들의 옷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무사들은 패를 나누어 열 명은 아로를 쫓고, 열 명은 궁궐 문을 열기로 했다. 열 명의 무사가 궐문으로 달려가니, 부리마을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이사금의 무사들 다섯 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양쪽 무사들은 곧 싸움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