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화소년 Apr 01. 2023

봄이 왔어요. 그리고 배구가 떠나간답니다

남녀 프로배구 챔프전 직관기

 인천광역시는 우여곡절 끝에 2014년 아시안게임을 개최했지만 그 후폭풍에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애초에 국가가 아닌 인천시 주도로 개최한 행사였는데 시의 열악한 재정구조에도 불구하고 강행했고 그 결과는 가혹했다. 2018년이 되어서야 인천시는 겨우 재정난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막대한 채무가 남아 있다. 아시안게임의 존재감과 영향력 그리고 경제효과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인천시의 선택은 두고두고 악수가 될 듯 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남겨진 유산이 있었으니 바로 인천 아시아드 경기장을 비롯한 최신식 실내 및 실외 경기장들이다. 덕분에 인천시는 ‘졸지에’ 수도 서울보다도 많은 체육 시설을 보유하게 되었고 낡은 체육관을 사용하던 인천 연고의 프로스포츠 구단들은 새 구장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2006년에 개장한 삼산월드체육관은 남자 프로농구 인천 전자랜드가 2021년까지 사용하다가 현재는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자 프로배구 대한항공 역시 2013년 가을부터 같은 해 여름에 완공된 계양체육관에서 홈 경기를 한다. 2012년 지어진 인천 축구전용경기장은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가 사용 중이다.


 지난해 가을에 개막한 V리그(프로배구의 정식 명칭)는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가 모두 끝나고 챔피언 결정전(이하 챔프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남녀부 모두 인천 연고팀이 정규리그 1위로 챔프전에 직행하여 시리즈 1~2차전이 모두 인천에서 열리게 되었다. 서울에서 멀기도 했고 또 시즌이 한창일 때는 추운 겨울이라 인천으로 직관오기는 어려웠다(1월에 흥국생명과 현대건설의 경기 때 딱 한 번 왔었다). 하지만 봄이 왔고 이제 마지막을 향하는 배구를 그냥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예매창이 열리자마자 맹렬히 아이폰을 터치하여 남녀 1차전 두 경기의 표를 ‘따냈다’. 여자부 1차전은 3월 29일에 남자부 1차전은 3월 30일에 열렸고 ’산 넘고 물 건너‘ 두 경기장 모두에 배구 탐험을 다녀왔다.


전자랜드 농구 경기 이후 2년만에 왔다. 공교롭게도 그때도 봄이었다.


우주비행선을 연상시키는 계양체육관. 외관 디자인으로는 전국에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여자부에서 현대건설의 1위를 의심하는 관계자와 팬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주전 선수들이 번갈아가며 부상으로 쓰러지며 현대건설은 결국 2위로 주저앉았고 그 틈을 타고 흥국생명이 1위에 올랐다. 3위 도로공사는 플레이오프에서 전열이 흐트러진 현대건설에게 간단히 2연승했고 결국 흥국생명의 챔프전 파트너가 되었다.


 수많은 경기를 직관과 중계로 지켜보며 프로스포츠에서 팀끼리의 실력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파이널까지 올라올 정도이면 우열을 가리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 결국 사소한 실책 등등으로 생기는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쪽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남의 실수(약점)만큼 좋은 절호의 기회는 없다. 열흘 쉰 탓에 경기 감각이 떨어진 탓인지 1세트 초반 앞서가던 흥국생명은 주춤하기 시작했다. 도로공사가 반등하며 19-17의 리드를 잡았을 때만 해도 이 시리즈의 향방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로공사는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만들지 못했다. 도로공사가 달아날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동안 흥국생명은 살아났고 결국 듀스 끝에 1세트를 따냈다. 이후 경기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흥국생명은 어렵지 않게 승리했다. 도로공사로서는 1세트 후반의상황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배구가 흐름의 경기라는 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실제 사례였다.


시즌 내내 뜨거웠던 삼산체육관. 이날도 ‘매진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로공사는 기세가 살아난 흥국생명을 막아 세우기 힘들어졌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인 ‘용병’ 옐레나와 ‘외계인’ 김연경은 경기를 치르며 몸이 풀리자 완벽히 살아났다. 주장 김미연과 세터 이원정, 리베로 김해란 역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로공사 세터 이윤정은 정규 시즌 중반으로 돌아간 듯 멘탈이 흔들리며 시종일관 불안한 토스를 올렸다. 김종민 감독이 경기 중반 백업 세터로 교체하는 등 여러 방안을 강구했지만 소용없었다. 현 국가대표 주장 박정아 역시 크게 부진했다(이날 한정 국대는  커녕 에이스도 아니었다). ‘배구 천재‘이자 ’세 언니들‘ 중의 핵심 배유나는 경기 후 링거를 맞을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쁘다.


 물론 도로공사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도로공사가 김천에 내려갔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갈)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도로공사를 응원하고 아니고를 떠나 이런 챔프전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매우 아쉬웠다. 경기에 실망하진 않았지만 예상이 너무 빤해 보여 그리고 도로공사 선수들의 힘겨움이 전해지는 듯해 체육관을 나서는 기분이 마냥 뿌듯하진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도로공사가 조금 더 악착같이 싸워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졌어 벌써 졌어! 항공만 만나면 너희들 표정에 다 보여! 왜들 그래?”


 주축 선수들을 트레이드하고 젊은 선수들을 성장시키기를 2년, 현대캐피탈은 마침내 어엿한 강팀이 되어 챔프전에 올라왔다. 하지만 ‘1강’ 대한항공은 이번 시즌에도 여전히 강했고 현대캐피탈은 좀처럼 그 갭을 극복하지 못했다. 2년여에 걸쳐 팀을 휘감은 ‘대한항공 포비아‘를 없애기 위해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은 정규 시즌 내내 수시로 선수들을 어르고 달래고 다그쳤다. 그 주문이 통한 탓인지 현대캐피탈의 1세트는 이전과는 크게 달랐다. 그렇게 변화가 시작되는 듯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그냥 3년 연속 정규리그 1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1세트를 내주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며 바로 반격했고 그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코트에 선 멤버들 모두가 서로를 굳건히 믿고 있음이 관중석에서도 느껴졌다. 3세트 막판 현대캐피탈 오레올의 백어택을 3인 블로킹으로 막아낸 장면은 이 경기의 승부처였다. 놀랍도록 침착한 대한항공에게 당황하다 못해 질린 현대캐피탈은 4세트를 던지다시피 하며 그대로 항복했다.


우리가 계양의 왕이다! 분명 현대캐피탈은 성장했지만 대한항공의 벽은 높았다


대한항공의 정교하고 단단한 팀워크도 놀라웠지만 39살 한선수와 36살 곽승석(이상 한국나이 기준) 두 ‘형님’들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한선수를 보며 토스가 정교하고 빠르다 못해 ’아크로바틱‘하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곽승석은 아무리 어려운 볼이 올라와도 압도적인 스윙 스피드를 이용해 절묘하게 블로킹을 피하며 코트 빈 곳으로 강타를 찔러넣었다. 188cm라는다소 작은 키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왜 이 선수들이 이 나이에도 아직 국가대표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현대캐피탈은 분명 제 실력만큼은 했다. 주장 전광인이 빠졌지만 이시우와 김선호 등이 상당부분 그 공백을 메워주고 있고 세터 김명관도 장신의 이점을 살리며 나름 분전했다. 문제는 대한항공의 위력이 정규리그에서의 그것 이상이라는 점이다. 3년째 정상에 군림하며 생긴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고 그로 인한 자신감은 챔프전에 돌입하며 더욱 불타올랐다. 도로공사만큼은 아니지만 현대캐피탈의 반란 가능성 역시 희박해 보이는 이유이다.








지난 3년간 프로배구는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다. 코로나 탓에 끝판왕을 가리지도 못한 채 리그가 종료되었고 한동안 무관중으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여러 선수들이 학교 폭력에 연루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고 감독에게 항명하며 선수가 팀을 이탈하는 사건도 있었다. 물론 경사도 있었다. 여자 대표팀은 도쿄올림픽 4강에 올랐고 월드스타 김연경이 국내로 돌아와 수많은 팬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남자 대표팀은 지난 여름 오랜만에 국가 대항전에 나서 소중한 1승을 따내며 팬들에게 존재감을 알렸다.


 그런 우여곡절이 있은 뒤 배구 경기장은 다시 팬들로 가득찼고 선수들은 연일 이어지는 명승부로 보답했다. 3월과 더불어 배구에도 봄이 왔다. 이 글을 쓰는 오늘 프로야구가 개막했지만 남자 챔프 2차전이 열리는 계양체육관의 모든 좌석은 이미 매진되었다. 그 기사를 접하니 그동안 약간 기를 못 펴던 ‘제자’가 잘 되는 모습에 기뻐하는 ‘선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시리즈의 흐름으로 볼 때 올시즌 나의 배구 직관은 이것으로 끝일 듯 하다. 6개월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쉽지만 배웅하는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다. 다음 가을 그들은 더 성장한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 것임을 믿고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성적이 꼴찌지 실력이 꼴찌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