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재패한 신인, 그들은 누구인가?
모든 프로 스포츠에서는 시즌이 끝나면 각종 부문 시상을 한다. 이 중 오직 한 번만 수상이 가능한 부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인상이다. 말 그대로 올해 입단한(혹은 그에 준하는 자격을 지닌) 신인들 중 가장 우수한 기량을 선보인 선수를 가려내 시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인상’이라는 용어와 그 자격 요건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이제 갓 입단한 신인임을 감안하여 시상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미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배들의 실력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처음 입단한 친구가 이 정도 하는 게 어디냐며 주는 의미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본래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며 데뷔 첫 해에 신인상은 물론 최우수선수(MVP)까지 휩쓴다면 어떨까? 40년 가까이 되어가는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에서 이러한 ‘천하통일 신인’의 사례는 3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후 해당 종목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너도 나도 하늘도 땅도 놀라게 한 그들의 강렬한 첫 등장은 과연 어떤 서사를 만들어냈던 것일까?
2006시즌 개막 직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4강 진출의 성과를 거두며 흥행의 기대에 부풀어 있던 프로야구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신인은 KIA가 10억원의 계약금을 안기며 전체 1순위로 야심차게 영입한 한기주였다(애기야 가자!). 인천 동산고의 류현진 역시 1학년때부터 에이스로 활약하며 준수한 기량을 선보였으나 팔꿈치 수술(a.k.a Tommy John Surgery)경력이 걸림돌이 되는 바람에 앞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SK와 롯데는 각각 포수 이재원과 투수 나승현을 지명하며 류현진을 지나쳐 버린다. 결국 한화는 생각지도 못했던 유망주를 얻는 행운을 잡게 되고 이 만남은 해당 시즌에 그야말로 ‘대폭풍’을 몰고 온다.
4월 12일 잠실 LG전에서 첫 선발등판한 류현진은 7이닝 동안 탈삼진 10개를 기록하며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데뷔 신고를 한다. 이후 3번째 등판만에 완투승을 기록했고 당시 팀 선배 구대성에게 전수받은 서클 체인지업을 무기 삼아 신인을 넘어 리그 전체의 정상급 투수로 떠오르며 승승장구한다. 시즌을 치르며 몇 차례의 고비가 있었지만 무사히 극복했고 결국 류현진은 201이닝 204탈삼진, 18승 6패, 평균자책점 2.23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을 달성한다. 너무도 당연히 신인왕을 수상했고(놀랍게도 신인왕 투표 결과가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투수 골든 글러브와 함께 신인 최초로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며 새 역사를 쓴다. 신인에게 MVP까지는 주지 않는 KBO의 관습법이자 불문율을 대번에 무너뜨린 것이다. 참고로 2006년엔 타격 부문에서도 이대호(당시 롯데)가 트리플 크라운(타율, 홈런, 타점)을 차지했으나 기록의 화려함과 임팩트(26홈런과 88타점에 불과했다)에서 류현진에게 한참 못미쳤다.
당시 한화는 시즌 직전 대표팀을 WBC 4강으로 이끈 ‘덕장’ 김인식 감독이 유임했고 1999년 우승 주역인 투수 3인방 송진우, 정민철, 구대성이 다시 모였으며 타선에도 기존의 스타 김태균과 이범호 및 검증된 외국인 데이비스까지 포진하고 있었다. 여기에 류현진까지 힘을 보태며 탄탄한 전력을 구축한 한화는 정규리그 3위로 포스트시즌에 오른 후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서 삼성과 대결하게 된다. 다만 시즌 내내 강행군했던 탓인지 류현진은 포스트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는 다소 부진했으며 한화 역시 정규리그 1위 삼성의 막강한 전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이 때 이후 한화는 아직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 무대에 완벽히 적응을 끝낸 류현진은 이후에도 한화의 독보적인 에이스로 자리를 굳혔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한국의 9전 전승 우승에 공헌했고, 결승전 승리 투수가 되기도 했다. 비록 팀 성적이 따라주지 않는 바람에 ‘소년 가장’이라는 웃프고 달갑지 못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류현진의 기량과 경험치는 계속 상승했고, 결국 2012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본인의 가치를 당당히 인정받고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입성한다. 이후 LA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거치며 MLB에서도 선발 투수로 자리를 굳혔다. 2018년에는 스포츠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배지현과 결혼에 골인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겁없던 20살 소년은 이제 30대 중반의 베테랑이 되었지만 전성기의 종말을 논하기엔 이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여전히 류현진은 위력적인 구위를 자랑하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안정을 찾은 류현진이 내년 시즌 토론토에서 보여줄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흥국생명은 실업 시절인 1991년부터 구단을 운영했지만 2005년 프로 출범 전까지는 존재감이 매우 미미한 팀이었다. 프로 원년이었던 2005 시즌에도 고전을 면치 못하며 최하위를 기록했는데 이로 인해 신인 1순위 지명권을 얻었고(최하위를 기록한 과정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초고교급 선수로 꼽히며 이미 국가대표 데뷔전까지 치른 김연경을 지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흥국생명은 여자배구의 강호로 자리를 굳히며 그야말로 ‘팔자를 고치게’ 된다.
김연경과 함께 한 흥국생명은 초반부터 선두를 질주한다. 김연경 개인 역시 시즌 초반인 2005년 12월부터 투표인단 만장일치로 월간 MVP에 선정되며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프로의 장기 레이스를 처음 치른 김연경은 시즌 중후반부터 체력 고갈로 다소 부진하기도 했으나, 흥국생명이 결국 정규리그 1위로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한 덕분에 10여일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정규리그에서 김연경은 경기당 평균 27득점으로 득점왕에 오른 것을 비롯해 공격-공격성공률-서브까지 공격 3개 부문에서도 정상에 섰고, 프로 데뷔 시즌에 신인왕과 정규 리그 MVP를 동시에 휩쓴다.
여기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류현진과 비슷하다. 하지만 아쉽게 한국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신 류현진과는 달리 김연경은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흥국생명은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도로공사를 3승 2패로 물리치며 시즌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데, 이는 실업 시절을 포함하여 첫 우승 이었다. 김연경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양팀 통틀어 최다인 154득점을 올리며 팀을 이끌었고 결국 챔피언 결정전 MVP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모든 프로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데뷔 시즌에 신인왕-정규시즌 MVP-파이널 MVP 모두를 차지한 경우는 지금껏 김연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후 국내 무대에서 2번의 우승을 더 달성한 김연경은 2009년 봄 일본 JT마블러스에 입단하며 해외 진출을 선언한다. 그리고 2011년 유럽 정상급 리그인 터키 무대로 진출하여 페네르바체와 엑자시바시 등 명문 클럽에서 활약한다. 192cm의 장신에 다양한 공격 기술과 수비력, 강한 승부욕까지 갖춘 김연경은 국제 무대에서 경험까지 쌓으며 그야말로 급이 다른 차원의 선수가 되었다. 또한 김연경은 시즌 종료 후 매년 국가대표 소집에 빠짐없이 응하며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대표팀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고 급기야 올림픽 MVP로 선정된 것은 김연경 개인과 대한민국 배구계에 잊지 못할 크나큰 영광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SNS와 본인의 유튜브 채널, 방송 출연을 통해 팬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국민적 호감을 한 몸에 받고 있다.
2020년 6월 김연경은 10여년에 걸친 해외 생활을 마감하고 전 소속팀 흥국생명으로 복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 과정에서 팀의 샐러리캡을 고려해 자진하여 연봉 삭감을 받아들이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연경은 8월 하순 2020 제천·MG새마을금고컵 프로배구대회에서 공식적인 국내 복귀전을 치르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다. 비록 흥국생명이 결승에서 GS칼텍스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김연경이 이대로 물러날 것이라 섣불리 예상하는 배구 관계자와 팬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많은 배구팬들은 김연경이 과연 ‘흥국생명 2기’에서도 절대지존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를 궁금해하며 손꼽아 시즌을 기다리고 있다.
2000년 11월 치러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김승현은 3순위로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 지명되었다. 대학 시절 우수한 기량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178cm에 불과한 단신인데다가 소속팀 동국대가 대학 무대에서 약체였던 탓에 김승현은 저평가되었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동양은 직전 시즌 최하위를 기록했고 오프 시즌 동안 별다른 전력 보강이 없어 차기 시즌 전망도 결코 밝지 않았다.
하지만 ‘매직 핸드’ 김승현이 코트에 나서며 이 모든 예상은 한순간에 빗나가게 된다. 김승현은 데뷔전부터15득점 10어시스트로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시즌 내내 탈신인급 활약을 했고, 결국 동양은 36승 18패로 정규시즌 1위에 등극한다. 전시즌 최하위 팀의 믿을 수 없는 변신이었다. 그 해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꼽힌 팀 동료 마르커스 힉스는 개인기도 탁월했지만 김승현의 환상적인 어시스트 덕분에 더욱 수월하게 코트를 지배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외국인 선수 라이언 페리맨은 리바운드 왕에 올랐고 기존의 전희철, 김병철도 변함없는 기량을 선보이며 동양의 1위에 기여했다. 정규 시즌 종료 후 김승현의 기록은 12.2득점 8어시스트 3.2스틸(이상 경기당 기록)이었고, 신인왕과 정규시즌 MVP를 동시에 수상한다. 김승현의 사례 역시 지금껏 KBL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여기에 BEST 5, 어시스트상, 스틸상까지 수상하며 한국 농구를 그야말로 접수한다.
동양은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 결정전에서 서울 SK와 맞붙는다. SK에는 최고의 센터 서장훈과 국가대표 슈터 조상현이 버티고 있었고, 양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진검승부를 펼치는데, 김승현은 변함없는 활약으로 팀을 지휘했고 결국 동양이 4승 3패로 승리하며 프로 첫 우승이자 통합 우승을 달성한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김승현은 그 해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선발된다.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패색이 짙던 경기 종료 막판 투입된 김승현은 결정적인 스틸에 이은 득점을 하며 종료 1분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7점 차로 뒤져있던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결국 연장전에서 대표팀은 거짓말같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20년만에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한다. 다른 선수들은 은퇴할 때까지 그 중 하나조차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김승현은 프로 입성 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모두 이룬 것이다.
김승현은 이듬해에도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동양을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마르커스 힉스를 비롯해 네이트 존슨, 아이라 클라크, 피트 마이클 등 최고의 외국인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오리온스 또한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명문 구단으로 올라선다. 2004-2005시즌엔 경기당 평균 10.5어시스트라는 ‘엽기적인’ 기록으로 최초의 평균 두 자리수 어시스트왕에 오르기도 한다(해당 시즌 한 경기에서 23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패스로 경기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성기의 김승현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충격적이고 놀라웠다. 단신이었지만 탄탄한 힘과 스피드, 안정적인 바디 밸런스를 겸비해 상대팀 가드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김승현은 30세 무렵부터 허리 부상으로 부진에 빠졌고 이와 더불어 오리온스도 하위권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9년 무렵 불거진 이면계약 파동으로 인해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결국 KBL로부터 임의 탈퇴라는 사실상 무기한 선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게된다. 우여곡절 끝에 임의탈퇴가 해제되고 2011년 말 서울 삼성으로 이적하지만 이후 인상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2014년 봄 은퇴한다.
전성기가 짧았고 선수 말년의 커리어 및 은퇴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많은 팬들은 김승현의 플레이를 그리워하며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김승현의 재능은 한국 농구계에서 독보적이었고 리그와 국제 대회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남달랐다. 하지만 본인의 자기 관리가 조금 더 철저했더라면 더 오래 정상에 군림할 수 있었을 거란 의견도 많다. 2019년 프로농구 경기 해설 도중 팬서비스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경솔하게 표현하여 큰 논란을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김승현은 농구팬들에게 애증의 존재로 남아 있지만, 그가 농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많아 보인다. 은퇴 후 김승현은 경기 해설과 농구 예능 콘텐츠 등을 통해 팬들과 소통을 이어가며 현역 때의 경기 스타일처럼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더 체계적이면서도 친근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본인의 노하우를 풀어낸다면 분명 한국 농구계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1995년 말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단 태평양 돌핀스를 현대그룹이 인수하면서 현대 유니콘스가 출범한다. 광주제일고 시절부터 ‘동급 최강’의 기량을 선보였던 박재홍은 1992년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로 진학했고, 졸업 후 해태와 현대가 지명권을 포함한 트레이드를 단행한 덕분에 당시 신인 야수 최대 계약금이었던 4억 3000만원을 받고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다.
1996년 시즌이 시작되자 박재홍은 당해 신인들은 물론이고 기존의 거포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시즌이 끝났을 때 박재홍의 주요 기록은 타율 0.295 30홈런 108타점 36도루였는데 홈런과 타점은 1위였고 도루도 4위에 해당했다(이종범만 아니었으면). 홈런과 도루 모두 30개 이상을 기록하여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30-30 클럽에 가입했고 신인왕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신인왕에 올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프로 입단 전 각종 사정으로 겨울에 전지 훈련을 가지 못해 오직 개인 훈련만 하고 이런 파격적인 성적을 냈다는 사실이다. 기록 자체만 놓고 볼 때, 그리고 약체로 분류되었던 현대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박재홍은 MVP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관행으로 인해 결국 박재홍은 고작(?) 신인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고 MVP는 다승과 세이브 및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한화 구대성에게 돌아갔다. 이런 불문율은 10년 후인 2006년에야 류현진에 의해 박재홍의 ‘못다한 꿈’이 이루어지며 비로소 깨지게 된다.
정규 시즌을 4위로 마친 현대는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해태 타이거즈와 격돌한다. 현대는 투수 정명원이 최초의 한국 시리즈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만만치 않은 경기력을 선보였으나, 당시 전성기에 있던 이종범과 이대진이 버틴 해태에겐 역부족이었고 결국 준우승에 그친다.
하지만 이후 박재홍은 현대 소속으로 두 번, SK소속으로 세 번의 한국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30-30 클럽에도 두 번 더 가입했다. 비록 선수생활 후반에는 다소 부진(?)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재홍이라는 이름값에 비해서였을 뿐이며, 30대 중반까지도 두 자리수 홈런을 쳐내는 등 만만치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2012년 시즌이 끝난 후 은퇴한 박재홍은 현재 해설위원으로 여전히 야구계에 몸담고 있는데 최근에는 예능에도 출연하며 팬들과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리틀 쿠바’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재홍은 역대 최고의 호타 준족으로 꼽히며 확고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선수였다. 아직도 그와 같은 장타력과 주력을 동시에 갖춘 타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박재홍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