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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Aug 27. 2020

My Favorite EURO!

유로, 그 황홀하고도 낭만적인 전쟁

 8월 24일(한국시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이하 챔스리그) 결승의 승자는 바이에른 뮌헨(Bayern München)이었다. 2월에만 해도 이 빅매치를 무관중으로 볼 줄은 몰랐으나 이제 와서는 그저 끝까지 챔스리그가 완주했단 사실만으로도 다행스러울 정도이다. 파리 생제르맹(Paris Saint-Germain, PSG)은 최초의 챔스리그 우승 문턱에서 아쉽게 주저앉았다(하지만 음바페가 ‘빅 이어’(Big Ear)를 품에 안을 날은 곧 올 것 같다). 빅리그 클럽 경기를 안 본 지 오래되었는데 의외로 아는 선수들이 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봤다. 다음 메이저 대회를 즐기려면 지금부터 슬슬 얼굴들을 익혀야 할 것 같다.



https://youtu.be/GHAKxx77JWI

괜히 챔스리그 결승이 아니었다. 1대0이란 스코어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충분할 정도로 박진감 있었다.








 영상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지난 3월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회 창설 60주년을 맞아 6월에 유럽 전역 12개 도시에서 공동개최될 예정이었던 유로 2020이 코로나 19로 인해 - 3월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역에 연일 기록적인 수의 확진자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 1년 후로 연기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개인적으로 월드컵과 각국 리그의 클럽 대항전보다 유로를 더욱 ‘애정’하는 입장에서 적지 않게 아쉬웠다.
 2002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해외 축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무렵인 2000년 네덜란드-벨기에 공동개최로 열린 대회를 통해 유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 대회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유로라고 손꼽히고 있다. 1998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이어 유로에서마저 우승한 프랑스의 존재감이 가장 돋보였지만, 그 외에도 많은 명승부가 연출되었고 결승마저 골든골로 끝맺음했다. 당시 루이스 피구와 데니스 베르캄프의 활약을 보면 어떻게 2002 월드컵에서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겼고, 네덜란드는 본선에 오르지도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성공적으로 끝난 대회는 국내의 해외 ‘축덕’들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막 생기기 시작한 스포츠 채널에서는 주요 리그를 본격 중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후로 ‘4의 배수’의 해를 올림픽보단 유로의 해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https://youtu.be/vfl9pwdNr40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 2000 개막전 실황. 스웨덴 뮤지션 E-Type이 열창한 공식 테마송 Campione2000은 유로를 넘어 역대 최고의 축구 주제가 중 하나로 꼽힌다




 이후의 유로가 열릴 때마다 ‘6말7초’의 초여름 중 며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고 나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선수나 팀(클럽과 대표팀)에 대한 정보만 조금 알 뿐 축구의 전술과 포지션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만 그건 유로를 즐기는 데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정한 ‘고수’와 ‘프로’들의 승부는 축구라기보단 차라리 한 편의 영화나 뮤지컬이었다. 급기야 유로 결승과 NBA 파이널 7차전이 동시에 열린다면 전자를 택하고 싶을 정도가 되었다. 축구보다 농구를 더 잘 알고 좋아하는 내가 말이다. 대체 유로의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인가?









국가 대항전 특유의 열광적인 분위기


 어디에나 있다지만 유럽의 국가 내 지역 갈등은 유독 그 명성(악명?)이 높다. 익히 알려진 영국에서의 스코틀랜드와 스페인에서의 카탈루냐 등의 경우 말고도 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빈부격차가 심한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 아예 다른 언어를 쓰는 벨기에의 플란데런과 왈롱, 서로를 거의 외국 취급하는 바이에른과 독일 타 지역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과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라이벌 매치는 도시 간의 불편한 관계가 축구에 그대로 반영된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국가 대항전으로 넘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 마음이 되어 열정적이다 못해 ‘영끌하여’ 자국을 응원한다. 경기 전 국가(national anthem) 연주 때 관중석을 보면 각자의 국가 대표팀 저지를 입고 신체에 바디 페인팅을 한 채로 목이 터져라 합창하는 팬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특히 국가가 군대 행진곡 스타일인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의 팬들이 더욱 두드러진다). 유로 2016 당시 처음으로 출전한 아이슬란드의 박수 응원은 특유의 질서정연한 웅장함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럽 국가끼리는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보니, 월드컵에 비해 자국 응원단이 원정을 가기도 훨씬 쉽다. 게다가 축구의 본고장답게 잘 정비되고 대규모의 관중 수용이 가능한 경기장들이 매우 많다. 유로의 관중석이 유독 뜨거운 이유이다.



https://youtu.be/_eNzXaea6_c

유럽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축구만큼 좋은 건 없다. 유로 2016에서 국가를 열창하는 이탈리아 팬들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멋진 디자인의 유니폼

 

 월드컵과 유로를 앞두고 출전국은 새로운 버전의 유니폼을 선보이며 이는 대회 전 좋은 볼거리가 된다. 화려하고도 개성있는 색상의 유니폼은 평상복으로 입고 싶을만큼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한다. 스폰서 로고가 크게 쓰여있는 클럽 유니폼과는 달리 심플하게 왼쪽 가슴에 자국 축구협회 문장(紋章)만 새겨진다. 국기의 색상을 유니폼을 통해 구현한 경우가 있고, 오랜 세월 동안 고유의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와 포르투갈이 있으며 후자로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들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유니폼은 그 자체만으로도 해당 국가의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있다.


 유니폼 스폰서로 참여하는 브랜드는 모두 합하면 5-6개 가량 되지만 사실상 아디다스, 나이키, 푸마의 3파전으로 압축된다. 브랜드마다 ‘시그니처(Signature) 국가’들이 있지만 가끔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2011년 프랑스는 오랫동안 이용했던 아디다스에서 나이키로 스폰서를 교체해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대회 때마다 새롭게 디자인된 유니폼은 좋은 볼거리가 된다. 유로 2016 프랑스와 독일의 4강전.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뮤즈’들의 승부이기도 했다






축구의 본고장에서 열리는 소수 정예들의 경연장

 

 

 앞서 언급한 두 가지는 사실 월드컵을 비롯한 다른 국가 대항전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반면 출전국의 실질적 경쟁력은 유로가 월드컵과 비교해 가장 차별화되는 특징이다. 유로 관련 기사를 읽다 보면 자칫 헷갈리기 쉬운 대목들 중 하나가 ‘유로 예선’과 ‘본선 예선’이다. 전자는 유로 출전권을 얻기 위한 전 유럽 차원의 예선전이고 후자는 유로에 출전한 후 치러지는 조별 리그전이므로 명확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종종 혼란스러운 이유는 각각의 경우에 등장하는 국가들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강호들도 ‘얄짤없이’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해야 한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출전한 24개국의 면모를 보면 모두 월드컵에 출전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현재 월드컵에서 유럽에 배정된 티켓은 13~14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로 2012까지 적용되었던 16개국 출전이 최고의 경기력을 위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대륙도 아니고 유럽이라 8개국 늘어난 것 정도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최근 월드컵마저 4회 연속으로 유럽 국가들이 재패하고 있어, 유로에 굳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제외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이 ‘그냥 월드컵’으로 불러도 무방하단 느낌마저 든다. 월드컵과는 달리 유로에서는 전대회 우승국이 다음 대회에 자동 출전할 수 없으며 3,4위전도 없다. 그야말로 최고들끼리 모여 최고가 아니면 거부하겠다는 ‘쏘 쿨’한 포스를 한껏 내뿜는 규정이다.


물론 월드컵에선 의외의 이변을 목격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을 응원할 수 있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2002 월드컵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러나 축구 자체만 놓고 볼 때 유로의 경기력 수준은 세계 그 어느 대회보다도 높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축구를 위한 인프라가 워낙 잘 구축된 지역이라 메이저 대회를 개최하기에 타 대륙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 본고장의 위엄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다.



유로 2000 결승에서 맞붙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6년 뒤 독일월드컵 결승에서도 이들은 리턴 매치를 치른다. 유로의 결승이면 왕중왕전이나 마찬가지다.




끝나지 않은 전쟁, 축구를 통해 이어지다


 유럽엔 앞서 말한 국가 안의 지역 분쟁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숙적 혹은 라이벌 관계도 매우 흔하다. 중세의 100년 전쟁 외에도 크고 작은 알량한 문화적 자존심 대결을 이어가고 있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독일을 상대로 겪은 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잊지 않은 폴란드와 네덜란드, 굴욕적인 항복을 주고 받았던 독일과 프랑스,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나 식민 지배로 감정이 상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유로존 재정위기가 발생하며 독일을 위시한 여유있는 북유럽과 재정이 부실한 남유럽 간의 갈등마저 불거지고 있다. 유로2012 당시 독일과 그리스의 8강전은 ‘채권자-채무자 매치’라는 웃지못할 타이틀로 화제가 된 바 있다(그리스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폭격 피해자이기도 하다).

 

 물론 과거의 끔찍했던 유럽의 전쟁사를 그리워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전혀 아니며 그런 역사는 반복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아직도 일부 국가들은 과거사 해결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다만 그토록 비극적이었던 경험에 대한 반성과는 별개로 전쟁의 정신을 평화적인 놀이로 편집하고 각색하려는 유럽인들의 의지는 매우 강한 듯 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뜨거운 유럽의 축구 열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유로를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하며 합법적인 무혈의 전쟁’이라고 부르고 싶다. 상대를 헤치지 않는 한에서 극한의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고, 절대 지지 않겠다는 불굴의 투지로 서로에게 맞선다. 이것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상대에 대한 존중이며 최고의 팬 서비스이다. 유로의 경기들을 볼 때마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결국에는 감탄하게 되는 이유이다.




유로 2012 네덜란드와 독일의 예선 대결. 네덜란드는 아직도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당한 아픔을 잊지 않고 있다.









2022 월드컵은 중동의 카타르에서 유럽 리그가 한창인 11월에 열리며, 차기 2026 월드컵은 드넓은 면적의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개국에서 공동개최된다. 더구나 이 대회부터는 출전국이 48개로 늘어난다. 굳이 대회 간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두 대회 모두 축구의 변방에서 열리다 보니(물론 미국과 멕시코는 월드컵의 단골 손님이긴 하다), 최고의 경기를 위한 시간과 공간의 ‘세팅’이 이전 대회들과 비교할 때 다소 열악하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대회의 질적 수준에서 유로가 더욱 우위를 점하게 될 전망이다. 때마침 유로 2024는 독일에서 열린다. 독일은 최강의 축구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메이저 대회마다 우승을 다투며 이미 월드컵을 성공리에 치러 본 경험이 있는 나라이다. 진정한 ‘축덕’이라면 그렇지 않을수도 있지만, 조금 색다르게 축구를 즐기는 나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메이저 국가’의 ‘메이저 대회 개최’가 한층 친근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례없는 난리로 전세계 스포츠도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이 여름, 내년에라도 ‘6월 극장’이 무사히 개장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4년 후엔 가능하면 직접 현장에서 열기를 느껴보고 싶다. 게다가 그해 여름 올림픽은 파리에서 열리니 두 이벤트를 잘 엮어 계획한다면 스포츠를 테마로 한 ‘인생 여행’도 꿈만은 아니다. 그날의 여름이 오면 더욱 여유롭고 성숙해진 모습으로 시련을 극복한 세상을 마음껏 보고 체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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