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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Mar 05. 2021

토니 파커, 농구의 프랑스 혁명을 완성하다

넷플릭스 ‘토니 파커 마지막 슛’ 리뷰

“축구에 가려져 있던 프랑스 농구의 저력이 나오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 1일 시드니(Sydney) 올림픽 남자 농구 결승전에서 후반전 프랑스가 미국을 4점차까지 추격하자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국내 방송사 해설 위원은 이같이 말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같은 해 7월 프랑스는 축구 유로2000에서 우승하며 1998 월드컵에 이어 메이저 대회를 2연패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 남자농구 국가 대표팀은 일명 ‘드림팀(Dream Team)’이라 불리며 압도적으로 강한 전력을 자랑한다. 국제 대회에서 우승은 ‘디폴트(default)’이고 단지 몇 점 차로 상대방을 이기느냐가 관건이 될 정도이다.

 그런데 NBA 선수 하나 없는 프랑스는 조직적인 움직임과 정확한 외곽슛으로 절대 강자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하며 간담을 서늘케 했다. 비록 ‘대오각성’한 미국이 85:75로 승리하며 우승했지만 경기를 지켜본 세계의 농구팬들에게 프랑스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농구의 ‘프랑스 혁명’은 아쉽게 불발에 그쳤다(참고로 이 대회에서 미국과 프랑스는 예선에서도 대결했었고 그 유명한 빈스 카터(Vince Carter)의 ‘인간 뛰어넘기’ 덩크슛이 나온 것이 바로 그 예선 경기이다).


https://youtu.be/YBZGFNgCfwA

결승전 ‘초미니 요약’ 영상. 프랑스는 분전했지만 10점차로 분루를 삼켰다



https://youtu.be/WihbbVEmppI

빈스 카터의 괴수 덩크. 참고로 ‘희생양’이 된 프랑스 센터 프레데릭 웨이스는 카터보다 무려 18cm가 크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7년 6월 14일 미국 클리블랜드(Cleveland)의 퀴큰 론즈 아레나(Quicken Loans Arena)에서 열린 2006-07 NBA 파이널 4차전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즈(San Antonio Spurs)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Cleveland Cavaliers)에 83대 82로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 4대 0으로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리고 경기 후 발표된 파이널 MVP는 당시 25세의 샌안토니오의 프랑스 출신의 포인트 가드 토니 파커(Tony Parker)였다. 미국에 진출한 지 햇수로 7년만에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이다. 파이널 MVP에 유럽 출신 선수가 선정된 것은 파커가 최초였다. 이렇게 프랑스 농구는 토니 파커라는 월드 스타를 통해 지난날 못이룬 ‘미국 침공’의 꿈을 간접적으로나마 이루게 된다.


참고로 NBA는 정규 시즌에 비해 플레이오프 및 파이널의 긴장감과 치열함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그 모든 중압감과 상대의 집중 견제를 이겨내고 명실상부한 NBA 최고 클래스의 선수로 등극했음을 뜻한다.


https://youtu.be/kCruBx2YXIY




 물론 토니 파커가 NBA 진출 초창기부터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2001년 전체 28순위로 샌안토니오에 지명될 때만 해도 미국에서 유럽 출신 선수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했으며 파커의 포지션인 포인트 가드는 미국 선수들의 전유물이었다. 게다가 파커를 지명한 샌안토니오는 데이비드 로빈슨(David Robinson)과 팀 던컨(Tim Duncan) 등의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한 강팀이었고 당장 우승이 필요한 입장이라 유망주를 양성할 여유가 없었다. 그렉 포포비치(Gregg Popovich) 감독 역시 파커의 기량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파커는 NBA에서 18시즌을 뛰며 팀의 4번의 우승(2003, 2005, 2007, 2014)을 이끌며 샌안토니오 뿐만 아니라 NBA의 전설이 되었고 그의 백넘버 9번은 영구 결번(Retired Number)로 지정되어 샌안토니오의 홈구장 AT&T 센터에 당당히 걸려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토니 파커 마지막 슛’(Tony Parker : The Final Shot)은 유년기부터 NBA 은퇴에 이른 현재까지 파커가 걸어온 이 놀랍고도 웅장한 그러나 묵직한 여정을 역동적이면서도 담담히 그려낸다. 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19세 프랑스 소년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 것일까?








 토니 파커는 1982년 5월 17일 벨기에의 브뤼헤(Brug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인 농구 선수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리고 파커는 프랑스에서 성장한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혼합된 유럽의 여느 가정처럼 파커는 부모로부터 각각의 장점을 흡수했다. 아버지로부터는 자신감 넘치는 당당함을, 어머니로부터는 차분함과 침착함을 배웠고 이는 훗날 파커가 큰 무대에서 흔들림없이 뛸 수 있었던 정신적 토대가 된다.


 1992년 당시 10살이던 파커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 시카고(Chicago)의 유나이티드 센터(United Center)에서 그 유명한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의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의 경기를 관전하게 된다. 경기 후 운좋게도 같이 사진까지 찍게 되었고 조던에 흠뻑 빠진 소년 파커는 훗날 꼭 NBA에 진출하리라 다짐한다.


 유소년 레벨에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파커는 15살이 되던 1997년 노르밍디의 집을 떠나 파리의 체육 전문 학교 인셉(L’Insep, L’école de l’excellence du basketball Français)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만난 동창 보리스 디아우(Boris Diaw), 로니 투리아프(Ronny Turiaf)와는 평생의 벗이 되었다. 훗날 이들은 모두 NBA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성인 국가대표팀에서도 파커와 뭉쳐 프랑스의 전성 시대를 이끈다. 마치 10대 시절 세계 청소년대회 우승부터 시작해 한국 야구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1982년생들’(이대호, 김태균, 추신수, 정근우 등)처럼 이들은 지금까지도 절친으로 남아 우정을 나누고 있다.


마이클 조던을 만난 소년 시절의 파커 형제들


10대에 처음 만나 30대 후반의 아재가 되기까지 이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있다.









 인셉 졸업 후 파커는 프랑스 프로 구단 PSG에 입단하여 2시즌을 뛰고 NBA 드래프트에 도전한다. 스피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이런 스타일이면 미국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파커의 가치는 미국 시장에서 높이 평가받지 못했고 팀에서의 적응 과정은 쉽지 않았다. 2001-02 시즌 개막 직후 5경기만에 주전으로 출장하게 되었지만 포포비치 감독은 파커를 혹독하게 조련했고 작은 실수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파커가 포포비치 감독의 눈물을 쏙 뺄듯한 질책에 주눅들어 힘들어 할 때 프랑스의 축구 스타 티에리 앙리(Thierry Henry)는 파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힘이 되어준다. 앙리는 훗날 파커가 큰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재활할 때에도 곁에서 지켜준 진정한 절친이다. 결국 파커는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배짱있는 팀의 주전 가드로 거듭난다.


스포츠 팬이라면 심쿵할 ‘흔한 투샷’. 이정재와 정우성처럼 그들은 와인처럼 숙성된 우정을 자랑한다.


적응을 마친 파커는 당당하고 용감하게 코트를 누빈다. 2년차인 2002-03 시즌 스퍼스는 4년만에 NBA 정상에 오르고 이 우승은 프랑스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축구에만 열광하던 프랑스인들이 농구 선수 파커를 주목하는 계기가 된다. 2005년과 2007년, 2014년에도 파커는 팀 던컨, 마누 지노빌리(Manu Ginobili)와 힘을 합쳐 팀을 우승시킨다(2014년 우승 멤버에는 절친 보리스 디아우도 포함되어 있다). 셋 모두 내로라하는 리그의 정상급 선수들이었지만 한결같이 이타적인 태도로 팀의 우승이란 목표 앞에 협조하고 희생한 결과였다.


샌안토니오의 ‘리즈 시절’의 주역 3인방.










 NBA는 정규 시즌에만 82경기를 치르는 장기 레이스이며 주전 및 주요 식스맨들의 연봉도 천문학적으로 높다. 때문에 일부 선수들은 부상의 위험 및 훈련 부족 등의 이유를 들어 시즌이 끝난 후 치러지는 국제 대회에 자국 대표로 출전하기를 꺼리기도 하며 구단 역시 선수 보호 및 관리 차원에서 국가대표 차출에 난색을 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토니 파커에게 국가 대표란 NBA에서의 커리어 못지 않게 소중했으며 샌안토니오를 좋아했지만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늘 잊지 않았다. 이 다큐에서 파커가 시종일관 프랑스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프랑스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파커는 할 수만 있다면 프랑스의 국제 대회 우승과 NBA 챔피언 반지를 기꺼이 바꾸겠다고 말할만큼 국가 대표를 소중히 여겼고 기꺼이 헌신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프랑스 농구의 홍보대사라 자칭할 정도였다. 그런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파커는 국가대표에 합류한 2001년 이래 10여년간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동안 2년에 한 번 치러지는 유로 바스켓(Euro Basket)과 4년에 한 번 치러지는 올림픽에 빠짐없이 참여하고도 말이다.


 특히 유로 바스켓에서의 거듭된 좌절은 파커에게 남달리 진한 아쉬움을 남겼는데, 결정적인 승부에서 번번히 프랑스의 발목을 잡은 팀이 있었으니 바로 ‘무적함대’ 스페인이었다. NBA만큼 국내 농구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 2000년대 이후 치러진 프랑스와 스페인의 농구 라이벌 매치(강조하지만 축구가 아니다!!)에 얽힌 서사에는 따로 글 한 편을 써도 모자랄만큼 수많은 사연이 존재한다. 단적인 예로 양팀 선수들은 친선 경기에서조차 과한 승부욕 때문에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오랜 시간 스페인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파우 가솔(Pau Gasol)은 한때 샌안토니오에서 파커와 같이 뛰기도 했다).


https://youtu.be/xc2TUCVg-F8

파커의 프랑스도 강했지만 스페인은 더 강했다. 2011 유로바스켓 결승에서 프랑스를 꺾고 우승한 스페인



 슬로베니아에서 치러진 2013년 유로 바스켓 4강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다시 만난다. 이전의 거듭된 패배에 위축된 탓인지 이번에도 프랑스는 전반 내내 스페인에 밀린다. 그런데 후반에 돌입하자 갑자기 경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결국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프랑스는 75:72로 스페인을 누르고 결승에 진출한다. 하프 타임에 파커가 동료들에게 ‘일장 훈시’를 시전하며 정신 교육을 실시한 덕분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2013년 라커룸 스피치’인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뱅상 콜레(Vincent Collet) 감독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이미 파커가 하고 있어 그냥 들었다고 한다)


 Faut qu’on se réveille les gars!
Franchement on joue comme si on avait peur
Ils nous dominent parce qu’ils pensent qu’on est de la merde!
Et ça se voit sur leurs visages~~

왜들 이렇게 겁먹은 채 경기를 뛰고 있어!
스페인이 우리를 호구로 생각하고 있잖아!
표정 보면 알잖아! 우리를 깔보고 있다고!


https://youtu.be/OPcJaSc_s6Q

리더란 필요할 때 팀을 휘어잡고 자극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날 파커의 분노는 프랑스를 깨웠다.


여세를 몰아 프랑스는 결승에서 만난 리투아니아마저 제압하고 우승한다. 이는 프랑스 남자 농구가 국제 대회에서 이룬 최초의 우승이었다. 생각지 못했던 쾌거에 프랑스 국민들은 열광했고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우승 멤버들을 엘리제 궁에 초청하기까지 한다.

 또한 대표팀에서의 경험과 성공을 토대로 파커는 홀로 팀을 이끄는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현명하게 팀에 공헌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포비치 감독은 파커의 성장을 인정하고 스퍼스의 주장을 맡기기도 했다.









영원히 샌안토니오에 남을 것 같았던 파커는 2018년 여름 동부의 샬럿 호네츠(Charlotte Hornets)로 이적한다. 스퍼스에 남아 후보 신세를 면치 못하느니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스퍼스와 파커가 서로에 실망해서 이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프로 세계에서의 비즈니스 논리에 따랐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파커에게 호네츠 입단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호네츠의 사장 마이클 조던이라는 것이다. 조던을 동경해 NBA까지 온 파커는 말년에 결국 조던과 잠시 함께 하게 된다. 호네츠에서도 파커는 당당한 존재감을 뽐냈고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며 젊은 선수들을 이끌었다. 파커와 함께 뛴 가드 켐바 워커(Kemba Walker)는 파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조언을 들은 데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워커 역시 현재 NBA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하나이다).


1년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커는 샬럿의 젊은 선수들에게 좋은 멘토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2019년 여름 파커는 전격 은퇴를 선언한다. 물론 몸 상태나 기량으로만 볼 때 더 뛸 수도 있었지만 많은 것을 이뤘고 후회 없는 이 시점에서 그만 내려오기로 한 것이다. 샌안토니오와 프랑스의 레전드의 퇴장에 많은 농구팬들은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그의 미래에 축복을 기원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은퇴 후에도 파커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제2의 인생을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 고국 프랑스 리옹(Lyon)에 스포츠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프랑스 프로 리그의 아스벨 농구단을 인수하여 우승팀으로 키워냈다. 프랑스 정부는 파커의 이런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Légion d'honneur Chevalier) 훈장을 수여한다. 또한 중국 시장에도 꾸준히 관심을 표하며 본인의 브랜드 확장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토니 파커, 그는 분명 프랑스 농구에 나타난 축복받은 재능이었다. 하지만 재능만으로 파커가 이룬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인셉 재학 시절엔 휴가철에도 홀로 남아 연습에 매진했고 2005년 두 번째 NBA 우승이라는 큰 성공을 달성한 후에도 피나는 노력으로 슛폼 변경에 성공했으며 두 발로 성공시키는 티어 드랍(Tear Drop, 장신 수비수들의 블록을 피하기 위해 높이 볼을 띄워 넣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2017년 35세 때 시즌 아웃이 유력한 큰 부상을 입고도 피나는 재활을 통해 6개월만에 복귀하기도 했다. 현재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 중 상당수가 NBA에서 뛰고 있는데 이는 그가 먼저 일구어 놓은 업적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리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동료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의 존재는 그가 좋은 선수 이전에 좋은 사람임을 말해 준다.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AT&T 센터에서의 영구 결번 의식 및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벌이는 즐거운 파티는 그의 올바른 인성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성공의 가장 찬란한 열매는 소중한 사람들과 맺는 좋은 관계라는 것을 토니 파커의 39년의 삶이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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