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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Sep 01. 2020

‘회사’를 넘어 ‘업계’가 잘 나가는 이유

여자배구 전성시대의 비결을 밝히다

 남녀 프로배구는 정규 시즌 개막 전인 8월에 컵대회를 치른다. 유럽 축구의 FA컵보다는  ‘말랑’하지만 프로야구 시범 경기보다는 ‘엄근진’하기 때문에 나름의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하는 프리시즌 대회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당연히 물러갈 줄 알았던 코로나는 공교롭고 기구하게도 정확히 올해 프로배구 컵대회(정식명칭은 2020 제천-MG새마을금고컵 프로배구대회) 개막에 맞춰 5~6개월 전처럼 극성으로 치닫고 있다. 직관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고퀄’의 생중계는 그 동안의 ‘배구고픔’을 조금이나마 채워주고 있다(사실 지난 봄의 불가피한 리그 종료를 생각해 보면 배구를 한다는 자체만으로 다행이기도 하다).

 남자부 경기는 지난 주말로 종료되고 이제 막 여자부 경기가 시작됐는데, 특유의 아기자기한 박진감은 여전했다. 몇 년 전부터 여자배구는 흥행과 인지도에서 남자 배구를 넘었고, 프로스포츠 전체로 넓혀봐도 경쟁력있는 종목으로 도약했다. 지난 2012 런던 올림픽 4강 진출이 인기에 큰 호재로 작용했고 그 이후의 A매치나 국내 프로리그에서 보여준 경기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게다가 올해는 월드스타 김연경(a.k.a 식빵언니)까지 흥국생명으로 복귀했으니 이대로라면 다가오는 정규 리그의 전망도 밝아 보인다.



https://youtu.be/sL6j734fgYA

흥국생명과 김연경은 ‘해봐야 안다’며 엄살을 부리지만 그들의 독주를 제어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단지 경기력의 향상과 스타의 존재만으로 여자 배구의 흥행 비결을 한정지을 수 있을까? 1980~1990년대에도 여자 배구는 높은 경쟁력을 보유했었고 나름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현재의 인기는 그때와 비교할 때 좀 결이 다르다. ‘종목’을 넘어 ‘산업’의 차원에서 승승장구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이며, 모든 영역의  플레이어들 - 단지 선수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 이 제 몫을 하는 것을 넘어 서로가 정말 유기적으로 협조한다. 과연 잘 나가는 이 ‘업계’의 진정한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김연경 말고 우리들도 있다


 

 김연경이라는 최고 선수의 존재가 여자 배구의 전성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6개 구단 선수들이 풀어내는 많은 이야기 역시 김연경의 커리어 못지않게 흥미롭고 다채롭다. 이재영, 이다영(이상 흥국생명), 강소휘(GS칼텍스), 박정아(도로공사), 김희진(IBK 기업은행), 양효진(현대건설) 등은 소속팀 뿐만 아니라 국가 대표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으며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박혜민(GS칼텍스), 이주아, 박현주(이상 흥국생명), 정지윤, 이다현(이상 현대건설) 등의 젊은 선수들은 팀의 든든한 보살핌을 받으며 내일의 에이스가 되어가는 중이다. 또한 30대 중반의 나이에 미들블로커로 포지션 변경에 성공하며 국가대표까지 복귀한 한송이(KGC인삼공사), 40세까지 흔들림없는 실력을 보여주고 이제 막 은퇴한 이효희(도로공사 코치) 등 나이를 잊은 활약을 펼치는 베테랑들도 건재한다. 가끔 카메라에 잡히는 각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맡는 ‘흥부자’들까지 합세하면 경기장은 그야말로 ‘텐션’ 팽팽한 용광로가 된다. 약 2시간이 ‘순삭’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베테랑과 신인 모두 각자의 장점과 개성을 코트에서 한껏 분출한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빅딜이 속출하는 FA시장


 

 2020년 FA시장에서 국가대표 세터 이다영의 행방은 배구계 최대의 관심사였다. 현대건설 소속이었던 이다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라도 하듯 쌍둥이 자매이자 역시 국가대표 공격수인 이재영이 있는 흥국생명으로 이적하며 최고의 흥행 스토리를 만들었다(이후 김연경마저 국내 복귀를 결정한다). 이 외에도 역시 FA였던 조송화는 흥국생명에서 IBK 기업은행(이하 IBK)로 이적했으며 IBK 소속이었던 이나연은 보상선수 이동에 따라 현대건설로 옮겼다. 이 외에도 리베로 포지션의 신연경과 박상미도 각각 IBK와 흥국생명으로 옮기며 해당 구단의 전력에 보탬이 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비단 2020년만이 아니라 매해 여자배구의 FA시장에서는 예상을 넘어 반전에 가까운 이적이 있었다. 그것도 한송이,염혜선(KGC인삼공사), 박정아, 김수지, 표승주(이상 IBK), 황연주, 황민경, 고예림(이상 현대건설) 등 국가대표를 오가는 주전급 선수들의 이동이었기에 팬들이 체감하는 재미는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팀간 전력 격차를 줄이고 보완하는 결과로 이어질 때가 많았다. 리그에서 보여준 좋은 경기력의 원인이 반드시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에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핵심 전력 심지어 에이스의 이적도 여자배구 FA에선 종종 발생한다.



감독인가 엄빠인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 체육계에서 지도자란 엄하고 어려운 존재이다. 그리고 모두 그렇진 않지만 선수 위에 권위적으로 군림하며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최근에 불거진 한 실업팀 여성 선수의 자살은 체육계의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사건이다. 선수의 행복과 해당 종목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이런 부조리는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최근 여자 프로배구 6개 구단의 감독들에겐 이런 제왕적 독재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경기가 안 풀리더라도 감정적으로 흥분하거나 선수들에게 불필요하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이 사라졌으며(물론 선수들을 자극시키기 위한 격려섞인 독설은 예외이다), 선수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경기장을 벗어난 후 선수들이 천연덕스럽게 감독에게 장난을 치는 장면도 매우 흔해졌다. 감독이라기보다는 ‘엄마&아빠’를 연상시킬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경기 중엔 모두가 긴장하고 집중하며 실수를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크게 위축되지 않는다. 엄하게 대해야만 성과가 나온다는 체육계에 만연한 낡은 고정관념은 적어도 여자배구에선 자리를 잃은 듯 보인다.

 이러한 부드러운 리더십이 전 구단에 걸쳐 자리잡은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여성 지도자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세심하면서도 부드러운 ‘엄마 리더십’은 ‘요즘 아이들’이자 같은 여성인 선수들과의 원활한 소통에 공헌했다. 이는 남성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선수들의 심리적 안정으로 이어졌다. 흥국생명의 박미희 감독이 2014년부터 계속 재임 중인 이유가 비단 성적만은 아닐 것이다(물론 이 기간 동안 흥국생명도 최하위를 기록했던 시즌이 있었다).



https://youtu.be/Ix7nwcsnmdk

GS칼텍스 차상헌 감독과 강소휘의 ‘케미’는 가끔 부녀관계를 연상시킬 정도로 자연스럽다




중계석에서도 마음으로 동생들과 함께 뛰는 언니들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은 해설위원이 남성 일색이던 10여년 전부터 여자부 경기의 해설을 맡으며 충분한 ‘도제 수업’을 받았다. 당시에도 특유의 세심하고 정확한 분석은 배구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다(참고로 박미희 감독은 선수 시절에도 국가대표를 지낸 스타플레이어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은퇴한 여성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해설위원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현재 활동 중인 장소연, 이숙자, 한유미 위원은 최근까지 현역으로 뛴 감각을 살려 보다 쉽고도 정확한 해설로 팬들과 만나고 있다(김사니 위원은 최근 IBK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 중 한유미 위원은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게스트로 여러 선수들을 직접 초대하여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며 색다른 재미를 전달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 현역인 동생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언니의 모습은 팬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한유미 위원은 배구의 기본 규칙과 동작에 관한 콘텐츠도 만들고 있다). 이제 남성 해설 위원이 여자부 경기를 중계하는 것이 팬의 입장에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중계석에선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경기에 몰입하지만 코트로 내려오면 동생들을 반기며 격려해주는 따뜻한 언니로 돌아간다.







 

 

 물론 최근 다른 종목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만 유독 여자배구에서는 관계자 모두가 경력과 나이를 떠나 서로 공감하고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차가 조금 되는 선수들의 경우 같은 팀 뿐만 아니라 상대 팀 선수들과 지도자들, 해설위원들과도 친분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관계자 몇 명만 모여도 화기애애한 모임이 되는 경우가 많다(물론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봐서 이루어진다). 심지어 인터뷰하러 온 방송사의 아나운서들조차 즐거운 수다에 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한마디로 각자가 따로 논다는 느낌보다는 업계 전체가 잘 짜여진 하나의 팀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여자 배구는 스포츠라기보단 뮤지컬과 같은 종합 예술에 가깝게 느껴진다. 한 작품의 공연을 위해 배우와 스태프가 뜻을 모아 준비하고 실전에서 후회없이 연습한 바를 쏟아낸다. 눈을 뗄 수 없는 격렬한 박진감과 승부처에서의 두근거림이 있고 승자의 환호와 패자의 아쉬움이 교차한다. 계속 이 좋은 흐름을 이어간다면 색다른 프로스포츠의 발전 모델을 제시할 수 있고 하나의 행위 예술로 자리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팬의 입장에서도 이 중흥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하지만 배구계는 흥행을 기대하기에 앞서 반드시 해결하고 밝혀야 할 사안이 있다. 지난 7월 말의 충격적이고도 비통한 그 사건은 아직 진실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뭔가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심증’은 충분해 보인다. 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 할 고유민 사건



이유야 어쨌건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너무도 안타깝게 떠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 7월 31일 현대건설의 전 선수였던 고유민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만 2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처음에는 일부 잔인한 자들의(그들에게 팬이라는 칭호는 붙여주고 싶지 않다) 악성댓글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설이 돌았으나 고유민의 유족은 전 소속팀 현대건설의 비인간적인 처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법적 대응도 불사하고 있다.

 정확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 어느 한 쪽의 입장을 믿거나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현대건설의 소극적인 태도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이, 그것도 팀에서 7년을 활동했던 선수가 죽었다. 구단에 귀책사유가 있고 여부를 떠나서 유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지금의 태도만 봐서는 그렇다고 하기 힘들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란 말은 죽은 자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텐데 말이다.

 현대건설의 처신은 구단 뿐만 아니라 배구계 나아가서 한국 스포츠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문제를 명쾌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구단의 발목을 잡을 것이고 중흥기를 맞은 여자 배구의 흥행에도 악재가 될 것이다. 부디 진실이 밝혀져 안타깝게 떠난 한 젊은이의 영혼이 하늘에서 편히 쉬고 코트에 남은 선수들도 이전과 다름없이 좋은 경기를 보여주길 기원한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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