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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우 Oct 03. 2017

19살의 가해자 (3)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전히 페미니즘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말하기엔 내게 깡이 없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여 내 삶의 근간을 흔드는 것도 두렵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말해온 언어를 바꿔야 하는 것을 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나는 페미니스트야'라는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머리와 언어의 거리를 통감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말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이젠 말해보려 한다.

섣부르게 말하는 것을 넘어 글로서 이야기해보려 하는 것은 그래서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니까




세번째 이야기 : '착함'을 강요당하며


페이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이우에서 3년동안 혐오당했다' 페이지의 개설은 학년을 넘어 학교 전체의 크나큰 충격이었다.

매주 친구들의 사례를 담은 만화가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치녀, 화장, 자박꼼 등등 추잡한 언어와 경솔했던 행동 속 여성혐오의 사례들이 게시되었고 여성혐오는 단숨에 학교 전체의 화두로 떠올랐다.

긍정적인 이야기들만이 오고간 것은 아니었다.


'더불어'라는 가치를 중요시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강조하는 (이우)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이런 방식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일방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굳이 이렇게까지 했어야해?


응. 그래야 했다.


이 페이지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그동안의 억압에 대한 첫번째 아우성이었다. 내가 쓰던 언어들, 내가 하던 행동들이 만화 안에 그대로 담겨있는 것을 보며, 많이도 찔렸다.(그것도 내가 내 행동들을 다 기억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깨끗한 사람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폭력적 행위를 규탄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 3년 동안의 가해와 고작 몇 개월 동안의 불편함은,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고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를 받아들이는 온도차는 학생들마다 제각각이었다. 학생들의 양극화 또한 심해졌다. 그러나 학교가 변하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시작으로 재학생, 그리고 졸업생들의 제보가 쏟아졌고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학교의 관심 또한 높아졌다. 급식실 앞에는 그동안 학생들의 문화를 방치하고 유지하는데 일조했던 교사회의 사과문이 붙었다. 성문제 대처 매뉴얼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학생회가 혐오를 논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의아함을 댓글로서 적어낸 학생들이 있었다. 결코 좋은 소리 못 들었다. 먼저 정말 기초적인 부분에 대한 공부가 없으면서 댓글을 달 용기를 낸 친구들에게는 그 만용에 대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가장 큰 문제는 이거였다. '좀 더 상냥하게, 착하게 말해주면 안되나요?' 솔직히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간다. 예를 들어, '한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페미니즘 접하기는 나도 싫다. 욕 들으면서 수업 듣기 싫은 거랑 마찬가지다.(욕설이 오가는 수업을 옹호하고자 하는 취지는 아니다) 그러나, 그 친절함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가해자가 아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와 같다. 기울어짐을 의식하지 못했던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 기울기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머리가 아픈 건 당연하다. 투쟁의 방식을 제안한 건, 기득권이 아닌 약자들이었고 피해자들이었다. 그것의 결론이 촛불집회와 같은 '평화적' 방식이건 아니건 말이다.


'기득권 남성'으로서, 입을 닫고 살자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 개개인의 불편함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친절함은 강요하면 안되는 것이지 않을까.

나의 세상을 부수지 않으면 안되니까, 고통은 필연적이다.

고통에 익숙해지자.

지금까지의 '더불어 살아온 삶'이 진짜 '더불어' 살아왔던 것인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그 잘못된 삶의 방식을, 도대체 언제까지 강요할 것인지 말이다.

(이야기장이라든가 용서라든가 평화라든가 대화라든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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