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팀장한테 성과를 빼앗기다.

EP2. 팀 성과는 곧 팀장 성과라며?

by 날라리부장

다음날 아침, 출근길 지하철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어제 모은 증거 파일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프로젝트 제안서 초안 (작성자: 김지영)

시장 조사 데이터 (작성자: 김지영)

전략 기획안 (작성자: 김지영)

최종 발표 자료 (작성자: 김지영)


모든 파일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박재민 팀장의 탁월한 기획력!"



오전 9시, 사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팀 단톡방이 울렸다.


[마케팅 1팀 단톡방]

박팀장: 어제 발표 잘 끝났습니다!

팀원 여러분 수고 많으셨어요.


이 과장: 팀장님 발표 정말 멋졌어요!


최대리: 역시 팀장님! 짱입니다!


김사원: 대표님이 엄청 칭찬하셨다며요?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팀장실 호출


"김대리님, 잠깐 들어오세요."

박팀장이 나를 불렀다.


들어가자마자 박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발표, 대표님이 엄청 만족하셨어요.

우리 팀 평가 올라갈 거예요."

"..."


"특히 3단계 접근법.

그거 완전 혁신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김대리도 기여한 부분 있으니까 같이 좋은 거잖아요?"


기여한 부분?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팀장님, 어제 발표 자료 말인데요."

"네?"


"그게... 제가 6개월 동안 만든 건데...

제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했었잖아요."

박팀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김대리, 어제도 말했잖아요.

그게 팀 프로젝트였다고."


"하지만 처음 제안도 제가 했고,

기획도 제가 했고,

자료도 제가 만들었잖아요."


"그래요. 김대리가 실무를 많이 했죠.

근데 그걸 총괄하고 방향 설정한 건 나잖아요?"


"방향 설정이요?"


"그렇죠.

내가 중간중간 피드백 주고,

방향 잡아주고.

그게 팀장 역할이잖아요?"



피드백이라고?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박팀장의 '피드백' 기록...


2024년 9월 - 프로젝트 제안 시:

나: "신규 고객 확보 전략 프로젝트 하면 어떨까요?"

팀장: "음... 괜찮네요. 한번 해보세요."


2024년 11월 - 중간보고 시:

나: "경쟁사 100개 분석 완료했습니다."

팀장: "오케이. 계속 진행하세요."


2025년 1월 - 전략 수립 시:

나: "3단계 접근법으로 설계했습니다."

팀장: "좋아요. 그대로 가시죠."


2025년 3월 - 최종 검토 시:

나: "최종 자료 완성했습니다."

팀장: "잘했어요. 발표는 내가 할게."


이게 '총괄'이고 '방향 설정'이라고?


"팀장님, 근데 처음엔 제가 발표한다고..."

"김대리."

박팀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리가 임원 앞에서 발표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조직에서는 팀장이 대표해서 발표하는 게 상식이죠."


"그럼 적어도 '팀원 김지영 대리와 함께...' 정도는..."

"야."


기어코...

반말이 나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회사 생활 12년 했으면 이런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잖아."

"..."


"팀 성과는 팀장 성과야.

그게 조직이야.

김대리가 만든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책임지고 추진했느냐가 중요한 거지."


"하지만..."


"그리고 말이야."


박팀장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김대리 혼자 한 것도 아니잖아.

최대리도 데이터 수집 도와줬고,

이 과장도 시장 조사 같이 했고.

팀으로 한 거야, 팀으로."



팀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최대리가 도와준 거?

2일 동안 데이터 정리 좀 도와준 게 전부였다.


이 과장이 시장 조사를 같이?

내가 조사한 걸 한 번 검토해 준 게 다였다.


나머지 5개월 23일은?

전부 내가 혼자 했다.


새벽까지, 주말까지, 육아하면서도.


"팀장님, 그래도 이건..."

"김대리, 그만하시죠."

박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요즘 예민한 거 아닙니까?

육아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거 아는데,

근데 그걸 회사에서 풀면 안 되죠."


육아 때문에 예민하다고?


"이거 육아 문제가 아니라..."

"네네. 내가 이해는 합니다.

근데 조직에서는 이런 거예요.

받아들여야지."



점심시간, 동기와의 통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12년 차 동기 수진이에게 전화했다.


"야, 있잖아..."

상황을 설명했다.


한참을 듣던 수진이가 한숨을 쉬었다.


"지영아... 그거 우리 팀도 비슷해."

"응?"


"작년에 내가 3개월 밤새서 만든 보고서,

우리 팀장 이름으로 올라갔어.

나는 '참여'한 거로."

"진짜? 너도?"


"응. 화나서 항의했더니 알아? 뭐래?"

"뭐래?"


"'팀원이 발표하면 팀장 관리 능력 없어 보인대.'

그러면서 이게 다 나를 위한 거래."

"미쳤네..."

"그래서 나는 그냥 포기했어. 어차피 싸워봤자 내만 손해잖아."


전화를 끊고 멍하니 있었다.



오후, 인사팀을 찾아가다


점심도 못 먹고 인사팀을 찾아갔다.

"저... 상담 좀 하고 싶은데요."

인사팀 김 과장이 나를 맞았다.


"무슨 일이세요?"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6개월 동안 만든 프로젝트를

팀장이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김 과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게..."

"이게 정당한 건가요?"


"김대리님, 이해는 가는데요.

근데 조직에서는...

팀 단위로 움직이잖아요?"

"네?"


"팀장이 그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관리하고, 책임진 거잖아요.

그럼 그게 팀장 성과로 가는 게... 보통이에요."

"하지만 제가 실제로 만든 건데..."


"그건 알아요. 근데 조직 문화가 그래요.

팀장이 대표해서 발표하는 게 일반적이고..."

"그럼 제 노력은요? 제 6개월은요?"


김 과장이 한숨을 쉬었다.


"김대리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근데... 싸워봤자 대리님만 손해예요.

팀장이랑 관계 나빠지면 앞으로 일하기 힘들잖아요."


"그럼 그냥 참으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조직 생활이 그런 거예요. 다들 그렇게 해요."



저녁, 회사 앞 커피숍


퇴근 후 혼자 커피숍에 앉았다.


모두가 하는 말...

"조직에서는 원래 그래"

"팀 성과는 팀장 성과야"

"싸워봤자 네만 손해야"

"다들 그렇게 살아"


정말?

다들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야?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만든 '증거'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구글에 검색했다.

"성과 가로채기 대응법"

"부당한 성과 평가 신고"

"직장 내 부조리 고발"



그날 밤, 집에서


남편이 물었다.


"오늘 어땠어? 팀장한테 말했어?"

"응... 말했어."


"뭐래?"

"팀 성과는 팀장 성과래. 조직에서는 원래 그렇대."


"..."

"인사팀도 갔다 왔어."


"뭐래?"

"싸우지 말래. 네만 손해래."


남편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근데... 그게 맞는 말 아니야?

조직에서 싸우면 진짜 너만 손해잖아."

"..."


"대리면 몇 년 더 있으면 과장되잖아.

그때까지만 참고..."


"10년?"

"응?"


"10년 더 참으면 과장되는 거야.

그럼 또 10년 참으면 차장 되는 거고.

그럼 또 10년 참으면 부장 되는 거야?"

"그게..."


"그렇게 평생 참고 사는 게 정답이야?"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벽 2시


또 잠이 안 왔다.


노트북을 켰다.


'증거' 폴더에 파일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제안서 (2024.09.15 02:34)

1차 시장 조사 (2024.10.08 01:47)

경쟁사 분석 100개 (2024.11.23 01:47)

전략 초안 (2024.12.15 03:12)

중간 보고 자료 (2025.01.08 03:12)

최종 발표 자료 (2025.03.13 23:28)


그리고 이메일 기록도 추가했다.


[2024.09.15 오전 9시] 제목: 신규 프로젝트 제안 From: 김지영 To: 박재민

[2024.11.20 오후 3시] 제목: 경쟁사 분석 완료 From: 김지영 To: 박재민

[2025.01.05 오후 5시] 제목: 3단계 전략 기획안 From: 김지영 To: 박재민


모든 이메일에 박팀장의 답장: "오케이" "확인했어" "진행해"

이게 '총괄'이고 '방향 설정'이라고?



결심


거울을 봤다.

부은 눈, 지친 얼굴.

6개월 밤을 새운 흔적.


"나... 정말 이대로 넘어갈 거야?"


모두가 말한다.

"조직에서는 원래 그래"

"팀 성과는 팀장 성과야"

"싸워봤자 네만 손해야"


그런데 말이야.

이게 정말 '원래 그런 것'이 맞아?


6개월 밤샘이 '팀장 오케이' 세 글자와 같은 가치야?

내 노력이 '조직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져도 돼?


노트북 화면을 봤다.

'증거' 폴더가 열려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폴더를 하나 더 만들었다.


폴더명: "반격"


"조직에서는 원래 그래"라는 말의 무게.

하지만 마흔 워킹맘은

'원래'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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