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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Aug 19. 2020

‘폭풍’ 이종범의 후예 ‘순풍’ 이정후

놀라운 침착함으로 정상에 서다


 야구에서 뛰어남을 넘어 거의 완벽한 야수를 칭하는 말로 5툴(tool) 플레이어라는 용어가 있다. 파워(장타력), 스피드(주루), 컨택트(타격 정확도), 수비(순발력, 핸들링), 어깨(송구능력)에서 모두 정상급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를 뜻하는데, 이런 능력을 다 갖추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각 역량 간의 부조화로 부상을 당하기도 쉽기 때문에 거의 찾기 힘들다.

 

 이종범은 출범 40년을 향해 가는 한국프로야구(KBO) 역사에서 단연 최고의 5툴 플레이어였을 뿐만 아니라 야구 자체를 이해하고 지배했던 선수였다. 1993년 입단 첫 해 한국시리즈 MVP를 시작으로 1994년 196안타와 84도루를 기록하여 MVP를 차지했고 1996~1997년엔 해태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면서도 도루왕에 오르고 이승엽과 홈런 선두를 다퉜다. 1998년 일본 진출(주니치 드래곤즈) 이후 부상 등을 이유로 부진하다가 2001년 KIA로 컴백한 후 3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상급의 기량을 보여줬다. 2006 WBC 일본 전에서의 2타점 2루타 장면은 ‘애국가 브금’과 매치될 정도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해태에서의 ‘KBO 1기’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국 복귀 이후의 활약이 저평가되지만 은퇴 직전의 몇 년을 제외하면 이종범은 커리어의 대부분을 ‘1티어’ 플레이어로 보냈다.



2006 WBC 일본전에서의 결승 2루타. 전성기가 지났다지만 이종범은 국가대표의 맏형이자 한국야구의 상징이었다.




 40줄에 들어설 무렵 소속팀의 12년만의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기량 하락을 극복하지 못하고 얼마 후 은퇴한다(사실 이 과정의 전모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은퇴 후 지도자 및 해설위원으로 야구계에 계속 머물렀으나 워낙 대단했던 선수 시절의 커리어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존재감이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중에 다시금 그의 이름이 야구계에 회자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지금이야 2세 선수들이 부모의 대를 이어 좋은 활약을 보이는 경우가 흔해졌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은퇴 선수의 자녀가 설령 운동을 하고 있더라도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이종범과 이정후 부자도 그런 경우였다. 게다가 이정후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이종범은 현역에 있었으며 광주에서 서울로 전학와 야구명문 휘문고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로 일부 야구 매니아들 외에는 이정후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2017년 이정후는 넥센(지금의 키움) 히어로즈에 입단하지만 ‘이종범 아들이 저렇게 컸구나’ 정도의 시선이 주를 이루었다(나 역시 그랬다). 게다가 2006~2007년의 류현진, 김광현 정도를 제외하면 순수 고졸신인들은 주전급의 활약은 고사하고 1군 엔트리에 들기도 어려웠다. 신체적 능력 외에도 수많은 경기 경험 및 정확한 판단력, 멘탈 관리가 유난히 중요시되는 야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입단 당시의 이정후 역시 예외가 될 거라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전의 부상으로 운 좋게(어디까지나 처음에 그랬을 뿐이다) 개막전부터 경기에 나서게 된 이정후는 이후 시즌 내내 주전으로 출전하며 타율 0.324에 179안타(전체 3위)의 성적을 기록하여 신인왕에 등극함은 물론 리그 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한다. 이 후 소포모어(sophomore)징크스 따윈 없다는 듯이 계속 정상급의 실력을 선보이며 키움이 상위권에 머무르는 데 힘을 보탰다. 2020년 들어서는 홈런까지 13개를 기록하며 장타력에서도 한 차원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참고로 2017~2019년을 통틀어 이정후는 14개의 홈런을 쳤다). 타율 0.359로 정확성도 여전함은 물론이다(8월 19일 현재 기준)



장타력까지 갖춘 이정후는 이제 발전의 한계조차 짐작할 수 없는 ‘사기캐’가 되었다.




 이제 대부분의 야구계 관계자 및 팬들은 더 이상 이정후를 이종범의 후광과 엮어 바라보지 않는다. 이미 그 자체로 리그 정상급을 넘어 MVP마저 넘보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정후의 사례는 이후에 KBO에 등장한 순수 고졸 신인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었고 강백호(KT)를 비롯한 20대 초반의 영건(young gun)들은 이미 리그 및 국가대표팀의 주역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재능을 물려받긴 했겠지만(사실 신체조건은 더 좋다) 그런 선수들은 이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다. 소속팀 및 지도자와의 소위 ‘궁합’이라고 하기엔 개인성적이 너무 대단하다. 리그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다. 이제 KBO를 접수하면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도 주목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제 만 22세에 불과한(대학생이라면 4학년) 이 젊은이가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통계를 기반으로 전문적인 분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지표를 나열하진 않겠다(이미 수많은 전문가 및 재야의 고수들이 완성해 놓았을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정후의 놀라울만한 침착함이다. 그는 결코 흥분하며 서두르는 법이 없다. 유인구에 성급하게 손대지 않고 무리한 베이스러닝을 하지 않으며 타구의 낙하지점을 파악한 후 전력질주하여 잡아낸다. 더구나 실제 경기에선 이 모든 플레이가 찰나에 이루어진다. 아무리 숙련된 프로 선수라고 해도 매번 올바른 판단을 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종목도 물론 그렇지만 특히나 야구는 판단의 스포츠이다. 이정후가 경기 중에 내리는 정확한 판단을 보면 야구가 아닌 다른 일을 했어도 두각을 나타냈을 거란 생각마저 든다. 이런 침착함은 이정후의 기량을 발전시키기도 했겠지만, 팀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항상 예의바르고 차분한(게다가 외모마저 준수한!) 이 청년을 감독, 선배들, 팀 스태프들이 싫어할 수 있을까?




이정후의 눈빛은 경기내내 차분하면서도 반짝인다. 놀라운 침착함은 모든 상황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처하는 원동력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문제와 앞날에 대한 걱정을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거니와 심지어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가 닥쳐서 당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턱대고 이정후를 닮자는 것이 아니며, 야구 경기와 인생의 다른 상황을 단순 비교할 수도 없다. 다만 이정후가 프로 입단 후 많은 난관을 헤쳐온 중요한 원동력은 ‘멘탈 관리’임을 말하고 싶다.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흥분하지 않고 다음 타순과 이닝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 그의 침착함이 오늘을 만들었다(미래는 더 잘 만들어질 것 같다). 이정후의 사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답까지는 아니어도 결정적인 힌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3대로 내려와 한층 잔잔해진 ‘바람’이 속삭이는 지혜로운 이야기 한 소절을 되새기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진정시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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