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 영화의 전당 내부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VR 씨어터라는 코너가 눈에 들어왔고 순간 무언가에 홀리듯 그곳으로 다가갔다. 상영시간표도 보지 않고 다짜고짜 스탭에게 지금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봤다. 그렇게 처음으로 만난 가상현실의 세계는 어떤 영화보다도 내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특별히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고글을 쓰고 앉아 있고 싶었다. 다음 영화의 상영관으로 향하는 길에도 ‘사람들 2D 영화 왜 보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엔터테인먼트의 미래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를 선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부산에서 느낀 감흥이었다. 아쉽게도 영화는 VR이 아닌 3D IMAX였고, 더욱 아쉽게도 나는 마땅한 상영관을 찾지 못해 밋밋한 2D 화면에서 가상현실을 만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디 플레이어 원>은 놀라운 시각적 어드벤처를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2045년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빈민촌에서 사는 웨이드라는 소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식량난과 자원 갈등으로 인류가 현실의 모든 문제를 포기해버리고 오아시스라는 가상현실 게임에 들어가 아바타로 살아가는 디스토피아가 영화의 배경이다. 오아시스의 창시자 제임스 할리데이는 죽기 전 자신이 게임 속에 숨겨둔 3개의 이스터 에그를 찾는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유산과 오아시스의 모든 경영권을 넘긴다는 말을 남긴다. 웨이드는 오아시스를 정복하려는 세계 2위 게임 회사 IOI에 맞서 다른 플레이어들과 힘을 합쳐 할리데이의 수수께끼 같은 미션을 풀어나간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대중문화에 대한 스필버그의 찬가라고 할 만하다. 2045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에는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대중들이 열광한 음악, 영화, 만화, 소설, 게임이 무수히 많은 레퍼런스로 등장한다. 스필버그 감독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할리데이는 자신이 사랑했던 이러한 문화적 아이콘을 바탕으로 오아시스를 창조한 인물이고, 웨이드는 대중문화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오아시스를 사랑하고 즐기는 평범한 유저다. 이들은 가상현실에서 빚을 진 사람들을 현실에서 착취하고 대중을 경멸하는 IOI의 자본가 소렌토와 대립한다. 이러한 구도는 현재의 대중문화 산업을 누가 주도하고 있으며 대중문화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원작자와 스필버그의 질문과 맞닿아있다. 흥미로웠던 장면은 IOI가 할리데이의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해 고용한 수십 명의 연구자들이 회의를 하는 대목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웨이드라는 오아시스 ‘덕후’ 한 사람에게 못 당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이들도 나중엔 웨이드의 활약을 숨죽이고 지켜보며 응원하는 모습은 대중문화의 본질에 기본적으로 재미와 즐거움이 있다는 진실을 깨닫게 한다.
우연의 장난처럼 이 영화를 본 날이 4월 1일 일요일이었다. 재미있게도 할리우드에서는 이 영화의 개봉 시기를 기독교의 부활절 주간으로 선정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을 추동하는 핵심 소재가 이스터 에그라는 점을 고려한 재치있는 전략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러닝타임 내내 창작자가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다니는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정작 아무런 쿠키 영상도 없다는 아이러니다. 어쩌면 제작진들이 나처럼 만우절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위해 준비한 귀여운 속임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