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코지마블루위에서
여름 엽서 속에서 많이 보이는 미야코지마는 인기척이 사라진 겨울 섬에서, 비로소 풍경보다 ‘우리’가 더 선명해졌다. 미야코지마블루 위에 스며드는 잔잔한 파도와 함께 '고요함'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름 휴양지로 유명해진 미야코지마의 겨울 여행은, 풍경보다 ‘속도’를 기억하게 하는 여행이었다. 눈 대신 바다를 보러 떠난 1월의 짧은 섬살이는, 바닷빛보다는 공기와 소리,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일상의 리듬이 섬의 속도를 천천히 닮아가는 시간이었다.
섬의 공기에 몸을 맞추다.
두 시간 남짓 구름 위를 날아 도착한 작은 공항은, 시골의 작은 버스터미널 같았다. 요 난 하거나 시끄럽지 않은 한적한 섬의 시간은 공항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나 말을 주고받는 속도도 알게 모르게 느려져 있었다. 겨울 공기는 서늘했지만 마음은 조용했고, 떠난다는 설렘보다 “이번엔 그냥 천천히 쉬다 오자”는 다짐이 요란하지 않은 여행으로 자리 잡았다.
공항 내 위치한 렌터카를 받아 섬 도로 위에 올라섰을 때, 창밖으로 스치는 것은 화려한 리조트 간판이 아니라 낮게 흐르는 구름과 들쑥날쑥한 해안선이었다. 공항에서 미야코지마 본섬으로 가기 위한 시작은 길이 3.5km의 아름다운 이라부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미야코블루라 불리오는 코발트 바닷색과 푸른 하늘, 흰 구름과 잘 어울리는 곡선미를 가지고 있어서 다리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는 마치 푸른 바다 위로 빠져들어가는 기분을 가지게 한다. “이 계절의 미야코지마는 이렇게 조용하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입안에서 굴러 나왔다.
미야코지마의 첫 식사는 현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미나토식당이라는 소박한 식당에서 시작됐다. 오래된 수산물공판장 앞에 공사장의 함박집과 같은 임시건물형태의 식당이었는데, 12시 가까이 되자 수기로 웨이팅이 시작될 정도로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 있는 집이다. 화려한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일본 전통의 소바와 덮밥을 음미할 수 있었다. 한 번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식당을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스나야마 비치를 향했다. 천연 동굴 아치가 있는 해변으로 유명한데, 바람과 파도로 인하여 침식이 되고 있어서 보호 펜스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동굴 아치와 어울리는 잔잔하게 부서지는 파도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주었다.
한 겨울에도 20도를 내려가지 않는 초가을 기온을 유지하면서, 시시각각 바람과 비가 등장하기 때문에 날씨운도 어느 정도 따라야 했지만, 코발트블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만큼 청명한 날씨가 이어진 것은 행운이었다. 수평선 위로 뻗어 나가는 부드러운 겨울빛 파도는 남색과 회색 사이 어딘가에 놓인 색으로 바다와 하늘을 천천히 물들이고 있었다.
해가 바다를 향해 기울여지는 무렵, 섬의 동남쪽 끝으로 달려 히가시헨나자키를 향했다. 미야코지마에 있는 3개의 골프장 중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오션링크스 골프장 근처에 있었는데, 골프장 레스토랑에서 가벼운 생맥주를 마시며, 또 다른 느낌의 해변을 즐길 수 있었다.
미야코지마 본섬 전체를 해변도로 따라서 한 바퀴를 도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기에 예정된 일정보다 조금 여유가 생겨서 우에노에 있는 독일문화촌을 들렸다. 아주 오래전에 미야코지마에 독일 사람이 좌초되었을 때 마을 주민들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현대에 와서 독일정부에서 테마파크처럼 만들어주었다고 하는데,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지금은 오래된 고성처럼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지만, 그 자체로 색다른 느낌을 가져다주는 곳이다. 그나마 주변의 바다가 아름다워서 계절을 잃어버린 듯 고요했고, 사람들의 발자국이 거의 없는 산책로는 마치 우리를 위해 비워둔 길처럼 느껴졌다.
저녁 시간이 되어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일본 전통 방식의 숙소에 도착했다. 단독으로 지어진 조용한 일본식 가옥이었는데, 스노클링 장비를 무상으로 대여하고 있어서 겨울보다는 여름에 오면 인기가 많았을 듯하다. 식당이 모여있는 시내까지는 걸어서 3~40분이 소요되는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그래도, 별빛이 흔들리는 일본 시골 밤길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내에서 숙소까지는 택시요금이 만원 정도 나왔기 때문에 식당까지 이동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창밖에는 번쩍이는 네온 대신 어두운 골목과 드문 가로등, 그리고 낯선 섬의 밤이 묵묵히 깔려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섬과 섬 사이를 잇다
둘째 날의 일정은 섬 북쪽에 있는 이케마 대교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이 거칠게 불어서 점심전후에 예약했던 크루즈여행이 취소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일정도 여행의 또 다른 기쁨이 되어주었다. 이케마 대교를 지나자마자 작은 카페에 주차를 하고 이틀째 관광을 시작했다. 카페와 다리사이 아래로 넓은 해변이 있었는데, 첫날보다 더 선명한 바닷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센 바람 속에서 품어 나오는 겨울의 바다는 조금은 더 차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배스킨라빈스와 유사하게 서로 다른 맛을 내는 화려한 색상의 아이스크림과 일본 고유의 다과를 시작으로 예정에 없던 이케마섬을 한바퀴 들려보았다. 이케마섬 북단으로 이어지는 드라이브는, 목적지가 있다기보다는 길 자체를 즐기는 시간에 가까웠다. 도로 옆으로 바다가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풀숲이나 집들이 살짝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확 트인 풍경이 나타나는 리듬이 반복됐다.
바다 앞에서, 우리만 남는 시간
예정에 없었던 후나쿠스해변과 이키츠 비치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여름이면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하지만, 우리가 찾은 겨울의 해변은 거의 비어 있었다. 푯말이 없었으면 차에서 쉽게 알아볼 수 없는 좁은 입구가 인상적이었다.
후나쿠스해변에서는 파도와 모래 사이를 서성이는 발자국을 따라가며 사진을 남겼다. 한 번 지나간 걸음은 곧 파도에 지워졌고, 지워진 자리에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끈한 해변이 펼쳐졌다. 카메라 속에는 파도와 함께 흐릿해지는 그림자들이 조용히 겹쳐져 들어왔다.
이키츠 비치에서는 바다를 등지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모래를 파고 쌓는 데 열중했고, 어른들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파도 소리를 등 뒤로 들었다. 정면의 풍경보다, 옆에 앉은 사람의 온도와 숨소리가 더 잘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다시, 이케마대교를 건너 미야코지마 본섬을 향해야 하는데, 다리 마지막에 있는 주차장에서 보는 바닷색이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다.
본섬에 위치한 해중공원에서는 바깥의 겨울 바다와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물속은 바람이 닿지 않는 만큼 더 깊고 진한 색을 품고 있었다. 수면 위에서 보던 잔잔한 파도가, 물아래에서는 조용히 흐르는 빛과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해리스 쉬림프 트럭
미야코지마의 여행정보를 보면서 가장 의아했던 것이 본섬의 최고 맛집으로 '해리스 쉬림프 트럭'을 1순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해중공원과 멀지 않아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정을 정했는데, 결과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미국식 스쿨버스 안에서 조리된 마늘 새우를 즐길 수 있는 포토스폿이었다. 거친 사탕수수 사이로 좁은 도로를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모습은 여행지보다는 마치 생활의 한 장면 같았다. 주문한 새우 요리를 피크닉 존에 모여 바다 냄새와 버터 냄새, 따뜻한 밥과 차가운 바람이 한데 섞인 공기는, 사진으로는 절대 다 담기지 않을 풍경이었다.
이어서 향한 시기라 오공온센에서는, 겨울 섬 여행의 정답 같은 시간을 보냈다.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들면, 하늘은 아직 완전히 저물지 않은 채 부드러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물 위로 피어오르는 김과 멀리 들리는 파도 소리가 맞물리면서, 바다와 온천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은 뜨끈하게 데워지고, 얼굴과 귀에는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이 상반된 감각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으면 물소리와 바람 소리만 남고, 눈을 뜨면 섬의 겨울빛이 고요하게 기억 위를 떠다녔다.
온천을 나와 이온타운에 들른 시간도 여행의 연장이었다. 현지 마트에서 카트를 밀며 과자와 음료, 다음 날 아침을 채워 줄 가벼운 식사거리를 고르는 일은, ‘관광’이라기보다 잠시 이곳에서 살아보는 기분에 가까웠다.
둘째 날 저녁은 조용한 골목 끝에 자리한 작은 식당에서 섬 재료로 만든 코스요리를 마주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퍼지는 따뜻한 조명과 음식 냄새,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하루의 리듬을 부드럽게 마무리해 주었다. 창밖에는 흐릿한 빗자국도, 번쩍이는 간판도 없었지만, 그 대신 조용히 흐르는 섬의 밤이 있었다.
여름의 미야코지마가 강렬한 햇빛과 파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액티비티의 섬이라면, 고즈넉한 겨울의 미야코지마는 풍경을 쫓기보다, 함께 있는 사람들을 더 선명하게 보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파도는 조용했고, 하늘은 과하지 않게 맑았고, 길 위에는 일행 말고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 빈 공간을, 걸음과 웃음, 대화와 침묵이 천천히 채워 나갈 수 있었다. 미야코지마는 그 모든 것의 볼륨을 한 칸 낮추고, 대신 색과 공기, 소리와 속도를 더 섬세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람과 차가 적은 덕분에 유명 관광지에서도 ‘우리만의 프레임’을 만들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이 섬을 찾는다면, 그때는 아마 봄이 될 듯하다. 화려한 여름색 대신, 지난한 겨울빛을 흠뻑 머금은 봄날의 코발트 바다와 거친 사탕수수로 둘러싸인 도로, 그리고 그 위를 지나는 또 다른 계절을 한 장씩 더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