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10세의 셀프 찬가 Viva La Vida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왕이 통치한 적이 없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노바 고리차(Nova Gorica)에는 한 군주의 무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이 작은 마을에 매년 상당수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사실 이 곳에 묻혀있는 군주는 19세기 초중반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10세(Charles X Roi de France et de Navarre, 1757~1836)이다. 노바 고리차는 과거 여러 전쟁의 와중에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슬로베니아 영토가 된 지역이다 보니 슬로베니아 내에서도 이 무덤의 존재를 미처 몰랐다고 한다. 최근 프랑스 모 단체가 무덤을 반환하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노바 고리차는 이미 마을의 쏠쏠한 수입원이 된 왕릉을 내줄 생각이 없었고 프랑스에서도 샤를 10세가 자국 내에서 존재감 없는 군주인지라 곧 요구를 철회했다. 샤를 10세는 대체 어떤 연유로 해외에 묻혀있는 유일한 프랑스 왕이 된 것일까?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며 부르봉(Bourbon) 왕정이 복고되었다. 루이 18세는 20여년 전 혁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프랑스에 남아 있음을 파악했기 때문에 보수 반동 성향을 지양하고 자유주의적 통치를 펼쳤다. 하지만혁명 이전의 왕정 시대를 잊지 못한 극우 왕당파 세력들은 혁명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모든 것을 과거로 돌리려 했다. 때마침 유럽 각국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Fürst von Metternich)의 주도 하에 보수 반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고 혁명 이전의 질서로 복귀하여 ‘평화롭고 봉건적인 유럽’을 추구하는 ‘빈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왕당파들은 선거를 통해 대거 의회에 진출했고 혁명 세력을 제거했으며 과격한 백색 테러마저 일삼았다. 하지만 루이 18세는 이미 60대 중반의 고령이라 이런 일련의 상황을 제압하기엔 힘이 부쳤다. 루이 18세는 왕당파의 요구에 못이겨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과격파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법을 개정하기에 이른다. 이토록 과격한 왕당파가 내세운 지도자는 루이 18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Comtes d'Artois)이었는데 그가 바로 샤를 10세이다.
백색 테러(white terror)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암살·파괴 등을 수단으로 하는 테러의 일종으로서 그 행위 주체가 극우 내지 우파인 경우 좌파에 의한 적색 테러(Red Terror)와 구별하여 사용한다. 역사적으로 1795년 프랑스 혁명중에 혁명파에 대한 왕당파의 보복이 그 시작으로 꼽힌다. 미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테러단체인 KKK(Ku Klux Klan)단이 현대의 대표적인 백색 테러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위키백과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샤를 10세는 왕위에 오른다(형인 루이 18세와 마찬가지로 샤를 10세 역시 즉위 당시 67세의 고령이었다). 샤를 10세는 젊은 시절에도 왕정 복고에 대한 신념이 강했으며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영국으로 망명해 혁명 반대를 외치며 프로이센 왕국에게 프랑스로의 침공을 청하기도 했다(필니츠 선언).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왕당파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이런 인물이 왕위에 올랐으니 정국의 보수반동화 성향은 더욱 극심해졌다. 당장 1825년 랭스(Reims) 대성당에서 치른 대관식부터 과거 절대 왕정에 대한 헌사이자 오마주였다. 이렇게 화려하게(?) 데뷔한 샤를 10세의 오른팔이 된 강경 왕당파 빌렐 수상이 이끄는 내각은 신문 검열법(Loi de tendance)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교일치로의 복귀를 시도하며 프랑스를 다시 카톨릭 국가로 만들려 했고 1825년부터는 카톨릭 교회를 상대로 한 범죄를 기요틴형으로 처벌했다.
극단적 복고주의 정치 끝에 빌렐은 의회에서 퇴출되지만 얼마 후인 1830년에 다시금 극우 과격파인 폴리냐크 공작을 수상으로 삼은 내각이 출범한다. 폴리냐크는 혁명 세력 및 공화주의자들에게 가해지는 백색테러를 방치하고, 국채를 지급하여 귀족들의 특권과 재산을 회복시키려는 조치를 시행하며 노골적으로 왕당파의 편을 들었다.
샤를 10세와 폴리냐크 내각의 독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의회의 자유주의 세력은 결국 1830년 3월 이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며 불신임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샤를 10세는 오히려 반대파 의원들을 처벌하려 들었고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새로 치르는 극단의 행보를 보였으며,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며 의원들이 발표한 ‘221명의 청원서’에도 거부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7월 25일 폴리냐크 내각은 출판의 자유를 탄압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내용의 칙령까지 발표한다. 결국 의원들과 파리 시민들은 들고 일어나 정부 타도를 외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830년의 7월 혁명이다.
칙령 발표 다음날인 7월 26일 일간지 ‘르 나시오날’(Le National)의 창간자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가 칙령에 대한 항의 격문을 발표했고 이에 시민들은 격하게 호응하며 시가지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정부군에 저항한다(티에르는 훗날 프랑스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 된다). 7월 28일에서 30일에 이르는 이른바 ‘영광의 3일’ 동안의 시위 끝에 샤를 10세는 도주했고 혁명은 성공한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은 당시의 상황을 낭만적인 신화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참고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마리우스와 ABC의 친구들이 참여한 시위의 배경은 이보다 2년 후인 183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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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 이후에도 샤를 10세는 알제 정복을 시도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명령을 선포하는 등 저항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정부군조차 시민들 편으로 돌아선다. 샤를 10세는 마지막 카드로 손자 앙리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자신의 사촌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을 섭정으로 삼으려 했으나 ‘병풍’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던 오를레앙 공작은 선거를 통해 루이 필립 왕으로 선출된다.
이름뿐인 군주로 전락한 샤를 10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영국에 망명했고 이후 프란츠 1세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이주하여 프라하에 살다가 귀국하지 못한 채 1836년에 객지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그가 숨을 거둔 곳이 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노바 고리차이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로 괴르츠(Görtz)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7월 혁명은 절대 왕정을 신봉하는 이념이 더 이상 역사의 주류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린 사건이었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왕당파 귀족들을 대신해 대상인, 금융업자, 전문직 종사자, 정부 관료 등 엘리트 부르주아 시민들이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루이 필립을 왕으로 선출한 선거의 유권자 대다수가 부르주아 시민들이었다는 데서도 증명된다(물론 당시 유권자가 전체 인구의 0.6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샤를 10세는 현명하지 못했고 독선적인 정책으로 일관했지만 하필 프랑스 혁명 이후 시대에 군주가 되었던 것도 일종의 역사적 불운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왕정 시대였다면 그의 생각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 사회는 1848년의 2월 혁명과 제2공화정, 제2제정을 거치며 각종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대통령 중심의 공화제가 자리잡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고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프랑스 내에서 인기도 별로 없는 샤를 10세였지만 17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는 다시 대중의 기억에 소환되었다. 바로 2008년 발표된 영국 밴드 콜드 플레이(Cold Play)의 곡 ‘Viva La Vida’를 통해서이다. 이 곡은 콜드 플레이의 현재의 명성을 있게 한 대표 넘버이며 빌보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웅장한 행진을 연상시키는 전주와 후렴구의 ‘떼창’은 국내의 수많은 방송에도 등장해 귀에 익숙하다. 곡이 수록된 앨범 자켓 사진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들라크루아의 그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https://youtu.be/dvgZkm1xWPE
최근에는 15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세계적인 유튜버 제이 플라(J.Fla)가 리메이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이 플라는 특유의 발랄하고도 경쾌한 톤의 음색으로 남성적 색채가 짙은 곡을 멋지게 재해석해 큰 인기를 끌었다.
https://youtu.be/Be_W5GtrqZ0
가사는 흘러간 본인의 ‘리즈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내 명령 한마디에 바다도 복종했었고 로마 기병대의 호위 하에 여유롭게 예루살렘의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었다. 내가 통치하던 그 시절은 진실이 존재하는 태평성대였다. 하지만 이제 그 좋던 날들은 가고 아침에 쓸쓸히 홀로 눈뜨며 방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얼핏 듣기엔 진정 후회없이 대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던 노장의 회상인 것만 같다.
하지만 정작 샤를 10세는 80년 가까운 평생 동안 나라의 안위보다는 본인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했으며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과거의 낡은 이념에 갇혀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을 억누르려 했다. 그 결과 불귀의 객이 되어서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보수적이고 독단적인 행보 일색이었던 샤를 10세의 실제 생애를 돌이켜 보면 쓴웃음을 짓게 된다. 나아가 현재 생존해 있는 세계 각국의 은퇴한 독재자들의 속내가 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살짝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고쳐 쓸 수 없다는 속담이 다시금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모든 이에게는 외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할지언정 자신만 믿는 ‘뇌피셜적인’ 주장과 고유의 속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는 모두가 자유롭고 떳떳하다. 하지만 진정 품격있게 삶을 정리하려면 진실에 대한 인정과 본인의 과오에 대한 반성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생전에 그럴 의지라고는 전혀 없었던 샤를 10세는 지하의 저 세상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1세기 영국의 사내들이 자신을 기억하며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당연하다고 으시댈지 아니면 이렇게 다시 불러줘서 고맙다고 할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혼 너머의 세계를 알 길은 없다. 꺾지 못한 ‘영감님의 고집’은 그렇게 영원히 허공 속에 묻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및 참고
미야사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
http://naver.me/xhHDg5wE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http://naver.me/xJNMRyfl
나무위키 ‘샤를 10세’
https://namu.wiki/w/%EC%83%A4%EB%A5%BC%2010%EC%84%B8
나무위키 ‘콜드 플레이’
https://namu.wiki/w/Coldplay?from=%EC%BD%9C%EB%93%9C%ED%94%8C%EB%A0%88%EC%9D%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