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이건... 내 기획안인데?
손이 떨렸다.
발표 3분 전, 임원 회의실 앞 복도에서 나는 노트북을 켜고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명: "신규 고객 확보를 위한 디지털 마케팅 전략"
발표자: 김지영 대리
발표 시간: 오후 3시
6개월이었다.
아이 재우고 새벽 2시까지 데이터 분석하고,
주말마다 카페에서 전략 수립하고,
육아와 일 사이에서 정신없이 달려온 6개월.
"과장님, 긴장돼요?"
옆에서 박팀장이 웃으며 물었다.
나보다 2살 어린 남자 팀장.
"네... 좀요. 근데 자신 있어요!"
"그래요, 잘할겁니다. 어디 한번 볼까요?"
박팀장이 자연스럽게 내 노트북을 들여다봤다.
"아, 맞다. 발표 순서 바뀐 거 알죠?
내가 먼저 하고 김과장이 하는 걸로."
"네? 그런 얘기 처음 듣는데요?"
"아까 임원실에서 연락 왔어요. 괜찮죠?"
"자, 그럼 박재민 팀장의 프로젝트 발표를 듣겠습니다."
대표이사가 말했다.
잠깐, 뭐라고? 박재민 팀장의 프로젝트?
박팀장이 앞으로 나가며 노트북을 연결했다.
화면에 떠오른 첫 페이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멈췄다.
"신규 고객 확보를 위한 디지털 마케팅 전략"
발표자: 박재민 팀장
이건... 내 PPT였다.
내가 새벽마다 만든,
내가 분석한 데이터,
내가 설계한 전략.
심지어 내가 어젯밤 11시에 마지막으로 수정한 그 버전 그대로.
"안녕하십니까.
저희 팀에서 6개월간 준비한 프로젝트를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팀?
"먼저 시장분석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조사한 결과..."
제가 조사한?
내가 3개월 동안 경쟁사 100개를 분석한 그 데이터였다.
"그리고 이 전략의 핵심은 제가 고안한 3단계 접근법입니다."
내가 고안한 거잖아!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12페이지 - 내가 밤새 만든 고객 여정 맵
3페이지 - 내가 직접 설계한 캠페인 구조
35페이지 - 내가 주말에 아이 재우고 계산한 ROI 예측
47페이지 - 내가 3번이나 수정한 실행 로드맵
모든 게 내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어제 오타 낸 걸 고친 흔적까지 그대로였다.
대표이사가 박수를 쳤다.
"박팀장, 정말 탁월한 기획이네요.
이런 전략을 어떻게 생각해 냈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밤새 데이터를 분석하고..."
내가 밤샌 건데?
"특히 이 3단계 접근법이 핵심입니다.
제 경험을 바탕으로..."
내 아이디어잖아!
"우리 회사 미래가 밝아 보입니다.
박팀장 수고 많았어요!"
박수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김과장님도 수고했어요."
박팀장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팀장님... 저... 저게 제가 만든 건데..."
목소리가 떨렸다.
"뭐라구요?"
"제가 6개월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잖아요.
제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했었는데..."
박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김과장, 우리 팀으로 한 거잖아요.
팀 프로젝트지."
"하지만 제가..."
"나도 총괄 지휘했고, 방향 설정했고. 팀으로 한 거야, 팀으로.
그리고 발표는 팀장이 하는 게 맞잖아요. 조직이 그런 거지."
"그래도 제 이름은..."
"김과장."
박팀장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조직 생활 12년 했으면 알잖아요?
팀 성과는 팀장 성과야.
대표님 앞에서 과장이 발표한다? 그게 말이 돼요?"
"..."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요.
우리 같이 한 거잖아요.
그쵸?"
박팀장이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복도에 혼자 남았다.
거울 속의 나를 봤다.
마흔 하나, 워킹맘, 12년 차 과장
6개월 동안 뭘 한 거지?
새벽 2시까지...
아이 재우고 거실 바닥에 앉아서 데이터 분석..
100개 경쟁사 조사하며 눈 비비던 날들..
주말마다 카페에서 전략 수립..
낮 시간에는
회의에서 아이디어 내고,
팀원들과 논의하고
팀장에게 중간 보고하고..
그 모든 게 팀장 이름 석 자 아래로 사라졌다.
"박재민 팀장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나는 단지 "팀원 중 하나"가 되었다.
눈물이 났다.
화가 났다.
억울했다.
"엄마, 울어?"
네 살 아들이 물었다.
"아니야, 엄마 안 울어."
거짓말이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울었다.
남편에게 전화했다.
"여보... 나... 오늘..."
말하다가 울음이 터졌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6개월... 6개월 동안... 내가...
아이 재우고... 밤새서... 만든 거를..."
"진정해. 천천히 말해봐."
한참을 울고 나서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다.
남편이 말했다.
"그건... 너무한 거 아니야?"
"맞지?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근데... 회사에서 원래 그런 거 아니야?
팀장이 공을 가져가는 거..."
아니, 이것도 '원래 그런 것' 인가?
잠이 안 왔다.
머릿속으로 계속 돌아가는 장면.
대표이사의 "박팀장, 훌륭합니다!"
박수 소리..
박팀장의 "우리 팀으로 한 거잖아"
노트북을 켰다.
이메일 폴더를 열었다.
6개월 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록.
프로젝트 제안서 (내가 작성)
시장 조사 자료 (내가 분석)
전략 수립 회의록 (내 아이디어)
중간보고 자료 (내가 제작)
최종 발표 자료 (내가 완성)
모든 파일의 '만든 사람'에는 "김지영"이라고 쓰여 있었다.
타임스탬프를 봤다.
2024년 9월 15일 새벽 2:34 - 초안 작성
2024년 11월 23일 새벽 1:47 - 데이터 분석
2025년 1월 8일 새벽 3:12 - 전략 수정
2025년 3월 13일 밤 11:28 - 최종 수정
모든 증거가 있었다.
새벽하늘을 봤다.
동이 트고 있었다.
마흔 하나 워킹맘이 6개월 밤을 새운 이유가 뭐였을까?
승진? 인정? 성과?
아니, 단순했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싶었을 뿐.
거울 앞에 섰다.
"나... 이대로 넘어갈 거야?"
"이게 정말 '원래 그런 것'이야?"
"내 아들이 자라서 엄마에게 물어볼 거야.
'엄마는 어떻게 살았어?'"
그때 뭐라고 대답할 건데?
"엄마는 참고 살았단다. 그게 현명한 거래."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노트북을 열고 새 폴더를 만들었다.
폴더명: "증거"
6개월의 밤샘이 3분 만에 사라진 날.
마흔 워킹맘은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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