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에서 찾은 심심한 인생관
몇 주 전, 고모를 만났다. 마지막으로 고모를 보았던 때가 할머니 장례식이었으니 정확히 2년 만이었다. 나이에 비해 늘 수척하고 피로해보였던 얼굴은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 조금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무더운 7월 말, 할머니의 기일이었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얼마나 계셨죠? 3년?"
"2년하고 조금 더 계셨지."
벽제의 공원묘지에서 나와 저녁을 먹기 위해 차를 몰던 중 우연히도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머무르셨던 요양원 근처를 지날 때였다. 그 길은 그리 자주 다니지 않았는데도 기억에 오래 각인되어 있는 곳이었다. 서울의 변두리, 대중교통으로 닿기엔 참 번거로운 동네에 위치한 작은 노인요양원에서 할머니는 세상과 격리된 재고처럼 여생을 보냈다. 요양원을 찾을 때마다 나는 퀴퀴한 물품보관소나 수용소에 들어서는 기분을 느꼈다. 공간에 붙박혀 있거나 느리게 움직이는 노인들에게선 저마다의 속도로 쇠락을 향해 굴러가는 관성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사람들이 기거하는 장소에 몸을 들이는 것은 언제나 젊음이랄까 생명력 같은 기운을 빼앗기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노년이라는 추상적 시간을 현재 시점에서 감각하게 만들었다. 늙는다는 건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유스>의 어떤 장면들은 할머니를 만나러 요양원으로 갔던 예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를테면 아침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사우나로 천천히 줄 지어 걸어가는 주름진 얼굴들이 그랬다. 스위스의 청정한 자연 속에서 호화로운 서비스를 소비하는 투숙객들과 서울의 그저그런 요양원 입소자들의 객관적 조건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느리게 시간을 통과하는 존재의 양식이 적어도 유사했다. (레나의 꿈 속에서 질주하던 팔로마 페이스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이 서행하거나 정지해 있다는 점에서 <유스>는 이완의 영화라 할 만하다. 거기에는 내러티브적 긴장이 부재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프레드나 믹이 특별히 지지고 볶는 일도 없는 무난한 매일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전부다. (그리고 그마저도 산책을 하고 마사지를 받거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밤에는 식상한 공연을 즐기는 일과의 반복이다) 다만 이 주인공들의 일상에 삶을 관조하는 심오한 대사가 자주 끼어드는데, 그로 인해 이 영화는 음미할 만한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시적인 이미지를 스스로 갖춘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유려하고 지독히도 감상적인' 작품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노년을 아름답고 고상하게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이 <유스>의 미덕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더 큰 미덕은, 때로 추하고 경박스러운 것은 노년이 아니라 그냥 삶이라고 가리키는 담담한 태도다. 식사 자리에서 서로 결코 대화하지 않는 노부부는 환한 대낮에 숲 속에서 짐승처럼 교성을 내지르며 몸을 섞는다. 무대 위에서 우아하게 노래하던 가수는 공연이 끝나고 홀로 식당에 앉아 축축한 고기를 뜯어 먹는다. 그리고 프레드가 '심플 송'을 연주해달라는 여왕의 요청을 완강히 거절했던 이유인 그의 아내 멜라니는, 한때 유일하게 그 곡을 노래할 수 있었던 소프라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박제된 몰골을 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딸 레나는 가족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프레드는 멜라니를 찾아가 자신이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다웠던 아내의 입은, 조수미가 노래할 때 떨리는 붉은 입술과 대조적으로 바싹 마른 나무껍질처럼 굳어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이면의 현실을 무고한 척 열어보이는 감독의 고집스러움에 나는 몇 번씩 멈춰서 숨을 돌려야만 했다. 노년은, 삶은, 아름답다고도 추하다고도 할 수 없는, 이도저도 아닌 것이었다.
"그 순간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뭘?"
"준비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걱정할 것도 없죠."
골동품 상점처럼 삶의 의미를 궁구하게 하는 문장으로 뒤덮인 이 영화에서 나를 유일하게 위로한 대사는 이것이었다(다른 대사들은 내게 동의를 구하거나 추궁하기 바빴다. 경솔함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지, 그렇지 않아? 감정이 전부야, 어서 맞다고 말해). 결국 인생에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의미가 있거나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면, 최소한 이 삶을 버틸 만하게 하는 믿음이 하나쯤 필요하지 않은가? 누구도 인생을 두 번 살아본 적은 없다. 그러므로 생의 모든 순간이 처음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젊음이든 노년이든 준비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음악, 연기, 사랑, 죽음, 무엇이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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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을 연민하던 시절의 나를 떠올려본다. 그 때 나의 연민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순간도 지체없이 노쇠해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내가 가진 젊음도 물이 새듯 스르르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상실이 두렵고 현재는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 나머지 젊음을 잠시 맹신하고 거기에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연민하거나 만끽해야 할 것은 노년이나 젊음이 아니라, 그냥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대체로 그 사이의 어정쩡한 위치에서 삶은 그저 귀여울 따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