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나의 취업 스토리 7
대학원에서의 나는 자아라는 것이 없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교수님의 노예였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그러니까 장장 초등 6년, 중학 3년, 고등 3년, 대학 4년, 대학원 약 8년...
총 24년 동안 공부'만'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그냥 주어진 공부를 해 오는 것 이상으로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군대도 전문연구요원으로 복무해서인지, 나에게는 자아를 찾는 '인생 탐구 정신'을 기를 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쉴 때는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이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다.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가고,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살다 보니 지금의 상태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런 내가, 2024년 9월 드디어 사회에 나온 것이다.
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던 그 느낌.
마치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내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아는 것 같았던 그 느낌.
이런 느낌들 속에 다시 한번 나를 던져 놓은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하던 시절에 나는 좌절했고,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와서도 나는 좌절했다.
그러면서 배웠던 교훈이 '인생에 끝이라는 것은 없다'였는데, 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결국 2024년 12월 나는 다시 한번 좌절했다.
가능한 모든 학위를 다 거친 (사실 석사는 없지만) 나는 자만심, 그걸 드러내고 싶은 허영심만 가득했다.
이런 사람에게 필수불가결하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보상, 좌절감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2023년 10월 예비심사가 끝났을 때,
연구실 선배가 나의 버르장머리 없는 한마디에 대한 답을 기억해서였다.
선배 : 졸업하고 삼성전자 올 생각 없어? 너 전공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나 : "삼성전자는 집에서 너무 멀어서요..."
선배 : 뭐, 언제든 삼성전자 오고 싶으면 연락해. 형은 너랑 일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
역시나 돌이켜봐도 나는 미친 사람이 분명하다.
여하튼,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셨던 형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염치불고 선배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당시 형님은 삼성전자에서 보내준 연구년(?) 같은 것으로... 월급을 받으시며(?) 1년간 미국 어딘가에서 근무 중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것도 아무나 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카더라. 고과가 엄청 좋아야 한다던데?)
그 이후에 12월 말 경, 형님은 미국의 대표 휴양지인 하와이에서 한국을 돌아올 준비를 하고 계셨다.
갑작스레 드린 연락에도, 다음 날 선배에게 아무렇지 않은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다음날 점심 경, 하와이로부터의 보이스톡을 받게 되었다.
내가 인턴일 때 이 형님께서는 박사를 받은 직후셨고, 그래서 나는 처음엔 선배님, 박사님 하며 호칭도 제대로 못 불렀던 기억이 있다. 그런 정도로 나는 이 형님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워했다.
그래서인지 형님께 온 전화를 받는 내내 굉장히 떨렸던 기억이 난다. 결론은, 통화 내용 자체가 기억에 잘 남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통화하면서 알려주신 몇 가지 키워드를 듣고, 어떤 부서에 지원해야 하는지도 들었지만 여러 삼성 내부의 관련 소식들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보내주신 메일을 받고 삼성 TSP에 지원했던 나의 원서를 기반으로 쓰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 형님이 계신 곳은 삼성전자 화성캠퍼스에 있는 메모리사업부로, 지난 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TSP총괄부서와 지원이력이 공유되지 않는다. 나는 TSP총괄부서 인사팀에 연락해서 지원 철회를 하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들었다. 같은 회사에 지원을 두 사업부에 해서 프로세스가 두 개 도는 것 자체가 추후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한다!), 메모리사업부의 사내 추천 전형을 돌게 되었다.
특이한 점은, 삼성전자의 입사지원서 관련이다.
내가 처음 TSP총괄부서 인사팀을 통해 받은 입사지원서는 다음과 같은 목차로 구성되어 있었다.
1) 개인정보 : 인적사항(지원 부서 포함), 학력사항, 경력사항, 자격사항, 어학사항, 특기사항(병역 등)
2) 석, 박사과정 중 연구경력 : 프로젝트(연구과제) 수행 내용 작성 및 논문/특허/수상 내역
3) 경력사항 기술 : 포닥 경력 중 수행했던 프로젝트 내용 작성
4)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는 총 4가지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① 삼성전자 DS부문 지원동기 및 입사 후 맡고 싶은 업무
② 지원 분야 필요 역량 및 이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
③ 협업을 통해 난관을 극복한 경험 및 이 과정에서 내가 맡은 역할
④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한 경험
그런데, 메모리사업부 입사지원서는 다음과 같은 목차였다.
1) 개인정보 : 인적사항(지원 부서 포함), 학력사항, 경력사항, 자격사항, 어학사항, 특기사항(병역 등)
2) 경력사항 기술 : 포닥 경력 중 수행했던 프로젝트 내용 작성
3) 경럭회사내용 : 개요 및 연혁, 회사소개, 담당업무 및 주요 성과, 전직사유
4)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는 총 4가지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① 대인관계
② 장점과 단점
③ 학생시절/사회생활
④ 입사 후 포부
신기하지 않은가? 같은 회사의 지원서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니.
나는 TSP총괄부서 입사지원서를 조금 바꿔서 제출하려고 했는데 거의 새롭게 써야 하는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 되었지만,
당시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웠던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자만심은 바로 '지난번에 했던 거 조금 바꿔서 하면 되겠지'가 아닐까 싶다. (나중에 나올 현대모비스 이야기에도 등장할 것이다!)
이런 자만심들을 점차 놓아가는 과정, 그게 바로 취업 준비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이때 즘이었을까? 아내가 본격적으로 나에게 취업 관련 조언을 해줬던 것이.
분명히 취업 시장에 뛰어들 때부터 해줬겠지만, 내가 귀담아듣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고 한 것이 정확하겠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이 취업에 가장 중요하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아내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이미 이 글을 써보기도 전에 회사에 입사했을지도. (취업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자!)
아내의 조언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선배들한테 더 많이 연락해라.
함께 연구실을 다니지 않은 선배라도 졸업해서 인사드리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드리고, 궁금한 점을 많이 여쭤라. 추천 채용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2) 미리 준비해라.
면접 준비, 서류 준비를 때가 닥쳐서 하지 마라. 미리 써보고 고쳐라. 일반적인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을 만들어라.
3) 객관적인 지표를 달성해라.
인사팀은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남들이 다 가진 객관적 지표 없이 서류 통과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1번은 점차 실행하는 중이었고, 2번은 내가 차차 나아가면 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번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평생에 살며 공인영어 점수를 따본 적이 딱 두 번 있다. 고등학교 시절 TEPS, 그리고 졸업을 위해 학과에 제출해야 했던 TOEIC이다.
나 스스로의 영어 실력은 참 형편없다고 생각한다. 논문도 영어로 쓰고, 학위논문도 영어로 쓰고, 해외학회도 매년 다녀왔지만 실제로 내 영어 의사소통능력은 매우 부족하다. 이런 영어 울렁증이 있어도 박사 졸업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ChatGPT의 영향으로 이런 부족함을 느낄 새가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영어 실력과 영어 점수는 또 다른 문제다. 연구실 선배와의 통화에서 회사 이야기 이외에 기억에 남았던 말씀이 딱 하나 있는데,
영어는 잘하니? 남들만큼은 하지?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은 했는데... 저 말인즉슨 영어 실력이 꽤나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인사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어떤 지원자가 박사도 했고, 뭐 학부도 대학원도 잘 다녔고, 학점도 괜찮고...
그런데 다른 지원자들 전부 다 가진 그 흔한 영어점수 하나가 없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생각이 들까?
얘가 영어에 자신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냥 가서 시험 한번 보면 나오는 게 점수일 텐데, 성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취준생은 항상 회사에게 을이다.
회사가 나를 알아봐 주길 기다리지 말고, 회사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자는 취지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내가 조언해 준 대로 가장 빠른 날짜의 TOEIC 시험을 접수했다.
(시험 접수는 https://exam.toeic.co.kr/)
크리스마스이브에 결과가 나오는 시험이었다.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고, 같이 졸업한 연구실 후배한테 토익 실전 편을 받아서 5회를 풀고 가는 것만이 유일한 준비 방법이었다.
아, YOUTUBE를 통해서 토익 꿀팁들도 많이 검색해 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꿀팁을 공유한다.
토익 듣기 시험에서 대화 하나에 3개의 문제를 푸는 문항들이 있는데, 이 문항을 끝까지 듣고 생각해서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대화 순서대로 1, 2, 3번 문제를 푸는 것이라는.... 내가 말해놓고 봐도 정말 별거 아닌 팁인데 아마 토익 듣기를 해본 사람들에게는 꽤나 머리를 울리는 팁 일거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나는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영어 점수를 받았다. 솔직히 첫 시험이고 시험장에서 듣기가 너무 징징거리며 들린 탓에 기대 없이 다음 시험을 예약했었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너무 잘 나와서(토익은 상대평가다!) 1회 차만에 의미 있는 점수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점수를 가지고 12월 26일 아침, 나는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에 다시 지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2024년 마지막 입사지원서 작성이 끝났다. 남은 것은 기다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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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입사지원서는 1월 초에 선배가 귀국하신 이후 인사팀으로 전달되었다.
그러고 나서 2025년 7월 지금까지, 그 입사지원서에는 소식이 없다. (!!!!!!!!!!!!!!!!!)
누가 사내 추천 제도 좋다고 했냐... 나와라.....