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길을 나섰다. 재리와 모비가 달모시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걸었다. 해는 어느덧 서산을 향해 기울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바삐 걸어야만 했다. 달모시는 힘에 겨운 듯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마침내 부리마을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재리의 눈에 들어왔다.
“달모시, 느티나무가 보여. 곧 부리마을로 들어갈 거야.”
재리의 목소리는 기쁨에 차 있었다. 모비도 달모시의 손을 잡은 채 폴짝폴짝 뛰었다. 달모시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천근 같이 무겁던 두 발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한편, 재리의 집에서는 재리 부모가 아이들을 찾아다니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제 방에서 바느질 하던 애가 도대체 어딜 간 게야?”
재리아범이 말했다. 그러자 재리어멈이 외쳤다.
“별궁에 가져갈 옷 한 벌이 사라졌네! 도대체 얘가 옷을 들고 어디로 간 게야? 재리야, 재리야!”
“모비 이 녀석은 또 왜 이렇게 안 들어오는 게야? 모비야, 모비야!”
두 사람은 각각 재리와 모비를 부르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이웃 아낙 한 명이 재리어멈을 불렀다.
“재리어멈, 재리랑 모비 찾는 거야? 그 아이들 한참 전에 부리마을 쪽으로 가던 걸. 눈 먼 젊은이 손을 양쪽에서 붙잡고 말이야. 도대체 그 젊은이는 누구야?”
그 말을 듣자 재리의 부모는 기가 탁 막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곧장 부리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여름 더위 때문에 뻘뻘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쉴 새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햇살이 금빛으로 바뀔 즈음, 두 사람은 마침내 재리와 모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웃 아낙의 말처럼 재리와 모비는 누군가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서 부축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재리야! 모비야! 거기 서지 못하겠니?”
재리아범이 외쳤다. 뒤를 돌아본 재리와 모비는 달모시를 데리고 달리려 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달모시의 달음질은 느리기만 했다. 마침내 재리아범이 세 사람을 따라잡고 모비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죄인을 잡았으면 이 아비한테 알렸어야지 왜 이리로 데리고 오느냔 말이야? 새 옷까지 입히고서?”
“달모시는 죄인이 아니에요! 전 달모시를 달못에 데려다 줄 거예요!”
재리가 달모시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뒤늦게 도착한 재리어멈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이사금님이 죄인이라면 죄인인 게지, 이것아! 이사금님 덕에 잘 먹고 잘 사는 은혜를 모른단 게야?”
“하지만 이사금님도 죄인인 걸요. 달님과 달모시에게 큰 죄를 지으셨잖아요. 우리도 달모시에게 큰 죄를 지었고요.”
재리는 괴로움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너도 먹고살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입이 살아있으면 화를 입는다. 그저 이 두 손만 살아있으면 된다고 수없이 말했지? 뭣 때문에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느냔 말이야!”
재리어멈은 자신의 머리를 집게손가락으로 치며 두 눈을 부라렸다. 재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재리는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전 달모시와 혼인하기로 약속했어요. 달모시를 따라갈 거예요.”
“이런 정신 나간 것 같으니라고!”
재리아범이 외쳤다. 재리어멈은 재리가 굳게 마음먹은 것을 알고 울상이 되어 말했다.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궁궐 무사들에게 잡히면 너도 죽은 목숨이야, 이것아! 어서 이리 오지 못해?”
재리어멈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재리를 달모시에게서 떼어내려고 했다. 재리는 어머니를 힘껏 밀어냈다.
“전 약속을 지킬 거예요! 달모시 혼자 죽게 하진 않겠어요!”
그때였다. 모비가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와요!”
모비가 가리키는 곳은 그들이 한참 전에 지나온 길이었다. 구부러진 길이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아로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재리는 달모시의 팔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모비도 함께 달리려 하자 재리아범이 모비를 꽉 붙잡았다. 재리아범은 불같이 화가 난 표정으로 윽박질렀다.
“어딜 따라 가느냐, 이놈아. 너도 저것들이랑 같이 죽고 싶냐?”
재리어멈은 울상이 되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재리아범은 재리와 달모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씩거렸다.
“너는 저런 바보가 되지 마라. 너도 아비와 어미처럼 평생토록 이사금님의 사람이 되어야 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는 이사금님의 은혜를 잠시도 잊지 말거라. 알았냐?”
아버지의 무서운 표정을 보자 모비는 잔뜩 움츠러든 채 고개를 숙였다.
재리와 달모시는 부리마을로 간신히 들어갔지만 느티나무 아래에서 무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오가던 행인들이 모여들었다. 무사들이 칼을 뽑아 재리와 달모시를 겨누었다. 급히 따라오던 재리어멈이 놀라 달려왔다. 어머니를 따라 오던 모비도 달려왔다. 그러자 재리아범도 모비를 잡으려고 달려왔다.
금실 수가 놓인 검은 포를 입은 무사가 앞으로 나섰다. 도후였다. 도후는 달모시의 얼굴을 노려보며 물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시오?”
달모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재리가 다급히 대꾸했다.
“우리 남편이오. 지난겨울 감기를 심하게 앓고 나서 눈과 귀가 다 멀었다오.”
도후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재리가 다시 말했다.
“우릴 보내 주시오. 남편에게 달못의 물이라도 먹여 보려고 데려가는 중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다녀와야 해요.”
“흥, 요즘도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있나?”
도후는 재리의 말을 비웃더니 갑자기 달모시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물었다.
“네 놈이 달모시가 맞으렷다?”
재리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재리는 울부짖으며 외쳤다.
“도대체 달모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사금님은 이리도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시는 것이오?”
그러자 하급 무사 한 명이 재리의 턱 밑으로 갈 끝을 들이댔다. 모비가 울기 시작했다. 재리아범이 모비를 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재리어멈은 공포에 질린 채 재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점점 늘어났다. 소도인 부리마을에서 칼을 빼들어 사람을 겨누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장면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모두 겁을 집어먹어 입을 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굴리던 재리어멈이 마침내 앞으로 뛰쳐나가며 외쳤다.
“보아하니 그 눈 먼 젊은이가 죄인인 모양인데, 어서 죄인을 잡아가시고 이 처녀아이는 놓아주시지요! 나리들은 여기가 소도란 걸 모르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후는 칼을 거둔 후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급 무사들도 칼을 거두고 오랏줄을 꺼내어 달모시를 묶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군중 속에서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도에서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렇지요, 어머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목소리 쪽으로 향했다. 젊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대여섯 살 쯤 된 남자아이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무사들을 노려보았지만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당황하여 아이를 치마폭으로 감싸 안았다.
그때, 동구 밖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세 명의 남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한 명은 무명으로 지은 흰 포를 입고 있었고, 두 명은 흑색 옷을 입은 무사들이었다.
세 남자가 가까워오자, 구경꾼들은 죽현의 얼굴을 알아보고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먼저 양질과 양적이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칼을 빼들어 이사금의 무사들을 향해 겨누었다. 이사금의 무사들은 달모시에게서 물러났다. 죽현도 말에서 내렸다. 이사금의 무사들이 죽현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네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죽현은 이사금의 무사들을 향해 천둥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달모시는 죽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양질과 양적이 달모시를 묶은 오랏줄을 풀어주고 양쪽에서 부축해주었다.
“저희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반드시 죄인을 잡아가야 합니다.”
도후가 말했다.
“어림없다! 달모시를 보내주어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소도의 법을 어긴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백성들도 따가운 눈초리로 무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후는 양질과 양적의 매서운 눈빛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싸움이 일어나 자칫 피를 보게 된다면 아로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부하들이 모두 뒤로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재리와 달모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죽현과 양질, 양적이 걸었다. 모비도 슬그머니 빠져나와 달모시의 다른 쪽 팔을 부축하며 걸었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제 갈 길을 잊은 채 따라가고 있었다. 재리어멈과 아범도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행렬 끝에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