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김보미, 1998년의 허재를 소환하다
1998년 4월 7일 저녁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프로농구(KBL) 챔피언 결정전 5차전 4쿼터,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의 허재는 림 정면으로 돌파하여 레이업슛을 성공시켰다. 이것이 곧바로 결승 득점이 되어 기아는 대전 현대(현 전주 KCC)를 86대 84로 물리치며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허재의 왼손엔 붕대가 감겨져 있었으며 이마엔 지혈한 흔적마저 뚜렷했다. 챔피언 결정전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경기에 나오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그는 거의 풀타임을 소화하며 팀의 승리까지 이끌었다.
아쉽게도 당시 떠오르는 젊은 강호 현대의 상승세를 허재와 기아는 더 이상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남은 2경기를 모두 가져간 현대가 KBL의 두 번째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7차전 직후 기자단 투표로 챔피언 결정전 MVP가 발표되었는데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준우승한 기아의 허재였다. 하지만 시리즈의 7경기를 지켜본 팬들은 물론이고 상대팀인 현대의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마저도 이 투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이제는 한물 갔다고 여겼던 34세의 ‘농구 대통령’이 보여준 탁월하고도 압도적인 경기력에 한국 농구계는 감탄을 넘어 경외의 시선마저 보냈다.
https://youtu.be/q_vHn2Ec3ag
정규리그 1위 현대에 비해 3위 기아는 6강 플레이오프부터 치르고 올라왔는데다가 주력 선수인 허재와 강동희는 30대를 넘긴 노장이었다. 게다가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마저 ‘태업’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파이널에 결장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국내 프로농구에서 외국인 선수가 차지하는 전력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기아는 ‘차’나 ‘포’ 중 하나를 떼고 시리즈에 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기아는 대전에서 열린 1,2차전을 모두 잡아내는 등 놀라운 경기력을 과시하며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 가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녹슬지 않은, 아직 죽지 않은 허재가 있었던 것이다. 농구는 물론이고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에서 파이널 준우승팀 선수가 시리즈MVP를 차지한 경우는 지금껏 허재가 유일무이하다. 그렇게 1998년 봄은 한국 농구 역사에서 충격과 아쉬움, 감동이 뒤섞였던 날들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23년 뒤인 2021년 3월 15일 용인에서 열린 2020-21 여자프로농구(WKBL) 파이널 5차전에서 용인 삼성생명은 청주 KB를 74:57로 물리치고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챔피언에 올랐다. 여자 프로농구는 물론이고 한국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정규리그 4위 팀이 우승한 것은 역대 최초이다. 삼성생명 구단으로서도 15년만에 우승한 터라 그 기쁨은 남달랐다. 뿐만 아니라 부임 6년만에 감독으로서 첫 우승을 달성한 임근배 감독, 한 번의 은퇴를 딛고 돌아와 파이널 MVP에 오른 노장 김한별, 주전 센터 및 주장으로서 팀을 견인한 배혜윤, 유망주 티를 완전히 벗고 국가대표급 가드로 거듭난 윤예빈 등 삼성생명 선수단 모두에게 2021년의 봄은 커리어는 물론 평생에 잊지 못할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비록 패했지만 최후까지 맞서 싸우며 파이널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 KB 역시 준우승팀이라는 결과만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겼다.
하지만 정규리그 막판에서 플레이오프, 파이널을 거치며 삼성생명을 이끈 이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코 영광의 봄을 말할 수 없다. 매경기 풀타임에 가깝게 출전하면서도 경기에서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고 볼의 흐름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으며 결정적인 빅샷(Big Shot)까지 곁들였다. 상대의 젊은 선수들과의 거친 몸싸움에 결코 밀리지 않았고 작전 시간의 짧은 틈을 이용해 코트에 누워버릴 정도로 모든 기운을 소진했지만, 가야 할 길이 놓여있었고 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다시 일어나 뛰었고 동료들을 다독였다. 이미 그녀의 진가는 플레이오프에서도 인정받은 바 있다. 상대팀인 우리은행의 위성우 감독은 ‘상대팀이지만 우리 팀의 어린 선수들이 저 언니를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녀에게 진심어린 갈채를 보냈다.
초인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에너지로 자신과 팀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 이 사람, 그녀는 바로 삼성생명의 36세의 큰언니이자 영혼의 리더 김보미이다.
코트에서 김보미의 존재 여부는 삼성생명의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단적인 예로 3차전 3쿼터 초반 김보미가 5반칙 퇴장당하자 삼성생명은 추격의 동력을 잃고 결국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게다가 김보미는 그저 궂은 일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파이널 5경기에 모두 출전해 경기당 30분이 넘는 긴 시간을 뛰었고 본인의 정규리그 기록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평균 12점을 올렸다. 기록상으로도 분명히 상대방에게 위협이 될만한 활약을 한 것이다.
이미 은퇴를 예고한 김보미는 필생의 숙원을 이룬 채 환하게 웃으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다음 시즌부터는 선수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겠지만 그녀가 보여준 투혼은 식어가던 여자농구의 인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부쩍 오른 이번 시리즈의 시청률 및 연일 쏟아져 나온 미디어의 여자농구 관련 기사 등이 이를 증명했으며 한정된 인원에게만 허락된 경기 티켓은 배부와 동시에 매진되었다.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의 동료라 할 수 있는 남자농구 선수들조차 이번 시리즈와 김보미의 스토리에 크게 감동했다는 후문이다.
하나 더 첨언하면 김보미는 이번 시리즈에서 시전한 ‘참교육’을 통해 모든 제품과 서비스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품질’보다는 ‘감동’임을 증명했다. 물론 김보미의 경기력도 우수했지만(Good) 그녀가 경기에 임하는 태도가 준 감동은 위대하다는(Great) 찬사를 받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전적으로 그녀 본인이 만들어 낸 고유한 이야기에서 나왔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으신 작가님들을 포함한 독자들 그리고 한국 농구를 지켜봐온 팬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김보미를 허재에 비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각각의 파이널에서 기아와 삼성생명이 달성한 결과는 서로 달랐고 개인의 희비도 엇갈렸는데, 두 사람을 엮어서 얘기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사실 나 역시 글을 쓰기 전 같은 이유로 조금 망설였다. 허재는 성인 무대에 데뷔한 이래 한국 남자농구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을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국제 대회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기량을 보여줬다. 전성기 기준으로 허재는 한국 농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비하면 김보미가 걸어온 길은 평범하기 그지 없다. 17년이라는 프로 생활 동안 특별한 개인 타이틀을 차지하거나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한 경험이 없으며 국가대표 경력도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및 2012년 런던올림픽 지역예선 정도가 전부이다(사실 국가대표에 아무나 선발될 수 없기 때문에 이 경력도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긴 하다). 게다가 1998년의 기아는 결국 준우승에 그쳤지만 허재는 MVP를 받았고 2021년의 삼성생명은 우승했지만 김보미의 개인 타이틀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선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도 있다. 굳이 비슷한 점을 따지자면 두 시리즈 모두 최종전까지 갔다는 것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번 시리즈를 지켜보며 줄곧 김보미의 모습 뒤로 허재를 떠올린 이유는 두 사람이 공히 팀 동료를 비롯한 모든 선수와 언론 그리고 팬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으며 시리즈 종료 전부터 소속팀의 승패와 상관없이 ‘이미 당신들은 승자입니다’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두 사람 모두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몸이 예전같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선수들을 압도하는 활동량으로 코트를 지배했다. 물론 기록상으로는 허재가 김보미보다 명백히 뛰어난 활약을 했지만 당시의 허재보다 지금의 김보미는 2살이나 많다. 체력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여자 선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김보미가 보여준 경기력을 허재의 그것보다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이유이다.
두 사건 혹은 사람이 시간차를 두고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현상을 일컬어 ‘평행이론의 법칙’이라고 한다.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기록과 결과만 놓고 보면 허재와 김보미의 경우를 평행이론의 틀을 빌려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각각의 업계에 끼친 공헌도를 기준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비슷한 존재감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허재가 프로농구 초창기의 인기에 불씨를 지폈다면, 김보미는 빈사 직전의 여자농구를 살려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겐 두 영웅이 23년의 세월을 두고 나란히 동행하는 그림이 참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당사자 본인들의 의견에 대해 상상해 봤다. 아마도 두 사람이 만난다면 서로에 대해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을 담아 예우하는 훈훈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불같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여유있게 과거를 돌아보는 허재와 열정과 겸손함으로 뭉쳐 살아온 김보미의 ‘투샷’에 홀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예상했던 선수들의 대성통곡은 간 데 없고 삼성생명 선수단 모두 밝은 미소로 축제를 즐겼습니다(물론 준우승에 그친 KB선수단은 아쉬움을 뒤로 하며 물러났죠). 괜히 홀로 눈가가 더워지고 모두 저와 같을 거라 설레발을 친 듯 해 민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쁨을 대하고 축제를 즐기는 방식이 젊은 세대를 위주로 확실히 변했다는 점을 고려하니 삼성생명의 태도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앞으로 이 젊은 선수들이 만들어갈 코트의 향연은 얼마나 박진감 넘치고 멋질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넘치는 기대감으로 다가올 가을 시즌의 개막을 기다려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