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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Mar 15. 2021

청주를 강타한 노란 파도의 감동

 여자 프로농구 파이널의 현장을 가다

  국내 4대 프로스포츠(야구, 축구, 농구, 배구)에서 축구를 제외한 나머지 종목은 정규리그 종료 후 별도의 플레이오프 및 챔피언 결정전(a.k.a 포스트시즌)을 거쳐 그 해의 우승팀을 가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포스트 시즌의 ‘난이도’ 및 긴장감과 치열함은 정규리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챔피언 결정전은 ‘파이널’이라는 이름 그대로 ‘끝판 승부’이기 때문에 양 팀 선수들은 모든 것을 쏟아붓고 그에 따라 많은 명승부도 속출한다. 그런만큼 파이널은 선수들에게도 필생의 기회이자 영광의 무대이지만 팬들에게도 매력적인 유혹이자 볼거리이다. 때문에 경기 관람 티켓 구하기의 경쟁률은 정규 시즌보다 훨씬 높으며 직관 인증샷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는다.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인해 시즌 내내 무관중 경기를 해오던 여자 프로농구는 파이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중 입장을 결정했다. 파이널에 오른 팀은 용인 연고의 삼성생명 블루밍스와 청주 연고의 KB스타즈인데, 용인 체육관의 경우 수용 인원이 2,000석이 되지 않으며 수도권이라 만석의 10%의 인원만 입장이 가능하다. 반면 청주 체육관은 4,000여석이 넘으며 비수도권이라 30%까지 입장할 수 있었기에 애초부터 3,4차전 두 경기가 치러지는 청주에 포커스를 맞췄다.

 예매가 시작되는 경기 3일 전 오전 11시가 되자마자 해당 사이트에 접속했지만 벌써 주요 좌석은 동이 난 상태였다. 파이널이 선사하는 매력과 그동안 직관을 기다려왔던 팬들의 갈증이 결합된 탓일 터이다. 그야말로 ‘헐레벌떡&허둥지둥’ 클릭클릭하여 간신히 표를 구했고, 3월 11일 오후 3차전 경기 시작 전 일찌감치 도착하여 ‘심신의 준비’를 완료했다. 여자농구 첫 직관인데다가 그 무대가 파이널이라는 이유로 경기 시작 전 기대는 커져만 갔다.


여자 농구와의 재회를 기다려 온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방역 수칙 준수로 인해 입장이 지연되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었다.










 삼성생명은 정규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지만, 1위 우리은행을 꺾고 올라오는 기염을 토했다. 삼성생명의 저력은 파이널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용인 홈에서 열린 2경기를 모두 잡아내며 챔피언 등극에 단 1승만을 남기고 기세등등하게 적지인 청주로 진군해 온 것이다. 정규리그 2위이며 객관적인 전력에서도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KB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고, 기대보다는 절박함을 품은 채 홈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총공세를 펼 수 밖에 없는지라 경기를 앞둔 KB선수들에게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총력전을 예고한 것은 삼성생명도 마찬가지였다. 2승을 먼저 거두었다고는 하나 두 경기 모두 진땀승부였고(2차전은 연장 접전 끝에 단 1점차로 이겼다) 파이널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청주 체육관의 실내는 KB의 상징인 노란색의 물결 때문인지 더욱 화사하고 눈부셨다(플로어마저 다른 체육관과는 달리 노란색이다). 경기 시작 조금 전에 입장한 탓에 선수들의 워밍업 장면을 담을 수 있었다. 남자 농구에 비해 동작의 역동성과 묵직함은 다소 떨어졌지만 그 대신 부드럽고 유려한 무용수의 리허설을 보는 듯한 즐거움이 있었다. 게다가 선수들의 실물은 TV로 보던 모습보다 훨씬 화사하고 고왔다. 조금 떨어진 관중석에서 지켜봐도 이 정도인데 바로 앞에서 보면 매우 ‘심쿵심쿵’할 지도 모르겠다.



‘아기 기린’이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상대팀에겐 공포의 대상인 MVP 박지수는 사비를 털어 이날 입장한 모든 팬들에게 아메리카노를 쐈다. 굳이 장내에서는 취식을 금해달라는 안내가 없었더라도 증정품으로 모시고 보관해놓고 싶을만큼 인상적이고 기분좋은 선물이었다. 센스있는 이벤트를 기획한 KB구단과 흔쾌히 기부를 결정한 박지수 모두 대단하고 멋지다.




참으로 오랜만에 홈팬들 앞에서 치르는 출정식이다. 그 기다림 끝에 코트로 달려나오는 기분은 과연 어떨지. 물론 알려지지 않은 많은 속사정과 고충이 있겠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 프로 선수들이 참으로 부럽다. 그 맛에 선수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인트로’는 끝나고 ‘열창’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KB는 1쿼터 초반 주장이자 국가대표 슈터 강아정의 연속된 외곽 폭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며 앞서나갔다.  물론 가만히 있을 삼성생명이 아니었다. 평균 신장에서는 열세였지만 한 발 더 뛰는 움직임으로 KB의 수비에 끊임없이 균열을 냈고 그 찰나의 틈새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부터 연일 감동을 넘어 신화를 쓰고 있는 36세의 최고참 김보미는 이날도 폭발적인 활동량을 보이며 연신 득점을 올렸고 볼을 향해 몸을 던졌다. 결국 삼성생명은 25대 22로 앞선 채 1쿼터를 마쳤다.


 하지만 2쿼터부터 경기의 흐름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2경기에서 살짝 아쉬운 모습을 보였고 1쿼터에 매치업 상대 김보미를 몇 차례 놓쳤던 KB의 가드 심성영은 대오각성하며 한층 높아진 집중력으로 삼성생명의 수비를 맹폭하기 시작했다. 현란한 볼핸들링으로 적진을 돌파했으며 수비의 거친 견제에도 불구하고 5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다. 이날 심성영은 NBA 포틀랜드의 가드 데미안 릴라드(Damian Lillard)에 빙의한 듯한 대활약을 펼치며 25점을 몰아쳤다.

 심성영이 이날의 X-Factor였다면 기둥이자 국가대표 센터 박지수의 활약은 변함없는 ‘상수’였다(오해하지 마시라. 심성영은 리그 11년차의 경험많은 가드이며 국가대표이다. 이날의 활약이 우연은 아니었다는 말씀). 무려 30점에 1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삼성생명의 골밑을 초토화시켰다. 게다가 자신에게 수비가 몰린 틈을 이용해 동료들에게 수많은 찬스까지 만들어 줬다.

 1,2옵션이 힘을 내자 동료들도 아낌없이 지원 사격을 퍼부었다. 35세의 ‘큰언니’ 염윤아는 시즌 내내 계속된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거의 풀타임에 가까운 37분을 뛰며 수비와 리바운드를 포함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다. 박지수에 가려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빅맨 김소담은 본인의 출전 시간 동안 상대 에이스 김한별을 철저히 봉쇄하며 이 날의 또 다른 ‘신 스틸러’가 되었다.


 반면 삼성생명의 핵심이자 ‘타짜’인 세 언니들(김보미, 김한별, 배혜윤)은  KB의 강력한 수비에 가로막혀 어려운 경기를 치렀다. 거의 ‘언니들의 농구 강의’ 수준의 농익은 경기력을 보여줬던 1,2차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3쿼터 시작 직후 심성영의 돌파를 저지하다 파울을 범하며 5반칙 퇴장당한 김보미의 공백은 치명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경기의 승부처로 꼽고 싶을 정도이다. 비록 교체로 들어온 이명관이 13점을 몰아넣으며 ‘인생 경기’를 펼쳤지만 ‘영혼의 리더’가 빠진 무형의 공백은 어쩌지 못했다(참고로 이명관 역시 이번 시즌을 통해 ‘환생’ 수준으로 거듭나며 크게 성장한 사연 많은 선수이다).



결국 KB는 막판 삼성생명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82:75로 승리하며 기사회생했다. 이 치열한 경기도 1,2차전에 비하면 느슨했으며 비교적 쉽게 승부가 갈렸다고 느껴질 정도이니 이번 시리즈의 ‘팽팽한 쫄깃함’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KB와 삼성생명 모두 각각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을 듯 하다. 그야말로 턱밑을 넘어 정수리를 뚫고 나올 듯한 숨가쁨을 잠시 돌린 후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4차전에 나설 것이다. 쓰러질 듯이 힘든 선수들에겐 다소 미안하지만 이런 경기라면 며칠이고 계속 시청하고 직관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이번 시리즈로 인해 그동안 다소 무심했던 여자 농구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상승했는데, 아마 많은 농구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정신차려라 남자농구










20년전 떠난 SK나이츠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KB는 청주 팬들에게 희망이요 사랑이었다.


지금이야 KB의 로고와 선수들을 촬영한 배너가 뒤덮고 있지만 원래 청주체육관은 남자 프로농구 SK나이츠의 홈구장이었다. 1997년 말 프로 2번째 시즌부터 참가한 SK는 서장훈(은퇴) 등의 활약으로 2000년 봄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등 강팀의 면모를 갖춰가며 청주 팬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꼭 20년전인 2001년 봄 SK는 소정의 부담금을 내고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 이후 오늘까지 ‘서울’ SK나이츠로 불리고 있다. 물론 ‘야반도주’ 수준의 연고지 이전을 ‘질러버린’ 모 구단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청주 팬들은 적지 않게 실망했고 그렇게 한동안 청주 체육관은 농구를 잊고 농구와 떨어져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중 2011년 KB스타즈라는 이름의 노란색 ‘꼬까옷’을 차려입은 자매들이 천안에서 이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인구 80만의 도청 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유일하게 자리잡은 연고 구단이기에 KB스타즈를 아끼는 청주 팬들의 마음은 각별하다. 게다가 2019년에는 통합 우승까지 안겨줬으니 이런 복덩이가 따로 없다. 실제로 직관해 보니 청주의 팬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광적이며 단단했다. 그리고 선수들 역시 청주에서 유난히 힘을 내고 남다른 정신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좋은 것이 정말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모습의 예를 든다면 KB스타즈와 청주를 말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경기 종료 후 퇴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승리의 여운에 젖어 행복하고 들뜬 얼굴로 경기를 ‘리뷰’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며칠 전에 비해 한층 따뜻해진 밤 공기가 얼굴에 닿으니 이젠 정말 봄이 가까이 왔음이 느껴졌다. 여자 농구도 드디어 관중을 맞이하며 이제야 그토록 길었던 ‘불 꺼진 공연장’ 신세를 면하기 시작했다. 비록 시즌 종료까지 많아야 두 경기를 앞둔 시점이라 아쉬움도 크지만 이렇게라도 희망의 신호탄을 쏘았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흐뭇하다. 연일 펼쳐지는 역대급 명승부를 지켜보는 올 봄 농구팬이란 것이 자랑스럽고 이것이 ‘조선의 여자 농구’라고 외치는 선수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처음으로 지켜본 파이널의 설레는 현장을 뒤로 하고 차를 몰아 체육관을 나섰다. 시내에도 걸려있는 KB선수들의 배너에 감사를 담은 취침 인사를 건네며 나는 청주로부터 멀어져갔다.



이 글을 쓰는 시점 이전에 이미 4차전까지 치러졌고 KB가 다시 승리하며 이제 시리즈의 승부는 5차전에서 결정나게 되었습니다. 30년 넘게 국내외의 온갖 농구 경기를 봐왔지만 이런 수준높고 가슴 뭉클한 시리즈는 처음입니다. 4차전을 중계한 KBS N스포츠의 손대범 해설위원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현장에서 선수들의 투혼을 보면서 냉정해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두 팀 선수들을 보면서 눈이 뜨거워졌다’고 털어놨습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선의 농구팬’임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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